이왕 80년대를 조금 더 얘기한다면 1984년을 말하고 싶다.

그때는 80년대 초반을 지나 중반으로 넘어가는 시기로 국가적으로 봤을 때 LA올림픽이 있었던 해였고, 4년 뒤 88 서울 올림픽이 있을 거란 기대감 때문이었을까, 그 대회에서 처음으로 세계 10위 안에 드는 쾌거를 이루고 올림픽기를 넘겨받기도 했으니 뜻 깊은 한 해이긴 하였을 것이다.

출판계에선 때에 맞춰 조지 오웰의 <1984>란 책을 내고 그를 띄우는 작업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특별히 1984년에 TV를 통해 방영된 두 드라마를 얘기하고 싶다. 하나는 <야망의 계절>이란 미국 드라마고, 하나는 <보통 사람들>이란 한국 드라마다. 

                       

 

그렇다고 이 두 드라마의 시작 년도가 1984년란 말은 아니다. <야망의 계절> 같은 경우 1976년 처음 우리나라에 방영됐다고 한다(예전에 TBC란 방송이 있었는데 거기서 처음으로 방영됐고, 이후 TBC80년에 KBS와 통합되었다).

그런데 나는 그때는 방영된 줄도 몰랐고 알았어도 그땐 너무 어려 볼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또한 우리 드라마 <보통 사람들> 같은 경우는 1982년에 시작해서 종영했던 해가 1984년이다. 일일 드라마 치고 200회를 훨씬 넘기고 종영했으니 장수 드라마고 그래서 기네스에 올랐다는 말도 얼핏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야망의 계절> 같은 경우 이 작품은 어윈 쇼라는 작가가 쓴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 한 것으로, 원제는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라고 한다. 나는 영화가 너무 재미있어 나중에 책으로 사서 읽기도 했는데 막상 책은 영화만큼 재미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전화번호부만한 두께의 책을 거의 한 달쯤 걸려 완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처음에 나왔을 때는 단행본으로 나왔는데 세월을 거치는 동안 세 권으로 나왔고 그나마 지금은 절판된 상태다). 재미없으면 읽다가 포기했을 텐데 그래도 완독을 했던 것을 보면 포기할 만큼 재미없었던 건 또 아니었다.

이 작품은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조르다슈 가문의 이야기로 이민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 큰 호응을 얻었다.

무엇보다 나는 보는 내내 이 훌륭한 드라마를 있게 해 준 어윈 쇼란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재미있게 이야기를 엮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 아는가? 이 드라마가 우리나라 당대 작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는 것을. 특히 드라마 좀 본다는 사람들이라면 그 이름 석자를 모를 리 없는 김수현 작가가 그 영화를 모티프로 <사랑과 야망>이나 <사랑과 진실> 같은 연속 히트작을 내놨다.

이 두 드라마가 얼마나 유명했는지 이것이 방송되는 시간엔 수돗물의 사용이 급격히 줄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사실 <야망의 계절>을 모티프로 한 이야기는 김수현뿐만 아니라 나라도 능력만 있다면 이렇게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을 정도다.

특히 이 작품은 조르다쉬 가문의 두 형제가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는데 그것은 카인과 아벨의 신화의 변형으로도 보여 진다. 특히 난 형 루디로 나온 피터 스트라우스를 이 영화를 통해 처음 보았는데 누구라도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마성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가 성공한 후 수트를 입고 나오는 장면이 있었는데 얼마나 멋있던지 남자는 역시 수트빨이란 말은 이때 이 배우한테서부터 나온 말은 아닐까?

<보통 사람들>은 말했다시피 나연숙이란 작가가 쓴 일일 연속극인데, 사실 이 드라마의 제목은 로버트 레드포드가 감독한 동명의 영화를 제목만 그대로 사용했다. 이처럼 나연숙 작가는 가끔 본인이 직접 지은 제목이 아닌 기존에 있는 제목을 그대로 차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그게 약간은 특이하다고 생각했다(물론 기억하기엔 좋긴 하지만 자신의 작품을 기억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도 보여 묘한 느낌을 갖게 한다).

특히 제목을 <보통 사람들>이라고 해서 정말 보통 사람들이 나오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하지만 또 새삼 보통 사람의 기준은 뭘까를 생각해 본다. 보통은 중산층을 그렇게 부르지 않을까? 아니면 적어도 3대가 오순도순 살아가는 걸 보통 사람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어쨌거나 이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리 보통스럽지는 않다. 가장 역을 맡았던 배우 이순재는 당시 언론 쪽에 종사 했던가 그랬던 것 같고, 그의 동생은 송재호가 맡았는데 나름 성공한 소설가이고, 그의 아내는 연극배우며, 이순재의 아들은 고시 준비생 등 아무튼 그의 몇 대손 할아버지는 벼슬을 크게 했을 것만 같은 뼈대 있는 가문처럼 보인다. 그러니 뭘 보고 보통 사람들이라는 건지 제목이 오히려 생소할 정도였다.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이 드라마는 지극히 보통스럽기도 하다. 그렇게 사회적 지위가 보통스럽지 않을 뿐이지 사는 모양새는 보통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이 드라마는 요즘 말하는 막장 드라마는 아니었다. 오히려 바른 생활 드라마라 하리만큼 등장인물이 극단적인 성격인 사람이 없다. 그러고도 시청률에서 수위를 차지하고, 일일극으로 2년을 하고 막을 내렸다면 가히 대단하다는 말밖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순재 씨의 부인으로 나온 김민자 씨다.

김민자 씨는 정말 누가 봐도 현모양처의 이미지다. 그런 그녀가 드라마에서 늦깎이 작가지망생으로 나온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런 그녀를 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현모양처는 뭐 작가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는가? 그리고 어찌 보면 현모양처가 직업을 갖는다면 작가만큼 어울리는 직업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녀의 시동생이 작가가 아니던가? 평소 좋은 형수와 시동생 사이였으니 시너지 효과는 백 배였을 것이다.

기억이 나는 건, 그녀가 등단을 목표로 시장을 봐 오는 길에 헌책방에서 책 몇 권을 싸게 샀다고 자랑하는 장면이었다. 그게 또 어쩌면 그리도 알뜰해 보이던지.

그런데 이 장면의 잔상이 세월이 가면 갈수록 오래도록 남는 건 왜일까? 비록 드라마라고 하지만 왠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지금은 헌책도 어떤 책은 새 책 못지않게 깨끗하다. 그래서 누구는 헌책이라 부르지 말고 중고 책이라 부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시대의 헌책은 말 그대로 헌책이다. 물론 우리에게 헌책은 그 나름의 향수를 선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모양처에 살림만 했을 그녀 자신에게 책은 자신만을 위한 호사였을 것이다. 장을 봐 가지고 온 장바구니에 어디 자신만을 위한 물건이 하나라도 있었을까? 온통 가족을 위한 식재료들이 한 바구니었을 것이다. 때로는 자신이 자신에게 상을 줄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책이 유일하게 그녀 자신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상이요 호사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헌책이었다니. 새 책이어도 좋지 않았을까? 그 헌책을 사 가지고 돌아 온 이 현모양처를 우리는 그저 좋아만 해도 될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게다가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녀는 원천적으로 작가가 될 수 없는 환경에 처해있다.

물론 그녀가 글을 쓰기 위해서 가족들에게 이해와 협조를 구하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왕 가족이 그녀의 꿈을 지지했다면 오히려 그녀를 몇 달 시골이나 사찰 같은 곳으로 보내 글만 쓰라고 했어야 했던 건 아닐까? 그게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적어도 가사도우미 정도는 쓸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냉철하게 말해 작가란 그렇게 할 일 다하고 남는 시간에 글을 쓸 수 있는 꿈의 직업이 아니다.

또한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의 구조를 보면 대가족에 맏며느리로 본채도 부족해 별채까지 두고 있다(그런 것으로 봐서 그 집은 누가 봐도 꼭 옛날 아흔 아홉 칸 양반 집을 연상케 한다).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선 꽤 낭만 있어 보이긴 한다. 하지만 평생 넓은 집에서 다리를 종종거리며 살아왔던 엄마를 보고 자라서 그럴까 난 그 집의 구조가 김민자 씨에 연민을 갖도록 만들었다. 얼마나 힘들까? 자기 방은 각자가 알아서 청소한다고 해도 그 나머지 공간은 그녀의 차지였을 것이다. 더구나 가족이 매일 먹는 음식과 특히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만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시동생은 뭐 때문인지 자기 집 놔두고 별채의 서재를 점령하고 나오지 않는다. 시동생이 사람 좋은 사람으로 나와서 그렇지 형수의 입장에서 보통 신경 쓰이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시동생은 말로만 형수를 위하는 척하지 얹혀사는 주제에 서재는 독차지 하고 여간 해서 서재를 형수에게 양보하는 법이 없다.

아직 등단하지 않은 작가지망생이라면 선배 작가고 같은 아군으로 도움을 주는 입장이지 그녀가 정식 작가가 되면 언제 라이벌이 될지 모른다.

이렇게 김민자 씨는 극중에서 낮에는 집안 주변을 돌보고 짬짬이 책을 읽으며 밤에는 글을 쓰는 그야말로 주경야독의 삶을 사는데 잠자는 것도 아까워 시동생이 없는 밤 시간에 서재에서 쪽잠을 자며 글을 써 신춘문예에 등단에 성공한다는 스토리는 재투성이 아가씨의 또 다른 버전을 보는 것도 같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 '제대로 사는 인간의 정의를 정말 중요한 것에 힘을 몰아주고 나머지는 대충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 난 그 말에 동의한다.

그에 비해 그녀의 손아랫동서는 연극배우고 살림은 못하지만 당차고 소위 말하는 현대 여성을 대표한다. 물론 드라마는 당연 이를 통해 김민자를 더 조명한다. 왜 그랬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여성의 덕목 특별히 맏며느리에 대한 덕목이 가족 화목을 위해 더 많이 노력하고 거기에 작가의 꿈을 이루는 슈퍼우먼이어야 하는 환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땐 그 드라마가 그렇게 했어도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요즘의 잣대로 보면 드라마에서의 김민자는 자신의 일을 위해 더 많은 것을 포기하고 투쟁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그 때 그 드라마에서 맡은 김민자 씨의 캐릭터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여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래 놓고 보통 사람들이라니! 그저 뭔가 모를 연민이 느껴질 뿐이다.

유명한 페미니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란 책에서 여자가 작가로 성공하기 위해선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은 작가에 대한 환상이 있다. 그것은 대부분의 동화의 끝이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것으로 끝나듯 한 번 작가는 영원한 작가인 양 하는데 물론 작가의 명예를 생각하면 그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작가하면 일부 성공한 전업 작가를 생각하는데 첫 작품을 내고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작품을 못 내고 잊혀지는 작가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하지 못한다.

그렇듯 드라마는 김민자 씨가 신춘문예에 당선 됐다는 기쁨에 겨워하는 장면만을 담았을 뿐 그 이후에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다루지 않고 있다. 모르긴 해도 둘 중 하나지 않았을까? 두 번째 작품을 써 내기 위해 그야말로 고군분투 했거나 가정의 화목을 위해 다시 예전의 현모양처로 돌아갔거나.

어떤 경우든 전적으로 그녀의 선택이고 두 번째의 경우는 잘 모르겠는데 그녀가 만일 첫 번째의 선택을 했다면 이번엔 가족이 전적으로 그녀를 이해하고, 양보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무렵 나도 신춘문예 응모하겠다고 뭔가를 끄적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것이 <야망의 계절><보통 사람들>의 영향 때문임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물론 쉽지 않아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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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5-12-11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반가워 죽을 뻔했어요. 저 남자, 루디로 나온 피터 스트라우스가 그 시대에 저의
남자 이상형이었어요. 긴 팔의 흰 와이셔츠를 걷어 입길 좋아했는데 멋졌죠. 잊지 않고 봤던
드라마였죠.
<보통 사람들>도 생각나요. 말이 안 된다고 봤죠. 맏며느리가 그저 한 번에 소설을 썼더니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는 것. 천재인 모양이에요. 게다가 식모로 나오는 금보라는 대학에 붙더니 대학생이 되고 그 집 손자와 결혼해 살고... 한마디로 <특이한 사람들>이었죠. 작가가 꿈꾼 이상적인 가정을 보여 주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아, 이런 걸 기억해 내고 쓰시다니... 덕분에 추억의 드라마, 잘 감상했어요.

stella.K 2015-12-11 15:24   좋아요 0 | URL
ㅎㅎ 언니 와락~!
이 글 올려놓고 무플이어서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나 보다고
손들고 있으려고 했는데 이런 댓글을 써 주시니니...! ㅠㅠㅠ

언니도 기억하시는군요. 정말 지금 생각하면 보통 사람들 말도 안 되는데
그땐 왜 그렇게 꼬박꼬박 봤는지 모르겠어요.

피터 스트라우스는 그 영화에 나오고 어디 안 나왔나 봐요.
정말 좋아 했는데... 지금 보면 많이 늙어 있겠죠?ㅠ

2015-12-11 17: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1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