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컨대 작년 내가 본 최고의 드라마는 '미생'이었다. 물론 이 드라마 못지 않게 좋은 드라마도 적지 않겠지만 작년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이 드라마만큼 그 감동과 잔상이 많이 남은 드라마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럴까? 별로 관심은 없지만 얼마 전 열렸던 '서울 드라마 어워즈'에서 최우수 작품상인가 뭔가를 탔다고 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올해 최고의 드라마는 어떤 게 될까?

 

물론 올해도 3개월 여가 남은 상황에서 성급한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내가 본 올해 최고의 드라마는 <어셈블리>가 아닐까 한다.  

 

 

사실 이 드라마는 정현민 작가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보기 시작했는데, 그는 작년에 방영된 정통 사극 <정도전>를 쓴 작가로도 유명하다. 전작의 드라마도 그렇지만 그는 좋은 대사를 쓰는 작가로 유명하다.

왜 있는 사람들을 돈을 쓰는 건 투자라고 하면서 없는 사람들을 위해 돈을 쓰는 건 비용이라고 하는 거냐고 진상필이 외친다. 그때 얼마나 가슴을 후려치던지. 그것 말고도 시청자의 귀를 사로잡는 대사가 무수히 많지만 그 많은 대사를 다 옮겨 적을 수도 없거니와 내가 다 기억할 리도 없다(요즘엔 뒤돌아서면 잃어버리는지라...ㅠ). 

 

하지만 대사 몇 줄 잘 썼다고 좋은 드라마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청자가 어떤 드라마에 사로잡히느냐를 알아야 할터인데, 그냥 단순하게 나를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나는 단연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드라마가 좋다. 드라마 '미생'이 그랬고, 이 드라마 역시 그렇다. 이젠 개천에서 용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일도 현실에선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런 드라마에 더 열광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드라마의 여러 가지 역할 중 하나는 시청자의 의식을 깨우친다는 측면에서(이런 드라마가 몇 편이나 되겠냐마는) 드라마가 환상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어떤 드라마는 자기계발이나 치료에 유용한 드라마도 있는 있는 것이다. 

 

가끔 난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다는 사람을 만나곤 하는데, 물론 나도 드라마 마니아는 아니다. 하지만 정말 괜찮은 드라마는 꼭 본다. 드라마를 얕잡아 보면 안 된다. 사람들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중 하나가 의식을 깨우친다 측면을 얘기하곤 하는데, 잘된 드라마도 그에 못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을 압도하는 작가가 있다면 나는 바로 이 정현민 작가를 들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한간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 드라마가 시청률이 그다지 높지 못했다는 말이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렇게 좋은 드러마가 시청률이 낮다닛! 그렇다면 정현민 작가에게 수식어가 붙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사극을 잘 쓰는 작가'라는 수식어. 하지만 내가 볼 때 그는 현대물도 못지 않게 잘 쓰는 작가다. 그는 어느 날인가 이 드라마 대사에서 정치를 잘하는 사람을 가리켜 '정치 공학'이란 표현을 썼는데, 그는 '스토리 공학'을 구사하는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사람일 것이다.  

혹자는 이런 작가라면 언뜻 작가 김수현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그가 드라마의 여제인 건 사실이지만 스토리 공학을 구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나에겐 그저 배우들로 하여금 히스테리와 넘쳐나는 대사로 혹사시키는 작가로 인식되는지라 그런 수식어가 그다지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대가 다른 사람 아니겠는가. 

 

예전에 글 공부를 했을 때 사부(이 사부는 내가 지금까지 자주 언급했던 사부가 아니다)는 '시나리오는 공학'이라는 말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강조하셨다. 말이 좋아 '시나리오는 공학'이라고 외치는거지 이것을 도통하기란 면벽수행을 해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를 보면 그 공학이 무슨 의민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 쪽대본으로 드라마를 만들던 시대는 갔다고 생각한다. 모르긴 해도 작가는 1부부터 20부까지 어떤 순서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인지를 이미 큰 그림을 그렸고, 배우들 특히 주인공이 차례 차례로 누구와 대결하게 하고 어떻게 문제해결을 해 나갈지, 최종목표가 무엇인지를 계산에 넣었을 것이다.      

  

앞서 정치인을 가리켜 '정치 공학'이란 표현을 썼는데, 일반인으로 보자면 그것은 그다지 최고의 찬사는 아니다. 하지만 정치인 자체로 봤을 때는 최고의 찬사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정치인에게 영혼이 있다고 보는가? 그렇게 본다면 공학이 맞는 얘기고 그게 최고의 찬사인 것이다. 하지만 진상필이란 인물을 통해 작가는 영혼이 있는 정치를 할 수도 있지 않냐고 드라마에 주문을 거는 것이다.

 

주인공 진상필은 다소 아니 아주 많이 외눈박이 또는 돈키호테적 영혼을 가졌다. 한 가지 밖에 모른다. 그래서 가장에서도 이혼 위기를 겪는 인물로 나오기도 한다. 그는 정치인이란 명예나 권력엔 관심이 없다. 오직 억압 받은 노동자들을 대변하기 위해 국회의원이 됐을 뿐이다. 그리고 배달수를 위해서. 하지만 국회에 들어와 그가 부딪혀야 하는 현실은 소위 상위 1%의 인간들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자기 아집으로 똘똘뭉쳐 있고, 얼마나 이합집산을 잘하는 인간들인가를 바라봐야만 했다. 그러다보면 물들 수도 있고,  자기 이익 내지는 타성에 젖을 수 있으며, 그러다보면 애초에 자신이 가졌던 소신 내지는 목표가 흔들릴 수도 있는데 그는 한결 같다. 물론 그래서 손해 보고,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하지만 한결같은 소신으로 그는 정치인으로서의 명예 보단 평범한 소시민적 영웅으로 거듭난다. 또한 그가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건 소신있는 국회의원이 아니라 그것을 버릴 때다.  또한 그로인해 정치인의 허위의식을 여지없이 보여주기도 하는데 궁금한 건 진상필의 실제 모델 있는지 알고 싶어졌다. 없기 때문에 그런 인물을 상상하여 그린 걸까?

 

사실 난 후자쪽에 무게를 더 두는 편인데 그것은  진상필이 어떤 한 사람을 국회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25시간 '빌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로 안건의 통과를 막기 위해 장시간 발언하는 본 회의 무제한 토론)'를 단독으로 진행하는 것에서 였다.  이건 확실히 작가의 상상력이겠구나 싶다. 아무리 강철 같은 몸이라고 해도 국회 연단을 25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고 지킨다는 건 불가능하다.

 

배우 서준영은 영화 배우 정재영을 가리켜 연기 짐승이라고 했다. 그는 영화 <방황하는 칼날>을 가리켜 그런 표현을 했는데 그 점은 나도 동감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도  못지 않게 연기를 잘한다. 처음엔 그 존재감이 별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회를 거듭할수록 그의 핏발 선 충혈된 눈과 다소 쉰 목소리는 일부러 만들어낸 것 같다. 그렇게 소 같은 사람이 연단에만 서면 국회의원들에게 B급 언어로 칼날 같은 폭격을 난사하고 국민을 대변한다. 과연 진상필이 정재영 같고, 정재영이 진상필 같다.

 

특히 이 드라마가 정말로 괜찮다고 느낀 건, 드라마 작가들 걸핏하면 러브 라인을 그려넣는 것을 서슴치 않는데 그건 확실히 자신이 쓰는 드라마가 자신 없으면 잘 쓰는 수법 같다. 이 드라마에서도 보라. 이혼의 위기를 겪고 있고, 미녀 보좌관의 헌신적인 지원을 받는다면 어느 지점에서 러브 라인을 그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건 작가가 그만큼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힘있게 그려나갈 수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난 의학 드라마만큼이나 정치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정말 사람냄새 나는 좋은 드라마다. 이 드라마를 안 봤다면 꼭 보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가 드라마에서조차 위로를 받을 수 없다면 어디서 위로를 받을 수 있겠는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5-09-20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5-09-21 11:39   좋아요 0 | URL
원래 전작 드라마의 캐릭터를 그대로 가져오는 배우들이 있긴 하죠.
박영규가 여기선 좀 더 세게 나오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전 작가가 사극 보단 현대극이 더 잘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국회는 똑똑하고 배웠다는 사람의 각축장이 아니라
정말 국민과 국가를 위해 존재해야 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 드라마가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국회의원들은 이 드라마를 얼마나 봤을까 궁금하기도 하네요.ㅋ

페크pek0501 2015-09-25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드라마를 못 봤네요.

님이 드라마도 배울 점이 있음을 말씀하시니
제가 어떤 드라마에서 배운 게 하나 생각나네요.
아버지가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는데 자식들이 얘기하고 장난치는 (대충 이런)
모습을 보며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일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장면이었죠.
저 소리를 들어 봐. 얼마나 아름다운지...
<가족끼리 왜 이래>인 것 같아요.
계속 보진 못했는데 그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살 날이 많지 않은 사람에겐
가족의 말소리만으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는, 우리는 그것의 아름다움을 모른다는,
새롭게 세상을 보라는, 작가의 메시지가 읽혀졌어요.

좋은 드라마에선 소설 못지않게 작가의 통찰이 느껴지지요.
저는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중에서 재밌게 본 게 많아요.
재능이란, 능력이란 참 멋진 거구나 싶어요.

stella.K 2015-09-25 14:26   좋아요 0 | URL
그건 그래요. 김수현 작가.
그런데 그 특유의 따따거리는 대사가 전 여간해서 적응이
안 되더라구요. 그런 와중에도 정말 고급진 연극을 보는 것 같은
드라마도 있지요. 뭔지 제목은 잊어버렸는데,
김희애가 친구의 남편을 좋아하는 불륜녀로 나오는 드라마나,
수애가 조기 치매로 죽는 드라마 같은거요.
주로 여류 작가들은 대삿발로 승부를 보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분명 그것도 재능이긴 해요. 하지만 상대적으로 구조가 약하지 않나 싶죠.

암튼 어셈블리 한 번 보세요.
일상이 무료하다가도 괜찮은 책을 보거나 드라마를 보면 그나마 활력이
되기도 하더라구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