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스타일이다 - 책읽기에서 글쓰기까지 나를 발견하는 시간
장석주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졸작이라도 '쓸 수 있는 용기'이다.(101p)'

벌써 7년쯤 된 일이 되어버렸다. 그때 난 예전에 배웠던 글선생님을 찾아 가 다시 배움을 청한 적이 있다. 이 선생님을 찾아간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건 소설을 쓰기 위함이었다. 웬지 이때야말로 나의 남은 생은 오로지 소설에 바쳐야겠다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기 전 선생님께 점검 겸 마지막으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선생님이 소설을 가르쳤냐면 그렇지도 않았다. 선생님의 시작은 소설이었지만 지금은 시나리오를 가르치신다. 하지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시나리오와 소설이 아무런 관련이 아무 것도 없다고 누가 그러더란 말인가.

워크숍 방식으로 진행되는 선생님의 수업에서 나는 내가 글을 쓰는 수준이 어느 정돈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도 하필 가장 글쓰기가 어렵다는 시나리오로. 선생님을 처음 뵈었던 13년 전엔 단편 소설을 써서 칭찬을 받았었다. 비록 장르는 다르지만 이번에도 내가 칭찬을 받을만 한지 알아 보고 싶었다. 그동안은 어디가서 글 못 쓴다는 소리는 안 들었으니까. 깐엔 여기서 평가 받고 후에 난 소설을 쓰겠다고 다짐했던 게지.

지면상 시시콜콜한 얘기는 다 할 수는 없고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한마디로 참패였다.

선생님이 워낙에 기가 세신 분이라 나중엔 눈물이 찔끔거릴 정도였다. 더구나 착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당시 어떤 남자 수강생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을 텐데 나에게 적잖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고 나는 이것을 차마 끊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선생님과 (그를 포함한)모든 수강생으로부터 좋지 않은 평가를 받고나니 더 이상 글을 못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동안 내가 글을 잘 쓰는지 못 쓰는지도 모르고 살아왔던 것일까? 뭔가 모를 자괴감이 들었고 무엇보다 그 남자 수강생에게 부끄러웠다. 

시간은 때로 빨리도 가지만 어느 땐 느리도 간다. 하지만 확실한 건 어쨌든 시간은 흐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나는 이 책의 저자에게서 위의 구절과 마주하는 것이다.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졸작이라도 '쓸 수 있는 용기'이다. 이 비슷한 이야기를 당시 나와 단짝이던 강이 하기도 했다. "언니, 우린 어쨌든 써 냈다구. 저 안 쓰는 인간들(워크숍 작품을 내지 않는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가 훨씬 나은 거야." 나를 위로하느라 하는 말이지만 당시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일은 내가 앞으로 겪어야 하는 많은 혹평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책은 말한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바로 실패를 낳는다. 실패를 즐기고, 실패에서 배워라. 실패나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자신의 길을 단박에 찾아가는 사람은 드물다고(57p)

지금도 문득문득 생각해 본다. 나는 그때 왜 옛 선생님을 찾아갔던 걸까? 어쩌면 뭔가 직선으로 가야할 길을 돌아갔던 것은 아닐까? 내가 나를 생각해도 정말로 해야할 일을 하지 않고 순간 멈칫거리고 주저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 습성에 따라 나는 글을 쓰지 않고 그렇게 선생님을 찾아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겪어야 하는 일을 겪지 않았던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라. 눈물이 찔끔거릴 정도로 참패였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늘 남이 이해하지 못한 글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왔다. 그것은 언젠가 그런 글을 써 봤기 때문에 하는 말일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 단 한편의 글도 쓰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남을 위해 쓰는 글은 얼마나 진실할 수 있을까? 늘 필요에 의해서만 글을 쓰다보니 언제부턴가 '좋았어요'란 말 한마디 듣는 게 내 역할과 가치를 정해버리는 기준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


이 책의 저자는 저 유명한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졸작이라도 쓸 수 있는 용기'이다 밑에 이런 말을 남겨 놓았다. '졸작은 누구나 쓸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써라. 느끼는 대로 솔직하게!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글을 쓰지 말라. 칭찬받기 위해서도 쓰지 말라. 오직 피 흘리기 위해 써라. 자신의 치부, 결점, 상처,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 자신에게 치명적인 바로 그것을 써라. 당신이 모르는 당신을 드러내보도록 하라. 무의식 속에 웅크리고 있는 자아, 당신의 내면 깊은 곳에 숨은 '상처받은 용'을 바깥으로 끌어내라. 밖으로 나온 그 짐승은 용틀임하며 크게 분노해 당신을 할퀴려 들 것이다. ...... 하지만 상처받은 용'을 세상 밖으로 드러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내면을 응시할 수 있으며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101p)


나는 그 선생님에게서 두 번의 배움의 기회를 가져었다. 그랬을 때 한번은 단편 소설을 썼고, 또 한번은 시나리오를 썼다. 한번은 칭찬을 들었지만 한번은 혹평을 받았다. 그리고 이 둘의 공통점은 다 나의 이야기를 썼다는 것이다. 나는 안다. 사람들이 꾸며내고 지어낸 이야기 보다 자신의 이야기에 더 많이 반응한다는 것을. 그런데 단편 소설을 썼을 땐 좋은 평을 받았지만 왜 두 번째는 그런 혹평을 받았던 걸까? 뭐 이유야 따져보면 없지 않겠지만 중요한 건 혹평을 받은 글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어하지 않을 거란 거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봤어야 했다. 아주 똑똑히. 그래서 내 동기가 무엇이고, 내 치부와 결점이 무엇인지, 내 안에 상처 받은 용이 무엇인지를 봤어야 했다. 그러고 보면 작가야 말로 수시로 정신분석을 받아야 하는 존재는 아닐까? 아니면 고백성사를 가장 많이 해야하는 존재는 아닐까?

이렇게 저자 장석주는 저 말을 통해 작가를 무섭게 응시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또 책 전반에 걸쳐 수시로 다른 말로 표현되어 있다. 오죽했으면 작가는 노출증 환자라고까지 했을까?

 그렇다면 그때 내가 선생님을 다시 찾아가 눈물이 찔끔거리도록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던 건 의미없는 짓이었을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솔직히 적지 않은 나이에 배움을 청한다는 건 적어도 나 같은 성격에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이렇게 쓰기도 어느 만큼의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쓰고 있으니까. 하지만 앞서 저자도 말하지 않는가? 자신의 치부, 결점, 상처,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 자신에게 치명적인 바로 그것을 쓰라고. 그래서 쓰는 것이다. 솔직히 그 일은 다리미로 데인 듯 상당히 오래 갔었다. 한 2년, 3년까지도 갔던 것 같다. 그리고 세월이 이렇게 흘러 이 책과 함께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선생님은 그 옛날 그런 말씀을 하셨다. 그 글 이후에도 또 쓰고 싶은지 자신의 욕구를 들여다 보라고. 그렇다. 나는 그렇게 다리미로 데인 듯 그 일이 충격적여 당시론 다시는 글을 못 쓸 것만 같았다. 그런데 2012년 나는 우연히 손양원 목사의 일대기를 읽다가 마음이 뜨거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내 전공인 대본을 쓰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어느 극단에 의해 대학로 무대에 올리기까지 했다. 그때 보았다. 나의 욕구는 항상 글을 쓰는 것에 머물러 있다는 걸.

한번 좋으면 또 한번은 나쁜 법일까? 그렇게 대학로에 내 작품을 올렸으니 비로소 작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고, 내 작품이 공연되어지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내 생애 최고의 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만 같았다. 정말 꿈만 같았다. 그리고 연이어 계속 새로운 작품으로 활동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의 행복은 딱 거기까지만이었다. 더 좋은 작품을 써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있다. 왜일까? 글쎄, 사실은 그 작품을 올리면서 그리고 올린 후에 인간의 부조리한 면을 보고야 말았다고나 할까? 뿐만 아니라 그 부조리에 항거하기까지 했다. 아마도 난 그렇게 한 죄로 그 다음 작품을 못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고 싶냐고.

솔직히 인간의 부조리한 면을 보면 너무도 역겹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기엔 작가 근성은 그렇지가 않다. 어떤 식으로든 이 역겨운 인간의 부조리함을 글로 쓰는 것에 진짜 작가 근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난 다음 차기작을 포기하거나 뒤로 미루는 한이 있어도 이 부조리함만큼은 글로 밝혀야겠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작가는 여기에 더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당장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글을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추고 싶은 치부를 들어내는 것. 

저자는 말한다. 한시도 글 쓰는 손을 멈추지 말라. 글을 쓰는 손을 멈추는 순간 글쓰기를 향해 흘러가던 에너지까지 멈출 수 있다.(80P) 

난 장석주의 글은 이 책이 처음이다. 그의 여러 많은 저서와 명성에 비하면 참 게으른 독자다. 어쨌든 읽고난 나의 느낌은 이분은 문학에 순정을 바친 분이구나 싶었다. 아니 더 나아가 문학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사람이겠구나 싶다. 문학 순교자. 그러면서 문득 문학 구도자라던 마루야마 겐지가 생각이 났다.   

글쓰기는 스타일이라던 저자의 문체는 상당히 쉽고 깔끔하면서도 동시에 싯적이고 사유적이다.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격려와 용기를 얻게 되었다. 저자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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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5-01-13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님을 한번 시험에 들게 하시느라, 그걸 딛고 일어서는 과정을 거치게 하시느라 선생님께서 그때 혹평을 하셨던건 아닐까요?

장석주의 다른 책을 떠올려볼때 이 책도 어떤 분위기일지 조금은 짐작이 가기도 해요. 더구나 Stella 님이 이 책을 읽어보고 싶게 리뷰를 쓰셨네요 ^^

stella.K 2015-01-14 13:29   좋아요 0 | URL
아이고, hnine님 이 어인 문안이십니까?
황송하여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너무 격조하였지요? 죄송합니다. ㅠ

그래요. h님께서 딱 바로 보신 것 같아요.
아마도 선생님은 그러셨을 겁니다.
그때 당시엔 어찌나 무안하던지. 내가 지금 나이가 몇인데...
뭐 그런 생각도 했더랬지요. 그런데 돌이켜 보면 야단 맞을 수 있는 것도
특권은 아닌가 해요. 나이들면 누가 야단쳐 주는 사람도 없잖아요.
선생님이 워낙 독특하신 것도 있지만 그분 입장에선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해주신 거죠. 조언도 많이 해 주셨는데.

제가 워낙에 글쓰기와 작가에 관한 책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초보자가 읽으면 감동을 많이 받을 것 같아요.
저는 장석주란 이름에 관심이 가서 읽은 건데 아, 이 분이 글을 이렇게 쓰는구나
좀 감동했고 글을 참 사랑하시는 분 같았어요.

참, hnine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나비종 2015-01-14 0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쓴다는 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인 것 같습니다. 앞모습이냐 옆모습이냐는 작가의 선택일테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 모습이 비춰지겠지요. `용기`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Stella.K님도 용기를 내셨기에 스스로 들여다본 조각을 보이셨겠죠? 화이팅!!입니다^^

stella.K 2015-01-14 14:40   좋아요 0 | URL
나비종님, 반갑습니다.
솔직히 제가 이런 류의 책을 만날 때마다 제가 글공부한 얘기를
종종 많이 했어요. 그래서 이번 리뷰는 좀 대충 써 볼 생각이었는데
막상 써 놓고 보니 너무 솔직하게 쓴 것 같아 부끄럽긴 하더군요.
하지만 저자의 저 긁은 글씨의 말에 넘어간 것 같아요.ㅠㅠ
예쁘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페크pek0501 2015-01-16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는 갖고 있지만 어떤한 글(예를 들면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글 따위)도
쓸 수 있는 용기는 없사와요. 향상시킬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거겠죠? ^^

stella.K 2015-01-16 13:22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을 읽으니 못 쓰는 글 보다 안 쓰는 글이 더 나쁜 거겠다 싶더군요.
물론 작가가 될 사람에겐 말이어요.
그래서 한 시도 글 쓰는 손을 멈추지 말라고 했나봐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