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시절 나는
꼭 한 번 선생님을 짝사랑한 적이 있다. 그것은 중학교 1학년 때 국어 선생님이었다.
아마 중학교도
초등학교처럼 남녀공학이었다면 내가 국어 선생님을 좋아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도 모를
일이다. 그때 나의 몸은 14살이었어도 생각은 그 보다 훨씬
앞섰으니 남녀공학을 다녔어도 또래 남자 아이들이 너무 어리다고 쳐다보지도 않았을지도.
어쨌거나 여학교였으니
이성의 선생님을 좋아했던 건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여간 해서 첫 눈에 반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국어 선생님은 거의 첫눈에 반하다시피 했다.
그렇다고 선생님이 아주 멋지고 잘 생겼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저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가 완성했다던 다비드 상을 닮았다고나 할까?
그러면 잘 생긴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글쎄 내가 동양 사람이어서 그런지 서양인의
기준에선 다비드 상이 아름답다고 할지 모르지만 난 한 번도 그게 감동하리만치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냥
아름답다고 얘기하니까 그런가 보다 할 뿐.
특히 파마를 했다고 보기엔 너무 천연덕스러운 고수머리가 다비드의
머리를 연상케 했고, 갸름한 턱 선도 어딘가 모르게 닮아 보였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검은 뿔 테 안경을 쓴 것이 지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다소 엉성해 보이기도 했는데 나는 그게 상당히 매력적이면서도 순수해 보였던
것이다.
국어 선생님을 좋아했으니 국어 성적이 나쁘지 않았던 건 당연했다. 하긴 뭐, 초등학교 1학년
때 ‘가’를 맞은 것만 제외하면 나는 어느 때고 국어 성적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국어
선생님이 좋았던 건, 공부하다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내가 눈에 띄면 달려와 물어보라고 했다. 그 말이 어찌 그리도 내 마음에 들어와 박혔는지 나는 선생님의 그런 순수한 면이 좋았고 마치 성당의 신부님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난 선생님
눈에 띄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지금 생각하면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을 수업 중에는 불쑥불쑥하곤 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건 점심시간을 공약했던 게 기억이 난다.
선생님께 무엇을 질문할 것인지는 며칠 아니 몇 주전부터 준비를
했고, 선생님을 어떻게 만나 질문을 할 건지 머리 속으로 시뮬이레션을 그려보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점심을 빨리 먹고 국어 선생님이 어디 계신지 찾았다. 마침 이층 복도 창문에서 아래를 살피고 있으려니 선생님은 학교 건물 현관에 계신 것이 발견이 됐다.
나는 혹시 입에서 반찬 냄새가 날까 봐 동그란 빨아 먹는 비타민
씨를 우물우물 급히 삼키고(그래도 입에서 반찬 냄새는 낫을 것이다. 그럴 땐 양치를
했던가 적어도 박하사탕 정도는 물어 줘야하는 건데), 선생님께 다가가 준비한 질문들을 쏟아 놓기 시작했다. 그것도 의자가
없어 계단 난간에 걸터앉아.
나는 무엇보다
질문을 핑계 삼아 선생님을 가까이서 느껴보고 싶었다. 국어 시간 먼 발치서 선생님을 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나 보다.
솔직히 그때 난 질문이 마치고 교실로 돌아가는데 약간 휘청거릴
뻔했다. 내가 지금 뭘 한 건가? 정말 국어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이러는 건가? 내가 아무리 국어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러기까지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내가 좀 놀라긴 했지만 그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난 얼마 안 있어서 국어 시험에서 내 생애 최고의 점수를
받았다. 그것도 선생님이 고읜지 아니면 하다 보니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까지 시험 중 가장
까다롭고 난해해서 한 반에 90점 넘는 아이가 한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내가 바로 그 손에 꼽을 아이들
중의 하나가 된 것이다. 그것도 문제 하나를 고치지만 않았어도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무슨 부화뇌동이었는지 마지막에 답을 고쳐 쓰는 바람에 아쉽게도 하나를 더 틀리긴 했지만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그러자
선생님은 자랑스러운 얼굴들을 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난 정작 부끄러워 얼굴도 들지 못했다.
그 무렵 나는 우연히 서점에 갔다 세계의 여러 유명 시인들의
시를 모아 놓은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그 중 영국의 시인 예이츠를
좋아했는데 그의 시 ‘하늘의 융단’이란 시를 읽고 있노라면
어쩌면 시어가 그처럼 영롱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외워버릴 정도였다.
하늘의 융단
금빛 은빛
하늘을 수 놓은 융단이
밤과 낮 어스름의 검푸른 융단이
내게 있다면
그대 발 밑에 갈아 드리련만
나 가난하여 꿈만 가졌기에
그대 발 밑에 깔았으니
사뿐히 밟으소서
내꿈 밟고 가시는 이여
하늘의
그대그렇게 읽기 시작한
시집이 몇 권 된다. 그리고 나도 이런 시를 써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습작 삼아 몇 편 써 보기도 했다. 그런데 2학기에 접어드니
국어 선생님은 교지(校紙)에 실을 글을 모집한다는 광고하고 다니셨다. 그러면서 원고를 반장에게 내든가 나에게 직접 내도 된 다고.
마침 써놓은
시도 있겠다 난 나의 시들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난 그 원고를 반장에게 낼 수도 있었지만 교무실로
들어가는 국어 선생님 뒤를 밟아 직접 드렸다. 원고는 가을 어느 날 냈던 것 같은데 교지는 2월 종업식에 맞춰 나눠준다고 하니 그 안에 내가 원고를 냈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거의 생각을 안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후에 일어났던 일들이 그것을 생각 못할 만큼 급박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불패의 화신 같았던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믿을만한 최 측근에게 권총을 맞았단다. 그건 정말 충격적이었다. 그 전날만해도 그런 징후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정말 울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그저 멍한 느낌이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가니 분위기가 먹구름이 낀 듯 침통했다. 몇몇 아이는 훌쩍훌쩍 울기도 했다. 이런 아이들 틈으로 꼭 그런 아이가 있다. 슬픔은 둘째치고 누가
울고 누가 울지 않는가 세고 있는 아이 말이다.
나는 침통은 한데 아직 눈물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도무지 뭐가 뭔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날씨는 왜 또 그리 우중충한
건지. 반에 들어서자마자 그 아이는 “너도 안 우는구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 말고도 울지 않는 아이가 있다는 말인데
난 그것을 헤아려 볼 사이도 없이 신경질적으로 “안 울긴 누가 안 울어!”했다.
그렇게 말하고나니 약간 미안한 생각이 들긴 했다. 그렇게 화 낼 생각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주워
남을 수도 없고, 일부러 심각한 척 고개를 푹 숙이고 내 자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 이후에 우리나라에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는 지면상 말하지 않겠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국어 선생님의 결혼 소식이 나에겐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소식 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그토록 사모했던 선생님인데 대통령이야 또 뽑으면 되는 것이지만, 국어 선생님은 누구와 바꿀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선생님은 내가 당신을 좋아한 것을 알았을까?
갑자기 선생님을
가까이서 느껴보겠다고 했던 나의 지난 날의 노력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창피하게 느껴졌고, 꽤 오랫동안
내가 그 선생님을 좋아했다는 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또 의외로 충격에 강한 뭔가가
있었던 것 같다. 순간 침착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분명 선생님의 결혼 소식은 슬프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내가 선생님을
좋아해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고백을 해 보겠는가? 설혹 그런다고 해서 선생님과 데이트를 해 보겠는가? 나이가 어려
결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좋아하면 뭘 꼭 바래야 하는 것인가? 내 마음 아주 잠깐이지만 선생님을 좋아했던 그것 자체만으로도 좋은 것 아니겠는가? 그거면 됐다고 나는 어느새 나 자신을 다독이고 있었다.
선생님은
자상하고 좋은 분이셨다. 어느 비 오는 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데 우산도 쓰지 못하고 가는 나를
불러 버스 정류장까지만이라도 같이 쓰고 가자고 나를 부르셨었다. 하지만 나는 한사코 괜찮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결국 선생님도 나를 포기하고 다른 아이와 함께 우산을 쓰고 빗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때 마음
한 켠에 후회가 이는 건 또 뭐란 말인가? 못 이기는 척 하고 선생님 우산 안으로 들어설 걸 그랬나? 하지만 그때 그러지 않기를 역시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날 선생님은
퇴근 시간도 아니었는데 비교적 일찍 교문을 나섰었다. 그런 걸 보면 결혼할 여자와 함께 살 집을 보러
갔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남의 남자가 될 걸 욕심 내 뭐 하겠는가?
난 그때
이후로 다시는 그 어떠한 선생님도 좋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어느덧
긴 겨울 방학도 끝나고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1학년의 마지막 날이 왔다. 그 동안 거의 잊고 지내다시피 한 교지가 드디어 나왔다. 상급 학교엘
진학하니 이런 것도 받아보고 어지간히 감격스럽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 글이 실렸을까? 기대 반, 설렘 반으로 교지를 펼쳐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앞으로
봐도 뒤로 봐도 내 글은 단 한 글자도 보이지 않았다. 난 그제서야 그 가을 날 교지에 대한 국어 선생님의
세부 공지사항이 생각났다. 즉 선생님은 원고를 낸다고 해서 다 실리는 것이 아니라고 했었다. 그런데 나는 선생님께 원고를 드리는 순간 그 말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설마 아버지도 감동해 눈물을 흘리셨다는 필력의 소유자의 글이 교지에 실리지 않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좀 씁쓸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실망하지는 않았다. 나는 장점인지 단점인지는 몰라도 포기가 빠르고 금방 잘 잊어버린다. 단
학교 교지의 수준이 생각 보다 높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때 교무실로 들어가시던 국어 선생님의 뒤를 밟아
일부러 직접 전달한 나의 모습이 새삼 창피해 죽을 건만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반장한테 낼 걸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국어 선생님 손에 직접 쥐어드릴 생각을 했던 걸까?
그나마 다행인 건 선생님은 이제 결혼을 했고, 2학년 땐 다른 선생님이 국어를 가르칠 것이니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교지 역시 다시는 건 응모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윌리엄 예이츠 [William Butler
Yeats] 아일랜드
시인 겸 극작가. 환상적이며 시적인《캐서린 백작부인》을 비롯하여 몇 편의 뛰어난 극작품을 발표했으며 1923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독자적 신화로써 자연(자아)의 세계와 자연 부정(예술)의 세계의 상극을 극복하려 노력했다.(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