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 읽기의 열기가 더욱 뜨겁다. 올여름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서점가에는 그리스 관련서들이 쏟아져나오고, 그리스 신화는 다양한 독법으로 새롭게 읽히고 있다.

왜 그리스 신화의 신과 영웅들은 끊임없이 시간의 저편에서 돌아와 우리의 상상력을 잔뜩 부풀게 할까. 신화적 상상력을 탐구해 온 시인-문학평론가 남진우씨의 분석에 귀를 기울여보자.


그리스 신화를 읽는 까닭은

독일계 감독 볼프강 페터슨이 연출한 헐리우드 영화 ‘트로이’는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를 바탕으로 했다. 너무도 유명한 고대의 문학적 정전을 현대 관객의 취향에 맞게 가공 변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원작의 재해석 및 훼손 여부가 논란거리로 자연히 떠오르게 되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영화 속 인물들이 당시 그리스인들의 신앙 대상에 대해 보이는 상이한 반응이다. 그리스군 총사령관격인 아가멤논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그리스 전사들이 인간세상을 주관하는 신적 존재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반면, 오직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와 몇몇 노령의 사제들만이 신에 의지하다가 비참하게 몰락하고 만다.



 

 

 

 

 

 

 

 

 

 

 

 

 

철저하게 권력의 논리에 입각해 현실을 헤쳐나가는 자들은 성공하는 반면, 이들 늙은 세대의 왕과 사제는 비록 품위는 있을지언정 실제 현실에선 쓰라린 대가를 받게 된다.

세계는 신의 놀이터이며 인간의 운명은 신들의 주사위 놀이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각은 이 영화에선 아득한 시절의 풍문일 뿐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 영화가 정작 신과 신화에 대해서 회의적인 탈신화적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일인지 모른다.

그리스 신화는 이제 더 이상 신앙의 대상이 아니며 인류가 지난날 한때 만들어낸 허구적 창안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 신화를 인류의 유년기에 잠시 통용된 미망의 산물 정도로 치부하고 말 수는 없다.

현대가 표방하는 세계의 탈마법화라는 구호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강력한 신화의 힘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러저러한 신화의 지배 아래 있다. 그중엔 낡고 오래된 신화도 있고 탄생한 지 얼마 안 된 새로운 신화도 있다. 이런 다종다양한 신화 가운데 역시 가장 질긴 생명력과 광범위한 영향력을 과시하는 신화는 고대 그리스 신화다.

그리스 신화의 흔적

그리스 신화는 종교와 분리됨으로 해서 오히려 그후 인류 역사에 지속적이고도 뚜렷한 힘을 행사해왔다. 중세 말기 르네상스 시절만이 아니라 현대에 들어선 이후에도 문학 철학 인류학 정신분석학 사회학 등 여러 분야에서 그리스 신화는 계속 탕진될 줄 모르는 해석과 논쟁의 진원지 역할을 차지해왔다.

오이디푸스 없는 정신분석학을 상상할 수 없듯이 메두사를 둘러싼 다양한 담론들은 페미니즘 이론의 발전을 이끌어왔다. 니체 철학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에 대한 해석에서 출발했고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은 늘 다이달로스와 이카루스 신화를 맴도는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도르노나 호르크하이머 같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거장은 계몽이성의 독재를 비판하기 위해 오디세우스의 편력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단지 서구문화의 기원에 고대 그리스가 자리하고 있다는 통념의 새삼스러운 확인에 그치는 문제는 아니다. 또한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연대기나 영웅들의 계보에 대한 지식이 그 자체로 쓸모 있다는 것도 아니다.

한 신화학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화는 삶의 무수한 다양성을 보여주기 위해 심오한 감수성을 보여주며 역사와 신성의 밀접한 관계를 알게 해준다. 신화 속의 신들은 인간세계에서 원초적 의미를 갖고 있는 총체적 경험의 형상화를 나타낸다. 인간은 신화를 통해 삶의 뿌리를 찾으며 고립된 개체를 넘어선 집단적 정체성을 부여받기에 이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오늘날 과거의 신화를 뒤적이는 것은 허황한 전설에 대한 탐닉이나 현실적 유효성을 상실한 박물지적 지식에 대한 호사 취미의 소산이 아니라 현실을 바로 보고 읽고 해석하고 비판하기 위해 늘 대조하고 참고하지 않으면 안 될 전거의 확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화 속의 분쟁과 사랑, 변신과 기적은 바로 우리 주변에 펼쳐지고 있는 정치적 도덕적 군사적 시장경제적 상황의 음화(陰畵)로서 존재한다. 신화 ‘속’에 살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뇌성과 더불어 번쩍이는 번갯불에서 제우스를 보았고, 곡식이 물결치는 들판에서 데메테르를 보았고 기다리던 봄의 도래에서 페르세포네의 귀환을 보았다.

마찬가지로 신화 ‘밖’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기회주의적 정치인의 식언에서 제우스의 몰락을 보고 텔레비전 화면을 어지럽히는 여배우의 관능적인 몸매에서 아프로디테의 유혹을 감지하며 중동의 사막에 쏟아지는 폭탄 속에서 자제력을 상실한 아레스의 질주를 떠올린다. 신화는 인간 역사를 재조명하고 반대로 인간 역사는 시간의 흐름 속에 침전되어 신화가 된다.

신화는 비판적으로 읽어야

가부장제적 도시국가였던 아테네가 왜 하필이면 여신 아테나를 후원자로 삼았을까. 어떤 신화학자는 여신의 처녀성에서 도시의 지속적인 방어에 대한 은유를 발견한다. 그녀의 처녀성은 적을 막아내는 성벽이라는 것이다. 머리카락이 뱀으로 뒤덮인 여성 괴물 메두사를 보는 순간 남성이 돌로 변한다는 것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프로이트는 소년이 여성의 성기를 처음 보았을 때 느끼는 ‘거세 공포’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돌처럼 굳어졌다는 표현을 발기의 은유로 해석하지 말란 법도 없다. 따라서 포르노그래피를 응시하고 있는 남성 관객은 무의식적으로 거세와 발기라는 극과 극의 경험을 동시에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크레타문명에서 미케네문명으로 이어지던 시절 고대 그리스인들은 찬란한 신화적 황금기를 구가했다.

건조한 기후와 척박한 토질 때문에 올리브나 포도 외에는 별다른 작물이 자라지 못했고 그래서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 그리고 그것을 담는 도자기가 주요 수출품이 된 이 해양국가의 구성원들은 지중해의 여러 연안을 돌며 원시적 사나움과 풍부한 관능성, 발랄한 상상력과 유머가 담긴 신화를 전파했다.


▲ 남진우·시인-문학평론가·서울예술대 교수

이 위대한 신화 서사에서 서구 문화가 시작되었고 그것은 오늘날 동아시아 끄트머리에 위치한 우리에게도 정신적 형성물의 일부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집단적 자기만족이 창궐하는 시대에 신화적 인식은 우리에게 근원적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당파적 주장이 정치적 진실을 독점하고 나설 때 신화적 사유는 우리에게 진실의 복수성에 눈뜨게 해준다. 특정 신화에 대한 무비판적 맹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신화는 거듭 비판적으로 다시 읽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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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04-07-11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스 로마 신화가 가지고 있는 남성우월주의와 가부장적 성격을 찾아내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이아손의 아내였던 메데이아는 이아손이 불러온 비극마저 자신이 온전히 다 뒤집어 쓴 채 악녀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으며, 아가멤논의 아내이자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의 어머니인 클리타임네스트라의 경우도 철저히 악녀라고 손가락질 받죠.. 사실은 모든 것의 원인은 남성들에게 있었는데 말이죠~ 트로이 전쟁도 헬레네에게 원인을 전가시켜 버리기도 하구요, 사실은 자신들의 야심과 자존심 때문에 일어난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stella.K 2004-07-12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꼬마요정님, 대단한 통찰이시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