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 느낌 있다
하정우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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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가끔 물건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다. 뭔가 하나에 반짝이는 재주를 보이면 "핫, 요것 물건인데...!" 한다. 그렇게 말하는 건, 그만큼 가능성 있어 보인다는 뜻이고, 느낌이 좋다는 말도 될 것이다.   

하정우의 나이를 보거나, 영화 경력으로 보거나, 그를 두고 이렇게 말하는 건 이제 그에 대한 예의는 아닌 성 싶다. 그는 이미 <추격자>를 비롯해 몇몇 작품에서 확실한 그의 존재감을 각인시켜 주고 있다. 솔직히 <추격자>를 유쾌한 마음으로 봐 주기란 힘이 든다. 배우가 왕자 같은 역만 맡으려 해서도 안되겠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가 지영민 같은 역을 맡는다는 건 솔직히 보는 입장에선 내키지는 않는다. 영화 '추격자'를 볼 즈음, 나는 하정우에 대해 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멋진 하루>나 <국가대표>에서의 그를 보는 건 얼마나 즐겁고, 유쾌했던? 그런데 <추격자>에서 걸렸다. 왜 하필 이런 역을...? 희대의 살인마라는 점에서 나쁘기도 하지만, 힘들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은 전혀 관심도, 흥미도 없어졌지만 한때 시나리오를 (잠깐) 공부하고, 아직도 그 망령을 떨쳐버리지 못했나 보다. 유명 연예인이 책을 썼다고 해서 무조건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데, 하정우가 책을 썼다고 하니 관심이 갔다. 이 사람이라면 뭔가 할 얘기가 있을 것 같고, 곱씹어 들을만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한마디로 이런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하정우에 대해 알려면 꼭 그의 그림을 알아야 한다.  그의 미술에 대한 관심은 선배인 고현정에 의해 시작이 되었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추격자>를 찍을 때부터였다고 한다. 하루 종일 연쇄살인범 지영민을 연기하다 보면 마음이 맑아지지 않았고, 쉽게 쉴 수가 없었다고 한다. 쉬기 위해 억지로 잠을 청하는 대신 그림을 그리자고 했고, 그것은 의외로 효과가 좋아 그때부터 쉬는 때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럴까? 이 책엔 그가 그림 그림 60점이 소개되어 있으며, 그가 좋아하는 화가에 대한 해설이 들어있다. 나 개인적으론 그의 화풍을 딱히 좋다고는 말할 수는 없는데, 보면 상당히 공들여서 열심히 그린 흔적을 느낄 수가 있고,  그 실력이 웬만한 화가 못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김흥수 화백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놀라운 건 이 모든 것이  독학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그는 직업란에도 당당히 화가라고 쓴다고 한다(물론 직업란에 화가라고 쓰게 된 배경이 좀 특이하긴 하지만).  

하정우의 문체는 소탈하고, 진솔하고,  조근조근하다. 그리고 그것은 의외로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다. 그리고 때론 뭔가의 카리스마가 느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척'하지 않고, 긍정적인 그의 인생관이 매력적이다. 집안이 기울지만 않았어도, 그는 미국 연수를 무사히 마쳤을 것이고, 좀 더 기량이 뛰어난 배우가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갔던 길을 다시 돌아와야 했을 때, 그는 언젠가 다시 가게될 거라고 열심히 꿈을 꿨고, 마침내 그꿈을 이뤘다. 그리고 지금의 여려움이 자신의 연기 인생에 자양분이 될 거라고 믿었다고 했다. 그런 긍정적인 인생관이 있었기에 그는 오늘도 찬찬히 벽돌을 쌓아가듯 자신의 인생의 집을 짓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연기관이나 연애관도 참 확고하고 남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보면 그의 시나리오를 볼 수가 있는데, 웬만한 수험생 참고서를 방불케 한다. 어쩌면 그리도 밑줄이 많이 거져있으며, 메모가 빽빽히 들어 차 있는 것인지. 그의 연기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란 걸 알 수가 있다. 그러면서 배우가 무슨 무당이냐고 반문한다. 빙의가 되고, 필을 받게......(AN ACTOR 01에 나온 말이다)라고 반문한다.  그의 연기는 오로지 공부-연습-조율을 거쳐 철저히 계산된 연기고, 철학이라고 한다. 그러니 그 말이 얼마나 똥폼 잡고 하는 거짓말인지 알 것 같기도 하다.    

특히, 사랑을 용기가 없어 하지 못하거나, 너무 계산된 만남만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AN ACTOR 08(206P~ )을 읽어봐 주면 좋겠다. "사랑해."라고 조근거리며 하는 말 속에, 얼마나 많은 거짓이 숨어 있는지, 그 말속엔 얼마나 많은 모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인지, 그렇게 오가닉 라이프를 부르짖으면서 왜 사랑은 오가닉하지 못한 것인지, 무릎을 칠만큼 구구절절 옳은 말을 하고 있다. "내 손가락이 저 사람의 손가락에 살짝 닿았으면 좋겠다."라고 한 그의 말이 좋다.  

또 때론, 그가 친구에 대해, 우정에 대해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가 느껴진다. 친하게 지냈던 친구나 지인도 어느 때가 되면 멀어진다. 내가 그들을 멀리하는 건지, 그들이 나를 멀리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럴 때 변함없이 부를 수 있고, 추억을 서슴없이 떠올릴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얼마나 복된 일인가? 그래서 하정우가 부럽기도 하다. 

그밖에도 그가 좋아하는 음악, 좋아하는 배우, 거듭해서 보게 만드는 영화, 그의 하루가 마치 라디오 DJ가 조근대며 말하는 것처럼 씌여져 있다. 확실히 내가 기존에 봐왔던 에세이와는 좀 다른 느낌이다. 뭐랄까? 모던하고, 심풀한 느낌이다. 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편집도 마음에 든다.  

나는 가끔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보면, 그를 지켜볼 수 있는 관객이나 시청자에게는 굉장한 선물이라는 생각을 이즈음 해 보게 된다. 사람만큼 탁월한 예술품은 없다고 했는데, 자신을 고도로 훈련시킨 예술품을 보는 건데 어찌 최고의 선물이라 말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 배우가 참 믿음직스럽다. 그의 행보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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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05-30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원래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 아니란 거지요? 우와 추격자 찍을 때부터 그림을 그린 것이라니 정말 대단나네요

stella.K 2011-05-30 11:52   좋아요 0 | URL
참 열심히 사는 사람 같아서 보기가 좋아요.
하늘바람님도 기회되시면 읽어 보세요.
후회 안하실 거예요.^^

cyrus 2011-05-30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남자,, 같은 남자로써 잘 멋지다고 생각하면서 은근히 질투심을 유발하는,, ㅎㅎ;;

stella.K 2011-05-30 11:53   좋아요 0 | URL
ㅎㅎ 그래도 하정우 최근에 수염을 길러서
지저분하고, 영감같아졌어요.
그게 아니면 진짜 훈남인데...ㅋㅋ
시루스님도 훈남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