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 받아들이려던 이슬람 화가를 누가 죽였나

 이난아 옮김/ 민음사/ 전2권


 
 
이슬람 문화의 꽃인 세밀화를 통해 동·서양 문화의 충돌과 진정한 예술의 독창성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소설이다. 이야기는 1591년, 눈 내리는 이스탄불의 외곽 우물 바닥에 죽어 누워 있는 시체의 하소연으로 시작된다.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현대 터키문학의 대표 작가 중 하나인 오르한 파묵의 이 소설은 세밀화가 엘레강스를 살해한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을 역사 추리 형식으로 구성했다. 그는 술탄(회교국의 군주)의 밀서(密書)를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술탄의 밀서 제작 책임자인 에니시테는 수년 전 베네치아의 궁정에서 보았던 초상화의 매력에 푹 빠져, 유럽의 화풍을 도입한 삽화 책을 만들자고 술탄에게 건의한다. 술탄의 세계를 서양화풍으로 그린 책을 비밀리에 만들라는 명을 받은 에니시테는 궁정화원에서 가장 기예가 뛰어난 장인들을 선발해 작업에 착수한다. 이 과정에서 화가들은 에니시테를 통해 서양 미술의 충격을 받게 되고, 이것은 그들 사이의 불안과 갈등을 일으킨다.


▲ 현대 터키문화의 대표작가 오르한 파묵.

이런 측면에서 이 작품은 시대적 격변기에 갈등하고 고민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예술가 소설로 읽힌다. 갈등구조는 옛 이슬람 회화의 전통에 서양의 새 미술사조가 도전장을 들이미는 형국이다. 비록 16세기를 배경으로 했지만, 구세대·신세대 갈등이나 동?서양 대비를 통해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자리한 터키의 독특한 정체성을 탐구 하고자 하는 작가의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르게 그림을 그리는 게 곧 다르게 본다는 것을 뜻할까?”(58쪽) 서양의 화가들이 원근법을 사용하고 사실적으로 대상을 재현해 인간 중심의 세계를 추구하는 반면, 이슬람의 전통화가들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대상을 평면적이고 투시적으로 묘사해 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한다. 이 충돌은 급기야 엘레강스와 에니시테의 연쇄 살인사건으로 이어진다.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러브스토리가 끼어든다.

절세 미인 셰큐레를 어릴 적부터 사랑해 온 카라, 그녀를 향한 맹목적인 연정을 버리지 않는 시동생 하산, 그리고 자신의 딸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늘 곁에 두고 싶어하는 아버지 에니시테 사이의 미묘한 심리전이 불꽃을 튀긴다. 능수능란한 이야기꾼인 작가는 세 남자의 운명을 바꿔놓은 매혹적인 여인 셰큐레를 통해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심리와 행동방식을 정교하게 보여주고 있다.


▲ 이슬람 문학의 대표적인 러브스토리인 '휘스레브와 쉬린'을 모티브로 그린 세밀화. 이 장면은 목욕하는 쉬린을 몰래 훔쳐보는 휘스레브를 묘사하고 있다.

소설은 각 등장인물이 번갈아가며 화자(話者)로 등장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심지어 살해당한 시체, 그림 속 개와 나무, 빨강(색), 악마, 금화까지 말을 한다. 서로 다른 목소리를 차곡차곡 쌓아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를 완성하는 식이다. 이러한 서사기법은 각각의 인물이나 사물이 처한 정황과 생각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이해하면서 범인은 누구인가에 대한 지적 추리를 유도한다.

어릴 적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오르한 파묵은 일찍부터 오스만 제국 당시에 제작된 세밀화 들을 모사하며 미술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소설에는 슐레이만 대제 시대의 궁정화원장으로‘축 제의 서’를 제작한 오스만, 이슬람 세밀화의 대가인 비흐자드, 이슬람 세밀화의 중요 화파 가운데 하나인 헤라트파의 생성과 소멸과정이 재현된다.

여기에 페르시아 문학의 최대 러브스토리‘휘스레브와 쉬린’을 비롯, ‘레일라와 메즈눈’‘유수프와 줄라이하’등 전설과 민담, 루미·자미·로크만 등 대표적 시인과 역사가들의 작품도 등장시켜 16세기 말 이스탄불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최홍렬기자 hrchoi@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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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o 2004-04-27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어보고 싶은데 어덜지...서평들 많이 올라오면 보고 살려구요. ㅋㅋ

stella.K 2004-04-27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왠지 땡겨요. 서양 예술에 비해 이슬람 예술은 정말 잘 모르고 있잖아요. 더구너 터키 작가라...어, 근데 제가 강릉댁님을 설득하고 있는 것 같군요. ㅎㅎ!

waho 2004-04-29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 책 지금 확 사버릴까 아님 기다렸다 서평 보구 살까하다 서평 올라오는 거 보구 살려구요.ㅎㅎㅎ 요즘 책 값이 너무 많이 나가서 울 남편에게 미안해서리...신중 구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