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슨 피어슨 소설 '여자만세' (전2권)
김민희 옮김/ 화니북스/ 각권 271쪽, 287쪽


▲ 앨리슨 피어슨 소설 '여자만세'
이 소설은 영국 런던에서 펀드 매니저로 일하는 서른다섯 살 여인 케이트의 얘기다. 자상하지만 보수적인 남편 리처드는 건축회사의 직원이고, 둘 사이에는 여섯 살 딸과 한 살배기 아들이 있다.

케이트는 해외출장에서 돌아온 날 새벽 1시37분 부엌에서 민스파이(다진 고기나 과일을 속에 넣고 만드는 파이)를 열심히 밀고 있다. 세인스베리 상표가 찍혀 있는 화려한 포장지를 벗기고 알루미늄 컵에 든 파이를 꺼내 집에서 만든 음식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다. 딸의 유치원에서 크리스마스 학예회 후에 벌어질 파티를 위해서다.

‘옛날 여자들은 민스파이를 만들 시간이 있었지만 오르가슴을 위장해야 했다. 요즘 여자들은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게 되었지만 민스파이를 위장해야 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발전이라 부른다.’(본문 중)

이때 끼어든 남편의 말은 위로와 비아냥의 중간쯤에 있다. “천천히 해, 여보. 당신 꼭 놀이동산에 있는 게임기구 같아. 뭐지, 그거? 왜 계속해서 빙빙 도는 거 있잖아. 사람들이 벽에 딱 달라붙어서 비명 지르는 거.”


▲ 저자 피어슨은 속시원한 풍자와 비유를 경쾌한 리듬에 실어 직장과 가정 양쪽에서 고달프게 치여사는 '이중간첩'들을 위로한다.

케이트는 딸이 태어난 지난 5년 동안 항상 수면부족에 시달리면서 ‘마치 납으로 된 옷을 입고서 끊임없이 행진하듯’그렇게 살아왔다. 사방이 적이다. 자신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남자 후배, 며느리의 직장생활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시댁 식구들, 딸에게 돈 달라고 손을 벌리는 몽상가인 친정 아버지, 한 푼이라도 더 뜯어가려고 온갖 술수를 부리는 보모, 그리고 자신에게 적대적인 머피아(엄마와 마피아를 합성한 말로서 막강한 전업주부들의 공동체)들이 있다.

2004년 오늘에도 전 세계 대도시의 직장여성들은 남성 우월주의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신대륙에 뛰어내린 외방인이다. 신분은 이민 1세대를 닮았다. 고개를 숙인 채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노력해야만 ‘언젠가 우리네 일자리를 차지해버릴지도 모른다’고 경멸하는 무식한 본토인들의 조롱을 견뎌낼 수 있다.

그 여성은 늘 피고로 법정에 소환당한다. 팔이 12개쯤 달려 있어도 모자랄 정도로 정신없이 살아가는데도 직장에서건 가정에서건 문제가 터지면 ‘그녀 탓’이다. 이 소설은 전 사회가 배심원처럼 다리를 꼬고 앉아 어디 한번 그녀의 변명(사실은 비명)을 들어 보자는 듯이 공격적인 표정을 하고 있는 세태를 고발한다. 아니 여성을 피고로 불러 세우는 ‘모성법정’ 자체를 고발한다.

케이트는 파이 만드는 일을 끝낸 후 천천히 이를 닦는다. 어금니 하나마다 스물까지 센다. 욕실에 너무 오래 머무르면 그동안 남편은 잠이 들 것이고 그러면 섹스를 하지 않아도 된다. 섹스를 하지 않으면 내일 아침 샤워를 하지 않아도 된다. 샤워를 하지 않으면 자리를 비운 사이 쌓여 있을 이메일들을 확인할 시간이 생길 것이고, 어쩌면 출근하는 길에 선물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저자는 직장 여성 쪽에 서 있는 변호인쯤 되지만, 그러나 이 변호사는 전업 주부들의 증언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주부로서의 삶은 고속도로를 걸어가는 것과 같아서, 길을 따라서 끊임없이 걸어가는데도 돌아보면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 소설의 재미는 촌철살인의 비유, 우스꽝스럽게 뒤틀린 다양한 인물들 묘사, 연극적인 상황의 경쾌한 리듬감, 영화·TV드라마·고전소설·팝송 등에 대한 풍부한 인용에 있다. 게다가 현대적 일상의 삶을 파고드는 철학적 통찰이란 가히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잘 생긴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원숙해지기보다는 시들어 간다’든지, ‘새벽 출근을 서둘러야 하는 엄마에게 아이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할 때 밀려드는 좌절감은 술집에 들어갈 수 없는 알코올 중독자가 느끼는 절망감만큼이나 깊다’든지 하는….

그 직장 여성들은 이중 간첩이다. 경제전문지 칼럼을 읽는 척하지만 딸과 낱말 맞히기를 하고 있고, 중요 프레젠테이션을 앞두고 고객과 전화를 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보모와 통화 중이다. 그녀에게 휴가는 ‘헬리데이’(휴일을 뜻하는 holiday와 지옥을 뜻하는 hell의 합성어)일 뿐이다. 이 소설은 그 이중 간첩들에게 보내는 위로 전문이다.

저자(Alison Pearson)는 이브닝 스탠더드 신문의 칼럼니스트이며, 소설의 실제 상황과 비슷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원제는 ‘I don’t know how she does it’이다.

(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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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4-24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코 읽고 싶지 않네요. 자신의 악몽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듯. -.-;;

stella.K 2004-04-24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전 괜찮을 것 같은데. 전 결혼을 안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waho 2004-04-29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 책은 누가 빌려 주면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