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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존심 - 이것이 제자의 삶이다 4 ㅣ 신 옥한흠 다락방 4
옥한흠 지음 / 국제제자훈련원(DMI.디엠출판유통) / 2001년 6월
평점 :
내가 저자를 알게된 것은 20년쯤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은 10년쯤 후에 샀던 것 같다. 하지만 난 당시 이 책을 사 놓고도 결국 완독을 하지 못했다. 사실 이 책은 설교집으로서 그때나 지금이나 난 설교집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알겠지만 '설교'라는 게 너무 옳은 말을 해서 듣기에 거북한 것이 아니던가? 아니, 들을 수는 있다. 하지만 실천이 없기에 차라리 안 듣기를 바라는 것이 설교다. 이렇게 설교는 이래저래 듣기가 편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것을 읽기까지 하는 건 얼마나 고역이랴? 더구나 그 무렵 나는 한창 혈기가 왕성한 때라 이런 옳은 말을 마냥 간절하게 좋아했던 것도 아니다. 그러기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너무 많았고, 동시에 나는 교회를 다녔지만 교회를 비판했다. 이를테면 설교는 저렇게 좋은데 왜 기독교는 이 모양인가? 하며. 그러면서 이 책을 사 볼 생각을 했던 건 왜였을까? 그것은 단연 책의 제목이 끌려서였을 것이다. 교인이 교인답지 못한 건 결국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의 자존심내지는 자긍심이 없어서일테니 과연 저자는 이것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저자는 우리나라에 내로라는 명설교가다. 그래도 결국 못 읽었다.
그런데 지난 9월, 이 명설교가가 타계했다. 내가 그를 안지 20년만의 일이고, 지금은 그때만큼 혈기가 왕성한 것도 아니며,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지도 않다. 그 시절엔 칼끝처럼 교회를 비판하며 다녔는데, 지금은 그 칼끝이 많이 무뎌졌다. 비판이 없어졌다는 것이 좋은 일인지, 아니면 나쁜 일인지 모르겠다. 비판이 없어졌다고 그만큼 내 신앙이 깊어졌기 때문이라고 속단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포기할 거 포기하고, 눈감을 거 있으면 눈감고, 귀 막을 거 있으면 귀 막고 그렇게 무뎌진 것 같다. 결국 교회의 기존 질서에 편입된 느낌이랄까? 더구나 모순이긴 한데, 지금 난 교회 봉사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 교회 봉사를 하지 않으니 그렇게 무뎌지는 것이다. 처음엔 이것이 좋았다. 교회를 다니면서 교회를 비판해야 한다는 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를 떠나지도 못하는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색인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돌이켜 보건데 비판 의식이 없어진다는 건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것은 그만큼 더 좋아질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좋은 것이 좋은 것으로 남는 상태.
옥한흠 목사가 타계를 하고 나니 많은 점에서 아쉬웠다. 이 꼬장꼬장한 어르신께서 마냥 좋아서 교회를 세우고, 강단을 지키셨을까? 물론 사랑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했기에 오늘 날 기독교회를 비판하는 세력으로부터 최선봉에서 칼과 화살을 맞았으리라. 내가 조금만 더 생각이 깊었더라면 그분이 맞은 화살을 막아내지는 못해도 같이 동참하는 마음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는 그다지 부드럽지가 못했다. 난 늘, 저 분이 뭔가 심오하고 깊이 있는 설교를 하고 있는 것마는 사실인데 그것이 가슴까지 내려가 꽂히지 못했다. 알면 동참할 수가 있는데 모르면 여전히 비판만 할 뿐이다. 당신은 왜 그리 어렵냐며.
모름지기 설교든, 강의든 쉽게 흡수되어 빠져나가고 잊혀지기 보다, 거칠지만 오래도록 남아서 갈고, 음미하게 만드는 것이 좋다. 옥한흠 목사는 마치 서당의 훈장 선생님 같다. 얼마나 단아하고 올곧은지. 알겠지만 서당에서 배우는 것들은 그렇게 재미있고, 즐거운 것들마는 아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끊임없이 반복해서 들으면 어느 순간 깨닫게 시작하는 것처럼, 그분의 설교는 그런 것이었다. 한마디로 훈장 선생님 같은 설교를 그는 매번 핏발을 세우고 탑을 쌓는 마음으로 쌓아 올렸던 것이다.
그분은 교인이 교인답지 못한 것을 늘 못 견뎌하셨다. 그는 교회에선 왕자 같이 행동하면서, 세상에서는 걸인처럼 행세하는 그리스도인을 부끄러워하셨다. 그래서 이 책은 바로 어떻게 하면 교인들이 교회안에서나 밖에서나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 수 있을까에 대한 핏발선 외침을 담고 있다.
그분은 쉽게 다가가기엔 어딘지 모르게 어렵다. 그야말로 옛날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는데 그분이야말로 그림자도 밟지 말아야 할 것만 같은 권위가 느껴진다. 우린 흔히 윗사람이라면 다가가기 편하고 부드럽고 친근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미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항상 입안에 옥구슬 같이 청산유수로 격려와 위로만 해 주길 바란다. 하지만 옥한흠 목사님은 항상 그러지마는 않으셨다. 설혹 그렇게 푸근하고 좋은 인상만 주는 사람이고 싶어도 그분의 인상이 그것을 받혀주지 못했다. 그러리만치 그분은 근본적인 실체와 진실에 벗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똑바로 응시하고 말씀하시기를 좋아하셨다.
그분의 설교는 왜 그리 딱딱하냐고, 거칠고, 아프냐고 속으로 투정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분의 진실이 담긴 설교가 진심으로 좋아졌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아쉽게도 그분이 조기 은퇴를 하시고 말년에 특별한 설교를 하셨을 때다. 난 그때야 그분의 설교가 뇌리에 박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때야 비로소 그분 설교의 진가를 알았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 젊은 날 그분의 설교가 어려웠던 것이 정말 이해가 갔다. 입에 달고, 듣기 좋은 말은 오래 기억되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입에 쓰고 귀에 거슬리는 말은 오래 가는 법이다. 그렇게 입에 쓴 말을 해 줄 사람이 주위에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설혹 있다고 해도 애석하게도 그분들은 살아생전엔 인정을 받지 못하며 죽어서야 비로소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다(가까이는 우리네 부모가 그럴 것이다.). 적어도 내겐 옥한흠 목사님은 그런 분이셨다. 그분의 핏발선 목소리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