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몇 달 전부터 타블로의 학력 허위 논란이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뭐.. 난 특별히 연예계 뉴스에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니고,
당연히 처음부터 이 문제를 쭉 관심을 갖고 본 것도 아니기에
내가 뒤늦게 이 문제를 두고 왈가왈부 할 게제는 아니다.
그런데 가끔 이와 관련된 뉴스들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문제의 내용은 이런 거다.
타블로라는 대중가수가 있었다.
왜 그런 의심을 갖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군가 스탠퍼드라는 미국 서부의 꽤나 이름 있는 대학을
그가 졸업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심을 제기한다.
‘그럴 리가 없다’는 의심의 시작.
몇 차례의 논란을 거친 끝에
‘증거를 밝히라’는 요구가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타블로 쪽에서는 그 대학을 졸업했다는 내용의 문서를 제시했고,
학교 교수의 증언도 나왔다.
이쯤 됐으면 논란이 잦아드나 싶었는데,
여전히 ‘그런 문서들도 조작되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중간에 정확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밖에 있는 내 시각으로 보면 이 문제의 본질은
‘당신이 당신이라는 것을 증명하라’는 요구다.
그리고 이 문제의 밑바탕에는 ‘증거주의’라는 사조가 전제되어 있다.
이것은 모든 것은 확실한 증거를 통해서만 믿을 수 있다는,
꽤나 독선적인 주장이다.
언뜻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것이
뭐가 어렵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번 논란을 통해 보면 알 수 있듯 이는 결코 쉽지 않은 문제다.
도대체 내가 나라는 것을 뭘로 증명한다는 말인가?
아무리 공신력이 있는 기관의 증명서를 받아 와도
조작이 아니냐는 의문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고,
또 조작된 문서가 아니라고 해도
그 문서가 증명하는 사람이 ‘나’인 것을 다시 증명해야 한다.
(이는 이번 논란에서도 실제로 등장했던 일이다)
다른 사람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금방 증언한 그 사람의 권위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를 물을 수 있고
이제는 증언을 한 사람이 진짜라는 증거를 찾아 헤매야 한다.
뭐가 문제일까?
처음부터 한 인격적인 존재를 비인격적인 증거로
증명해내라는 요구부터가 무리였다.
물론 어떤 사람의 자격과 경력에 대해
합리적인 증거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증거주의에 너무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오늘 만난 그, 혹은 그녀가
어제 만난 그 사람과 동일인이라는 합리적인 증거를
애써 찾아가며 데이트를 하지는 않는다.
또, 오늘 아침 나를 깨워 식사를 준비해주시는 아주머니가
정말로 내 어머니인지를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분석하지 않는다.
그냥 그녀는 내 애인이고, 그 아주머니는 어머니이다.
하지만 ‘증거주의’는 앞서 말한 것처럼
모든 것에 증거가 있어야만 믿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철학적 논의에서는 무한한 회의(懷疑)가 가능할지 모르나
실제 생활에서는 어느 정도의 회의를 넘어서는 것은 낭비일 뿐이다.
특히나 인격적인 대상을 증명해 내라는 요구가 그렇다.
물의 분자구조가 H2O라는 것은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진짜 이 사람인지는
그렇게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에서 ‘직관’이라는 요소에 많이 의지한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빨간색을 보면 위험하다고 여기고
또, 처음 보는 모양의 자동차라고 하더라도 몸을 피한다.
그 때마다 이 빠르게 달리는 물체를 피해야 하는
합리적인 이유를 찾는다면 오래 살기 힘들다.
특히나 인격적인 대상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더욱 직관의 영향을 받게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직관에 의지한 판단과 결정을 하는 사람을 향해
어리석다거나, 뒤떨어진 사람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여기서 조금 도약해 보면,
고래(古來)로 많은 사람들이 시도하고 있는
신 존재 증명, 혹은 신 부존재 증명도 같은 논리로 접근할 수 있다.
신 존재에 대한 철학적이고 사유적인 증명을 시도했던
고대의 변증가들은 제쳐 두고 보면,
오늘날 행해지고 있는 ‘증명’은 대개 자연과학적 전제에서 시작된다.
신의 존재를 과학적 근거로 증명해내거나, 부정하려는 것.
하지만 이는 타블로가 ‘다니엘 선웅 리’(그의 미국식 이름)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해내거나 부정하려는 시도와 비슷하다.
그러나 이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그를 ‘아는(경험한) 사람’은 직관적으로 이를 믿을 수 있겠지만,
그를 ‘모르는 사람’은 (그리고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무슨 설명을 해도 그를 믿지 못할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그를 잘 아느냐’의 여부고,
이는 직관의 영역이며,
직관은 경험의 축적을 통해 형성된다.
신에 대한 존재 증명도 마찬가지다.
‘그를 아는(경험한) 사람’은 너무나 쉽게 이를 확인할 수 있지만,
경험해 보지도, 알지도 못한 사람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법이다.
모든 주요 종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신은 ‘인격적’인 존재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인격적 존재는 직관과 경험으로 ‘증명 된다’.
자기들도 평소에 다른 인격적 대상들과 관계를 맺을 때에는
과학적 증명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유독 신이라는 인격적 대상을 향해서는 현미경을 들이대는 것은
적어도 공평한 처사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