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 - 폴란드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타데우쉬 보로프스키 외 지음, 정병권.최성은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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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문학책은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많이 쏟아져 나와도 아직도 듣도 보도 못한 작가에 쉽게 접해 보지 못한 제3 세계 문학은 또 얼마나 많은가 싶다. 그중에서도 폴란드는 또 얼마나 낮선 나라의 문학일까? 폴란드란 나라는 알아도 그 나라의 문학을 접하기는 그다지 쉽지는 않았다. 이것이 내가 이번에 '창비'에서 새로나온 '세계문학' 중 제일 첫번째로 폴란드편을 고르게 만든 주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표지의 그림도 멋지지 않은가!  

늙어간다는 건 무엇인가를 생각나게 만드는 <등대지기> 

그나마  <쿼바디스>는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헨릭 시엔키에비츠가 폴란드 작가란 건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다.  아, 이 무지함을 어이하리! 

그의 작품 '등대지기'는 작품 설명에서, 헤밍웨이가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노인과 바다'를 썼다는 말처럼 정말 그 작품을 연상케 한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건, 새삼 등대지기란 직업이 정말 외로운 직업이겠구나라는 것과 노인의 정서를 정말 섬세하게 잘 그려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권의 시집이 과연 무엇이기에 등대지기를 박탈당해도 한점 아쉬움이 없었을까? 우리는 흔히 그 시집이 이루지 못한 옛 애인과의 사랑이길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노인의 나라 폴란드를 생각나게 만들었다. 늙는다는 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타국에 있다면 고국을 그리워 하고, 타지에 있다면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 또한 늙는다는 건 모든 것을 느긋함으로 대하는 것. 전전긍긍해 하지 않은 것. 아쉬움이 없는 것.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고국을 떠나 본적이 없고, 나라를 잃은 슬픔을 겪어 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아직 늙지도 않았다. 정말 내가 늙으면 이런 마음이 생길지 모르겠다. 모든 것을 덤덤함으로 사는 나에겐 아직 생겨지지 않은 마음이지만 작가가 워낙 간결하면서도 섬세하게 포착해 내고 있어 정말 애정이 가는 작품이었다. 

인간의 탐욕과 잘못된 사랑의 결과를 인과응보의 카테고리에서 표현한 <파문은 되돌아 온다>  

물질에 대한 끊임없는 탐욕과 자식에 사랑은 본능이며 원죄는 아닐까?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 죄가 될까? 그러나 그것이 지혜롭지 못할 경우엔 모든 것이 어긋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은 물질에 대한 집착과 자식에 대한 잘못된 사랑 때문에 파멸되어 간다. 또한 그로 인해 가난한 노동자의 원성도 산다. 게다가 지극히 도덕적이며 신앙심 깊은 친구이자 목사인 뵈메와도 확연한 대비를 이룬다. 그것은 작가 볼레스와프 프루스의 소설적 장치였을 것이다. 

읽고 있으면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들고, 내가 지난 날 보아왔던 몇 편의 영화들도 생각나게 만든다. 이를테면, <제르미날>같은 민중봉기를 다룬 작품이나 <시민케인> 또는 <배리 린든>같은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오 헨리의 <선물>과 구성방식이 비슷한 <모직조끼>     

같은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이다. 정말 읽으면서 내내 오 헨리의 <선물>을 연상케 했다. 죽어간다는 것. 그 죽음을 지켜보다는 것이 그다지 불행한 것만은 아닌 것 처럼 느껴졌다. 사랑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죽음을 관조하는 또 다른 시각이 가능함을 이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죽음이 그렇게 불행하기만 한 것인가? 좀 죽음에 대한 태도를 긍정적으로는 할 수 없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어린 아이에게 가난은 불행한 것인가? <우리들의 조랑말>  

가난은 어른에게나 불행한 것이지 어린이에게는 아직 불행한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가난한 나라의 어린 아이나 부자 나라의 어린 아이나 얼굴이 순수하고 맑기는 거의 다를바 없어 보이기도 하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건 뭐 때문일까? 누군가를 책임져야 할 책임감이 아직 주어지지 않기 때문일수도 있고,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 나름대로 그 정서가 보호받는 것 같기도 하다. 부모와 형제가 있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우리가 가난을 두려워 하는 건 어린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고, 나 자신과 내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부담 때문인 것도 같다. 이 작품은 그런 점들을 어린 아이의 입장에서 가감없이 보여주는 수작이란 생각이 든다.  

첫 경험에 대한 환상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구름 속의 첫걸음>  

내가 저 <등대지기>,<모직조끼>와 함께 가장 즐겁게 읽은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관음증을 통한 성에 대한 첫 경험을 '구름 속의 첫걸음'이란 은유적인 표현으로 묘사했다. 상큼하면서도 묘한 느낌을 갖게 한다. 관음증은 정말 어떤 병이라기 보단 본능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 소년과 소녀의 이미지를 채 벗지 못한 남녀의 애정 행각을 보게된 주인공. 그것이 야릇하고 짜릿하기 보다 오히려 관조적이다. 너희가 지금은 그렇게 불끈 달아 오를지 몰라도 결혼하고 나이들면 그것도 시들하다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그것은 아마도 그 소년과 같은 시절로 돌이킬 수 없는 아타까움 때문일 것이다. 이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작품을 하나 하나 읽어 가면서 약간은 러시아적이란 느낌도 들었다. 그러면서도 폴란드 특유의 음울하면서도 뭔가 모를 잔잔하면서도 밋밋한 묘한 느낌이 든다. 그것은 어쩌면 익숙치 않은 작품을 처음 대한다는 느낌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비교적 옛날 작품이 많았다. 그것은 온전히 폴란드 작품을 느껴보란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최근의 폴란드 작품은 서구의 영향으로 다소 혼재되었을지도 모른다. 문학의 새로운 개척지로서 폴란드를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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