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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데우스 - Amadeu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이 영화는 나에게 있어서 요즘 흔히하기 좋아하는 '내 맘대로 좋은 영화 베스트'에 꼭 빼놓지 않고 들어가는 목록중의 하나다. 나는 이 영화를 국내 개봉 당시부터 지금까지 3.5번쯤 본 것 같다.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영화도 영화지만 전편에 흐르는 모짜르트 음악의 절묘한 배치가 전율할 정도로 좋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의 음악은 지금 들어도 상당히 세련됐다는 느낌을 받는데, 어떻게 18세기의 사람이 이토록이나 세기를 뛰어넘어 세련된 음악을 구사할 수 있을까? 놀라움을 금치 못할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단순히 모짜르트 음악을 절묘하게 배치시켰기 때문에 좋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 영화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흔히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단연 살리에르와 모짜르트의 관계일 것이다. 살리에르에게 있어서 모짜르트는 경이의 대상이며 동시에 질투의 대상이었음을 영화를 보는 사람 누구든지 공감한다. 그리고 처음에는 모짜르트를 좋아했다가 나중에는 살리에르에 감정이입을 하고 누구나 그를 공감하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모짜르트는 천재고 세상에 천재는 흔치 않으며 살리에르는 범재며 질투하는 인간이고 나 역시 평범하기 그지 없으며 동시에 질투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건 살리에르가 모짜르트에 비해 평범할 뿐이지 진짜 그가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그는 천재는 아니었지만 음악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으며 당시 궁정악장까지 지낸 사람이다. 어디 그것이 아무나 얻을 수 있는 명예던가?
언젠가 아주 오래 전 라디오에서 그의 음악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영화가 주는 선입견 때문일까? 좋긴 좋은데 확실히 모짜르트 보다 음악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 사내는 얼마나 비운의 사내인가? 평가를 받아도 음악 하나로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꼭 꼬리표처럼 모짜르트와 비교해서 평가를 받으니.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간과해서는 안되는 사항이 또 하나가 있다. 그것은 살리에르가 신과의 거래를 했다는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고 도덕적으로도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자신의 음악적 재능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아름답게 쓰임 받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그뒤 한가지 조건이 붙는다. 그러니 자신의 이름이 하나님과 함께 영광을 받으며 음악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얼마나 욕망에 찬 당돌한 기도란 말인가? 그런데 그 앞에 모짜르트라고 하는 작고 볼품없겠 생겼지만 큰 바위같은 존재가 자신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모짜르트는 자유로웠으며, 유쾌했고,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았으며, 늘 자신만만 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고, 누구든지 그를 좋아했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칭송해 마지않았다. 이것이 살리에르를 자극했던 것이다. 특히 무엇보다도 모짜르트는 방탕했다. 그런 자가 음악을 하며 하나님을 찬송을 하다니! 살리에르는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저 방탕하고 음란으로 가득한 자의 찬송을 받으실 수 있느냐는 것이다.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자신을 위대한 음악가로 만들어 주시는 것쯤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이루어 주시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벽에 걸려있는 십자가를 기꺼이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속에 던져넣고 만다. 신이 그를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신을 배반했다. 그리고 신을 배반한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인간이 볼 때 살리에르의 심정과 행동은 일부 정당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신에게 있어 그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가 맨 처음 기도하였던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신의 이름이 더불어 높아지는 것이다. 그것은 교만의 다른 이름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그냥 보아 넘기시지 않는 것이다. 아니 사실은 그냥 보아 넘기셨다. 인간도 말할 가치가 없는 것에 대답을 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 역시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한 것뿐이었으리라. 하나님이 누구신가? 그런 인간의 얕으막한 감언이설적 거래에 쉽게 손을 내미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거래를 살리에르만 하겠는가? 오늘 날에도 살리에르적 거래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가 일일이 알 수가 없다. 이것 때문에 오늘 날의 기독교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대신 하나님은 모짜르트의 찬양을 받으신다. 알겠지만 모짜르트는 일부 종교음악을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서양 클래식 거의 대부분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사실 살리에르의 생각이 틀리지 않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정숙해야하고 도덕적으로도 고결해야 한다. 그런 그의 눈에 모짜르트는 개망나니다. 그런 사람에게 천재적 재능이라니 그건 확실히 돼지목에 진주가 아니겠는가? 무엇보다도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런 사람의 찬양을 받으실 수 있냐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신비가 있다. 예수님은 당신을 정의하시길 과부와 고아와 세리와 창녀의 친구라고 하셨다. 그러니 그런 모짜르트의 음악을 못 받으실 이유가 없으신 것이다. 또한 그분은 성경 어디엔가 말씀하셨다. 돌들을 가리키시면서 너희들이 하나님을 증거하지 않으면 이 돌들이 소리칠 것이라고(맞나?). 비유적 말씀이긴 하지만 도덕적으로 얼마가 거룩하든 거룩하지 않든 하나님의 눈엔 그것이 그다지 다를 바가 없으시다는 것이다.
사실 나 역시 애석하게도 모짜르트 보단 살리에르에 더 가깝다. 나는 도덕적으로 깨끗하길 원하며 나의 탈란트와 재능이 빛을 바라길 바라고 한때는 이것을 놓고 하나님과 딜을 하려고도 했을 것이다. 또 한때는 함께 일했던 주일학교 제자 녀석의 재능을 칭찬해 주기보다 오만방자함을 개탄하며 바로 저런 녀석 때문에 교회가 욕을 먹는 것이라고 나 자신의 열등감을 포장하기도 했다. 물론 이건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고 녀석은 최근까지 교회를 잘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무엇보다 다행인건 시간이 많이 흘러 줬다는 것이겠지.
그런데 내가 저 영화를 보면서 모짜르트의 다른 모든 것은 그렇지 않은데 꼭 한가지가 부러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죽기 전까지 그는 열정적으로 작곡을 했으며 한 번도 자신이 만든 곡을 의심없이 그대로 썼다는 것이다. 문학이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창작이 좀 어려운 일인가? 어떤 땐 자신이 쓰고도 그 쓴 것에 확신을 가질 수 없어서 구겨버릴 때가 얼마나 많은가? 살리에르가 모짜르트를 놀라움의 대상으로 본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그는 무엇이든 자신이 생각한 바를 종이에 그대로 옮겨 적었다는 것이다. 물론 창작의 세계에 있어서 황금률 같은 것이 있다. 즉 자신이 만족할 수 없다면 남도 만족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에 너무 몰두하다 보면 이것을 내가 확신해도 되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리고 곧 자책을 하기도 한다. 난 아직 덜 됐어 라고.
가끔 천재에 대한 보고서를 접할 때까 있다. 그중 하나는 천재는 남이 그렇게 불러주기 전에 자신이 먼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려면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 됐던 그것을 확 들어내 보일 수 있는 자기 확신. 나는 이런 영화속 모짜르트가 부러웠고 또 그렇게 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물론 그것은 그의 천재성이 아니다. 자신감이다. 때로 이것이 없어 나 자신 초라하다고 느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또한 그는 일하다가 죽었다. 마지막 살리에르가 부탁한 곡을 작곡하다가 죽은 것이다. 젊은 나이에 죽은 건 안타깝지만(그가 죽은 나이는 35세라고 한다.) 그렇게 일하다가 죽은 건 확실히 나에겐 부러움이다. 나는 병원 침대에서 주삿바늘에 호스 꽂고 죽어가는 나의 모습은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잘 사는 사람은 자기 죽는 것도 선택한다고 하는데 과연 그게 정말일까?
영화 속 모짜르트를 연기한 톰 헐스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모짜르트를 너무 강렬하게 연기해서일까? 그 이후 그는 출연하는 배역에서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던 것으로 안다. 불운하다면 불운하다고도 할 수도 있지만 이 작품 하나로 그를 기억해 주는 팬이 있다면 그것도 나쁜 것은 아닐 듯 하다.
아무래도 이 영화를 한 번 더 봐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