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찾아, 먼 길을 떠났다
한수산 지음, 이순형 그림 / 해냄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한수산 작가의 책을 이제야 처음으로 읽었다.

책을 산다면 주로 중고샵을 이용하는 편인데 오래전 이 책을 보관함에 담아 놓고 잊고 있다가 얼마 전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나와 있길래 횡재다 싶어 덥석 샀다. (나만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일단 사 놓고 쟁여 두는 스타일인데 이 책은 이상하게도 비교적 빨리 손이 갔다.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 봤더니 오랜만에 8, 90년 대의 서정을 느껴보고 싶었다. 물론 이 책은 2006년도에 나왔지만 명백히 한수산 작가는 8,90년 대 한창 활동했던 작가다.

난 아직도 8,90년대 작가들의 작품을 읽은 것보다 안 읽은 것이 더 많은데 그래도 그때 한창 매스컴에 오르내리던 작가들의 작품을 읽느라 가랑이가 찢어지는 줄 알았다. 이렇게 말하면 소설 꽤나 읽었던 사람으로 오해받을까 싶은데, 그땐 지금만큼이나 매체가 다양하지 않아 기껏해야 신문이나 라디오 광고가 전부였다. 그러니 그중에 내 귀를 간질이고 눈에 들어오는 책이래봤자 얼마나 되겠는가. 지금의 5분의 1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시절 한수산 작가도 나름 꽤 유명했는데 왜 난 책 한 권 읽어 볼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다. 그 시절엔 이문열이나 황석영 같은 걸출한 작가들이 있었다. 그들을 요즘의 언어로 말하면 문단계의 상남자들이다. 그런데 비해 한수산 작가는 황태자라고나 할까? (물론 진짜 그렇다는 건 아니고 앞서 말한 두 분에 비하면이다.) 아무튼 결이 좀 다른 작가란 느낌이 있다. 당시로선 역시 상담자답게 일필휘지로 써 내려가는 소설이 소위 먹어줬던 때라 한수산 작가는 나에겐 늘 예외로 밀려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작가의 작품을 읽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모르긴 해도 작가가 한창 문명을 떨치고 있을 때 읽었으면 난 좀 시큰둥 했을지 모른다. 그 시절 내가 산문집을 그리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아직 덜 여물 때니 무엇을 제대로 알았겠는가. 소설도 좋은지 나쁜지도 모르고 꾸역꾸역 읽었던 것 같다. 게다가 우린 동시대의 것을 좀 낮게 보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상대적으로 저평가한 작가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지나놓고 보니 아, 이런 작가였구나! 새삼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중고샵에서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샀다고 마냥 좋아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를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복간해 제값 내고 사 봐야 되는 건 아닌가 싶었다. (물론 그러면 나 같은 얌생이는 안 볼 확률이 아주 없진 않다.ㅠ )

산문집도 시대마다 결을 달리하는 것 같다. 지금처럼 다양한 결을 갖는 것도 좋긴 하겠지만 그 시절의 서정이 배어있는 책이 좋다. 이 책이 그렇다. 뭔가 옛 생각에 젖어들게 만든다. 역시 문학은 세월을 약간 비껴서 봐야 더 잘 보이는 건 아닌가 싶다. 앞으로 10년 뒤에 요즘 핫한 소설이나 산문을 읽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진다. 그만큼 책은 역사적 산물이고 살아 숨을 쉰다. 10년 뒤에도 잊히지 않고 읽히는 책이 된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일 것이다. 독자가 10년 뒤에도 찾아 주지 않으면 그 책은 유명무실하다. 아니 외로울 것이다.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건, 작가가 자신의 은사를 기리며 쓴 글이다. 작가가 대학시절 국문학에서 영문학으로 전과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박용주 교수를 기리는 마음이 애틋하다. 여간한 은사가 아니면 이렇게 챕터 한 장을 통째로 쓰는 건 드물 것 같다. 그런 걸 보면 사제지간이 꽤 끈끈했던 모양이다. 작가는, 교수님은 '생활은 평범하나 이상은 드높게(Plain Living High Thinking)'라는 말을 흑판에 쓰면서 낭만주의의 핵심을 기억시킨 분이라고 소개한다.

또한 소설가들 중엔 술을 그것도 미국 작가들이 많이 마시는데 왜 그런가에 대해 교수님은 누가 작가가 글을 쓴다는 건 발가벗는 것 같은 부끄러움 때문이라고 카더라며 그러니 글 쓴다고 너무 술을 많이 먹지 말라며 경계해 주셨다고도 쓰고 있다. 그런 것을 보면 박용주 교수는 한수산 작가를 아들같이 챙겼나 보다. 또한 그분은 이 세상을 둘로 나눈다면 토머스 울프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겠다며 토머스 울프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작가는 그렇게 존경해 마지않던 은사님의 마지막을 지켜드리지 못했다며 울먹인다. 그리고 훗날 교수님의 아드님이 결혼 주례를 작가에게 부탁받았을 때 과연 그럴 자격이 있나 잠시 주춤했다고 쓰고 있다. 순간 얼마나 은사님이 생각났을까 싶다. 그 글을 읽고 있는데 나에게도 과연 그런 은사님이 계셨을까를 돌아보게 한다. 분명 계신다. 작가의 은사님만 같지 않을지라도.

책은 후반부에 우리나라의 쿠바 유민사와 고려인을 찾는 시베리아 8천 킬로미터 대장정의 기행문을 담기도 했다.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 이 책 사 보길 잘했다 뿌듯함마저 느껴졌다. 그러면서 정말 우리가 아는 역사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득, 예전에 작가들은 이렇게 자료수집이란 명목하에 취재하기 바빴다. 취재가 작품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러다 어느 때부턴가 작가들은 엉덩이의 힘이라며 취재보단 서재나 연구실에 앉아서 글을 쓰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이제 취재는 기자나 르포나 기행 작가만 하는 것 같다. 과연 이게 맞는 건가 의문스럽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요즘의 산문집과 다르게 뭔가의 힘이 느껴지면서 작가가 참 치열하게 글을 썼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문체도 나름의 격조가 느껴진다.

여담이지만,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거리의 악사'란 작가의 원작 영화를 보기도 했다. (영화는 당시는 어떨지 몰라도 요즘 보기엔 다소 감이 떨어지는 느낌이어서 다소 아쉬웠다.) 확실히 원작을 영화로 보는 것과 책으로 보는 것은 차이가 많다. 뭐 선택이고 취향이지만 난 역시 책 보다 나은 원작은 없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유명한 작가의 필화 사건도 언급했는데 그로 인해 작가는 잠시 한국을 떠나 살기도 했다. 누구의 소설 제목처럼 한국이 싫어서. 그 시절 필화 사건 하나쯤 연루되지 않은 먹물들이 어디 있겠는가. 철없는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학교 때 친구 하나가 운동권이었는데 그 때문에 알만한 명문 여자 대학에서 잘리고도 시대가 바뀌자 오히려 그것이 훈장이 되었다. 시대가 사람을 만든다는 게 맞는 말 같다.

지금은 예전 같은 필력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작가는 최근까지도 책을 내면서 편안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그게 참 보기가 좋다. 아무리 작가는 정년이 없는 직업이라지만 젊었을 때 치열하게 쓰고 노년이 되어서는 즐기면서 쓰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모쪼록 강건하셔서 오래도록 글을 써 주셨으면 좋겠다.

부디 건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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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1-10 2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수산 작가가 감성적인 글을 쓰신 분인데 남산인가 어딘가로 끌려가 고문당한 걸 생각하면 기가 찹니다.
엄청난 트라우마를 겪었다고 하더라고요.
건강하시면 좋겠어요^^

stella.K 2024-01-11 11:52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다고. 아마 그 때문에 일본으로 가셔서 은사님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다고 쓰셨던 것같아요.
제가 요즘 이렇습니다. 돌아서면 깜빡하거나 가물가물 입니다. 이해하시길. 이 책 읽은지 좀 되거덩요. ㅋ

2024-01-11 0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11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목련 2024-01-11 1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읽은 작가의 <가을 나그네>를 무척 좋아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정확하지 않지만 소설 속 딸 이름이었던 동영, 서영, 남영. 줄거리는 도통 생각나지 않고요. ㅎ

stella.K 2024-01-11 12:03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딸 셋만 낳길 다행이네요. 넷이었으면 뭐라고 지였을까요? 북영에세 ㄴ을 뺐을까요? ㅋ
제목 말씀하시니까 한수산 작가와 비슷한 결을 가진 작가가 최인호나 박범신 작가가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마음 같아선 이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쫘악 읽어보고 싶기도 한데 그냥 마음 뿐이네요. ㅠ

blanca 2024-01-11 15: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시대 특유의 서정성을 느끼고 싶을 때가 있어요...아련하네요. 저는 요새 무려 80년대 전원일기를 다시 보고 있답니다.

stella.K 2024-01-11 15:17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한때 그랬어요. 리모컨 운전하고 있으면 옛날 고릿적 드라마 를 하는데 아, 저런 때가 있었지, 아련해 지더군요. 그리고 그렇게 브라운간을 채웠던 배우들이 하나 둘씩 진짜 저 하늘의 별이되는 걸 보면 쓸쓸해요. 그래도 이렇게 옛 작가의 글을 더듬어 읽는 것도 꽤 낭만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브랑카님도 한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