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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천명관 장편소설 ㅣ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9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평점 :
인간의 선한 면도 있을 텐데 어쩌면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그리도 악하고 교활한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이런 활어회 같은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게 또한 놀랍기도 하다. 하긴 생각해 보면 악만큼 자기 본성에 충실한 존재가 또 있을까. 보통의 작품이라면 인간의 선한 면이나 적어도 인간관계적 측면을 고려한 글을 쓸 수도 있을 텐데 이건 이기적이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성경엔 소돔과 고모라를 음란과 우상숭배로 타락한 도시로 묘사하곤 하는데 모르긴 해도 작가는 평대란 가상의 마을을 그렇게 쓰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게다가 마르케스의 '백 년 간의 고독'으로 대표되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구현해 낸다. 그래서일까? 어떤 등장인물은 죽었나 싶으면 어느 장면에서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 삶과 죽음을 특별히 나누지 않고 언제든지 현실에서의 소환이 가능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현대사를 끼워넣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상상력이 더욱 풍부하고 확장된 느낌이다.
평대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아귀다툼은 정말 악마적이다. 또 그런 만큼 이야기는 악마적으로 재밌다. 선이라곤 요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얼핏 춘희가 후에 에꾸에게나 혹은 교도소에서 별명이 간호사인 여자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긴 하지만 그건 그저 연대의 의미일 뿐이지 그걸 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다. 물론 그것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데 일정 부분 기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특이하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주요 인물을 남자로 하지 않고 여자로 했다. 남자 작가가 말이다. 뭔가 의도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것은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자주 나타나기도 한다.) 즉 이 이야기는 못 생긴 노파와 금복과 그녀의 딸 춘희의 이야기다.
특히 난 춘희라는 인물에 감정이입이 되기도 아니 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악마적으로 자기 본성에 충실한 인물만 보다가 춘희는 뭔가 달랐다. 그건 확실히 작가의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작가가 춘희란 인물을 창조해내지 못했다면 이 작품은 그저 그런 범작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춘희는 적어도 악한 인물은 아니다. (아, 그런 인물이 더 있긴 하구나. 文이라는 금복의 기둥서방 겸 춘희에게 벽돌 만드는 기술을 전수해 주는 사람과 금복과 의자매를 맺을 정도로 가까운 쌍둥이 자매 정도.) 한마디로 불쌍한 존재다. 금복이 춘희의 아버지는 좋아했지만 그 씨를 받은 춘희는 사랑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춘희는 벙어리에 살이 뒤룩뒤룩 찐 거구다. 그리고 머리가 나쁜 바보라지만 그 보단 자기 세계에 갇힌 자폐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이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건 그녀가 통뼈라는 것. 정말 의학적으로 증명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통뼈는 웬만해서 다치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녀는 말을 못 하는 것 때문에 한때 방화범으로 몰려 교도소에 가야만 했고, 거기서 악의 실체와 바닥을 보아야 했다. 하지만 사람이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어서 장군의 하해와 같은 은덕으로 특사로 풀려나고 결국 대화재로 유령의 도시가 된 평대로 다시 돌아온다.
여기서 춘희를 방화범으로 오인하도록 만든 평대의 대화재란, 금복이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고 여러 권모술수로 성공한 사업가가 된다. 게다가 여자에서 남자로 전환하기까지 한다. (여기엔 작가의 약간의 그럴듯한 설명과 이 이야기가 마술적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썼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란다.) 하지만 성공한 사람 대부분의 말로가 그렇듯, 성공하는 순간 몰락한다고 금복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건 또 창녀인 수련을 자신의 애인으로 삼으면서부터다.
사람이 은혜를 입었으면 보답하고 살아야 하는데 한 사람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수련이 금복을 배신하자 삶의 의욕을 잃고 술로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금복이 세운 극장(그녀는 칼자국에게서 영화를 접하기 시작해서 나중에 극장까지 세우는데, 작가의 초기 주요작엔 영화판에 관한 이야기를 을 자주 그리곤 했다. 이를테면 이 작품을 비롯해 '나의 삼촌 부르스 리' '고령화 가족'등)에서 누가 흘린 휘발유에 모르고 담배에 불을 붙이다 극장 전체를 불에 태워 금복은 물론 많은 인명 패해를 두고 평대의 대화재라는 것이다. (이것을 영상으로 봤다면 대단했을 것 같다.) 그 화재 이후 춘희는 극장에 와 봤을 뿐인데 경찰은 다른 사람은 다 죽었는데 혼자만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애꿎은 방화범으로 몬 것이다. 게다가 춘희는 말을 못 했으니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다.
나는 이야기 전반에 흐르는 금복의 생애와 최후를 보면서 역시 악의 속성은 속이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거라더니 그것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놀랐다. 그리고 글 쓰기 강의를 들으면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게 되는데 막상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좋은 텍스트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춘희는 평대의 딸이다. 자신을 잡아다 참혹한 교도소 수형생활을 하게 만든 평대로 저주하며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돌아온다. 돌아올 때 그녀는 교도소 수형복을 그대로 입고 있다. 그 마을엔 유일하게 그녀만 존재했기 때문에 다른 옷을 사거나 만들어 입을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에 따라 그 옷은 무려 10년 동안 벗지 않아 찢어지고 해질 때로 해진다.
아무튼 그런 곳을 돌아와 엄마의 가업이자 文 씨에게서 배운 벽돌 굽는 일을 한다. 그것 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그러다 어렸을 때 잠깐 만난 적이 있는 트럭 운전사가 평대에 오고 정분이나 임신을 한다. 트럭 운전사와 춘희의 관계는 상상하는 것처럼 비인간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바람직하다. 그들의 관계의 첫 시작은 춘희가 만든 벽돌을 트럭 운전사가 외지에 팔아 주겠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차츰 춘희에게 옷도 사 주고, 먹을 거며 필요한 가재도구 등을 사주며 제법 부부 행세를 하는 것이다. 그러다 트럭 운전사는 춘희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떠난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춘희는 본능처럼 아기를 낳고, 본능적으로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본능적으로 먹을 것을 찾으러 돌아다닌다.
그나마 훗날 트럭 운전사는 마음을 돌이키고 춘희에게로 향하지만 눈사태로 눈 속에 파묻혀 죽고, 얼마 안 있어 아기도 죽고 춘희도 죽는다. 그리고 이야기는 20년을 훌쩍 뛰어넘어 웬 듣보잡의 한 건축가의 이야기가 새롭게 시작된다. 그는 한 건축 프로젝트를 맡았는데 건물을 짓는데 벽돌 때문에 주최 측과 충돌을 빚는다. 그런 과정에서 춘희의 벽돌 제조 방식을 알게 되고 그것이 자신이 찾는 것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웬걸 인걸은 간데없고 몇 장의 벽돌만이 남아있다. 그게 참 묘한 울림이 있다.
같은 죽음이라도 금복은 악의 화신이면서 비극적으로 죽어갔지만 춘희는 모든 어려움을 이기며 생명과 희망을 죽은 후에도 우리에게 전해준다. 약한 것에 강함이 있다고 이것을 남자의 이야기로 했으면 어쩔 뻔했겠는가.
작가는 서사를 다룸에 있어서도 남다르다. 이를테면 기존의 작가들은 기승전결에 너무 사로잡혀 그 틀에서 만 뭔가를 보여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요즘 난 소설을 거의 안 읽었는데 요즘 작가들은 기성 작가와는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다.) 하지만 천명관 작가는 확실한 서사에 오히려 뒤에 가서 뭔가의 묵직한 울림을 줘 독자로 하여금 오랫동안 가슴에 감동을 머금게 한다.
그것은 또 작가가 시나리오를 썼던 만큼 영화의 방식이기도 하다. 왜 영화도 잘 만든 영화는 감동을 최대한 지연시켰다 뒤에 가서 한 방을 터트려주면 관객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도 한동안 그 자리를 쉽게 떠나지 못하지 않는가.
작가는 훗날 '나의 삼촌 브루스 리'에서 이와 같은 방식을 쓰기도 했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감방에 가두는 모순적인 방법을 취하므로 작품의 감동을 극대화시킨다. 사실 이건 말이 쉽지 거의 특기를 넘어 신기에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
또 신기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왜 그런 작가들 있지 않나, 글 쓰는 게 가장 쉬웠다며 등장인물이 말하면 자신은 그저 받아 적었을 뿐이라던 그 신기의 작가들. 그렇듯 일필휘지로 막힘없이 썼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작가는 시나리오를 썼다 소설로 전향했다. 모르긴 해도 시나리오를 썼을 때 보다 소설을 쓸 때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이미 여러 번 다른 글에서 우려먹긴 했지만)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고,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소설은 누구의 예술일까? 답은 나왔다. 작가(소설가)의 예술이다. 우린 이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또 그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작가가 바로 천명관 작가가 아닐까 싶다. 소설을 외면하는 우리나라 문학계에서 소설을 쓰는 작가들에겐 좀 자신감을 가져도 좋은 대목이 아닐까 싶다.
지난봄 우리 문학계에 낭보가 전해졌다. 바로 작가의 이 작품이 영국의 부커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 비록 수상까진 못 갔지만 그런 권위 있는 상에 후보만으로도 적지 않은 성과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확실히 외국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마술적 리얼리즘과 우리나라 현대사를 작가 특유의 문체로 녹여냈다는 점이 찬사를 받게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 개인적으론 먼저 읽은 '나의 삼촌 부루스 리'가 더 영화적으로 썼으며 더 애정이 간다.
작가의 시작은 이제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