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온수를 쓰려고 보일러를 트는데 꼼짝을 안 한다.

그래. 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그런데 사람이 얼마나 문명에 절어 사는지 물, 전기, 가스 심지어 스맛트폰까지 10분만 안 되도 짜증이나고 불안이 엄습해 온다. 그러면서 세상이 갑자기 회색으로 변하면서 싸늘해진다. 안 나오면 언제까지 안 나올거지? 언제까지 안될 건데하며 초조해진다.


이른 시간이니 A/S 센터에 전화해 봤잔데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에 전화를 해 본다. 역시 안 받는다. 일단 아침을 먹고 10시 언저리쯤 전화 해 본다. 우리가 쓰는 보일러는 지부가 있어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연결해 준다. 저쪽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하는 목소리가 낮설지 않다. 3년 전(어쩌면 더 되었을지도 모르고) 이 보일러를 처음 설치했을 때 들었던 갱상도 사투리가 살짝 베어있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다. 반갑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갑다고 인사하고 그럴 사이는 아니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보일러가 작동되지 않는다고 했더니, 보일러의 코드를 뽑았다 다시 꽂으란다. 그러면서 뭐 그런 걸 가지고 전화를 하나 저쪽에서 먼저 끊으려고 한다. 3년 전 처음 설치하고 작동 방법을 몰라 전화를 했을 때도 같은 반응이더니 별로 일하고 싶지 않은가 아니면 대인기피증이 있나 여전하다 싶었다..


어쨌든 전화를 끊고 가르쳐 준대로 코드를 찾는데 도대체 이게 어디 있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처음 보일러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을 때 무슨 스위치가 나갔나 싶어 다용도실에 나가 보일러를 한참 두리번 거리며 찾았다. 하지만 스위치 같은 건 없었다. 스위치도 발견 못했는데 코드라고 찾겠나? 그럼 뭐 상판이라도 뜯고 찾아 봐야하는 건가? 슬슬 짜증이 밀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전화 끊기 전에 그런 게 어디있냐 묻자 그거야 내가 모르죠 하며 고객님인 내가 찾아야 한단다. 순간 뭘 날로 먹겠다는 건가 싶었다. 고객인 내가 찾아야 한다니. 내가 무슨 보일러 설계자도 아니고 그런 거야 직원이 더 잘 아는 거 아닌가. 냐 같으면 아, 그러냐고 그럼 곧 직원을 보내 드리겠다고 그러고 나올 줄 알았다. 


결국 다시 전화해서 위의 내용과 거의 엇비슷하게 퍼부었다. (그렇다고 진짜 퍼부은 건 아니고. 승질 난다고 함부로 퍼부으면 입건될 수도 있다.) 그러자 모델명이 뭐냐고 묻는다. 이것도 3년전 물었던 기억이 있어 금방 찾을 줄 알았다. 그때 나는 메뉴얼을 손에 들고 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으니 결국 다시 보일러가 있는 다용도실을 나가 찾아봤는데 역시 얼른 눈에 띄지 않는다. 겨우 찾아 불러줬는데 알았다며 기사가 지금 당장 갈 수는 없고 오후에 갈 수 있단다. 그러자 결국 화가났다. 

"이보세요. 보일러가 안 돌아서 식구 하나가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나갔어요. 어떻게 오후까지 기다리란 말이예요?"

그건 사실이다. 우리 집 가장은 꼭 아침이면 샤워를 하고 출근을 하는데 겨우 고양이 세수만 하고 나갔고, 연이어 난 머리를 감아야 하는데 그것도 못하게 생겼다. 그러자 저쪽에서, 

"어쩔 수 없고요, 출장비는 만팔 천원입니다." 

순간 움찔했다. 

"뭐요? 만팔천 원이요? 아니 코드만 찾으면 되는 걸 어머머, 웬일이야."

"아니 웬일이야가 아니구요 실제 가격이 그래요." 

"아니 뭐가 어떻게 되는지는 그쪽이 더 잘 알거 아니예요. 그러면서 고객더러 찾으라는 게 말이나 돼요?" 

"아니 코드가 어디 있는지는 당연히 고객님이 더 잘 아시죠. 일단 끊으시고 찾아보세요."

"아니 제가 어떻게 알아요? 상판을 뜯어야 해요?" 

"아니 그럴 필요없는데."

확실히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분명 간단한 문제를 내가 못 찾고 있는구나 싶었다.

"어쨌든 알았어요. 다시 한 번 찾아 볼게요. 문제 해결되면 전화 드리구요, 전화 없으면 기사님 보내주세요." (사실은 마지막 말은 앞뒤가 바뀌었다. 오히려 문제 해결이 되면 전화하지 않고 안되면 다시 전화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1588로 시작되는 전화번호는 수신자부담이 아닌 걸로 알고있다.)  

역시 돈이 무섭긴 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회색의 전깃줄이 보였고 그건 다용도실 구석벽 콘센트에 꽂혀 있었다. 그것을 처음 상담사 말대로 뺏다가 다시 껴봤다. 그랬더니 된다. 얼마나 허탈하던지. 

내쪽에서 전화를 해 준다고 했으니 하는 수 밖에. 간단하게,

"네. 이제 되네요. 감사합니다."하고 끊었다. 

무엇이 어디서 잘못됐는지 알 수가 없다. 애초부터 풀러그와 콘센트를 얘기 했으면 내가 잘 알아 들었을 텐데 코드라니. 하긴 사실 그 말이 틀린 말도 아니다. 예전엔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솔직히 난 기계치다. 그래서 기계에 대한 얘기는 거의 못 알아 듣는다. 그렇다고 알아 먹기 위해 기계에 대해서 배울 수는 없지 않은가. 요즘 한창 회자되는 문해력의 문제일까? 누가 문학이나 영화, 드라마 살림에 대해서 말해 보라. 그건 금방 알아 먹는다. 문해력도 문해력 나름 아닌가. 어떻게 모든 분야의 말을 알아 먹을 수가 있어? 그게 가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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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12-24 0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일러 기사 오지 않고도 해결돼서 다행이네요 어딘가 고장 난 게 아닌 것도... 그런 거 고장 나면 안 좋기도 하잖아요 다음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같은 걸 해 보면 되겠습니다


희선

stella.K 2021-12-24 11:28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근데 출장비 만8천원에 정말 깜놀했어요.
회사측으로선 불필요한 출동을 막아 보자고 한 조처겠지만
저 같은 기계치는 무슨 말을하는지 못 알아 먹을 때가 많거든요.
전 기계에 대해 말할 때가 젤 쪼그라들어요.
근데 모르는 사람은 그말도 알아 듣지 못한다고 하겠죠.
문해력을 일깨우는 것도 좋긴하지만 모든 걸 싸잡아서
문해력이 있다 없다는 판단하는 건 문제가 없는 걸까
의문스럽기도 하더군요.
사람 개개인마다 자기가 알아 듣는 말과 못 알아 듣는 말이
있을 거라고 보는데 말이죠.

근데 이 글 웃자고 써 본 건데 반응이 썰렁하네요.
이로써 알 것 같습니다. 저는 글로는 사람을 웃기는 존재는
못 되는 것 같습니다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