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 소녀가 어느 날 납치되어 무려 7년 동안 방에 감금된다. 제목이 그래서 그렇지 사실은 가로 X 세로 3.5미터 남짓의 컨테이너 박스 같은 공간이다. 거기에 없는 것이 없다. 화장실은 물론이고, 샤워 시설도 있고, 간이 싱크대와 침대, 벽장도 있다. 그뿐인가, TV도 있고, 천정엔 조그만 창문도 뚫려있다. 더구나 그녀를 납치한 남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생필품을 가지고 온다. (가지고 오면 한나절을 지내다 간다.)
처음에 소녀는 반항도 하고, 탈출도 감행하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서서히 납치범에게 길들여져 갔을 것이다. 소위 말하는 가스라이팅. 그러나 영화는 그 모든 있을 법한 상황들을 배제하고 그녀의 아들 닉의 5살 생일이 되는 날부터 시작을 한다. 사실 성별을 말하지 않으면 여자 아인 줄 착각하겠다. (이 아들 역은 '굿 보이즈'에 나왔던 제이콥 트렘블레이다.) 곱상한 외모에 머리를 태어나 한 번도 자르지 않았다. 이것은 또 이들 모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갇혀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되기도 한다.
가스라이팅이 될 수밖에 없는 건 납치범 닉의 완력도 있겠지만 좀 허접해서 그렇지 방에 있을 건 다 있다. TV가 있어 세상 소식을 들어 볼 수 있고, 작지만 하늘도 바라볼 수 있다. 더구나 생필품을 공수해 주지 않는가. 최소한 굶어 죽을 일은 없다.
그러나 소녀 조이는 어느새 여인이 되었고 자신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 그것은 그녀가 언제까지나 무력하게만 있을 수 없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동시에 완전범죄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납치범 닉은 어설픈 납치범이라는 말이다. 그는 조이를 납치하는 데 성공을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납치가 성공하려면 그녀에게 임신을 시키지 말았어야 했다는 말이다.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고, 룸에 자신만 있는 것 같으면 탈출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을지 모른다. 자신은 룸에 갇힐지라도 아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어떻게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게 해 줘야 한다. 하지만 잭은 이제 막 5살이 되었다. 탈출을 감행하기엔 아직 어린 나이다. 엄마와 TV가 전부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아이가 이 방을 나가야 한다는 걸 무엇으로 납득할 수 있겠는가. TV로 사물을 인식하는 것과 세상에 나가서 직접 몸으로 체득하는 건 확실히 다른 것이다. 바로 그것을 조이는 엄마로서 아들에게 길을 열어줘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이들에게 필요한 건 용기다.
어느 날, 아들이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다 죽은 것으로 가장하고 카펫에 돌돌 말아 닉에게 맡긴다. 그러면 닉은 그런 줄만 알고 장례든 매장이든 한다며 잭을 바깥으로 반출할 것이 아닌가. 그렇게 룸을 빠져나간 잭의 시선이 참 인상적이다. 닉이 운전하는 차에 짐짝처럼 실려서 처음으로 본 세상과 하늘은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고 동시에 벅찬 일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잭의 탈출극은 처음 시도한 것치고는 아슬아슬했지만 성공적이었다. 그 덕분에 조이도 구출이 되고 납치범의 만행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거기서부터다. 조이는 방을 나가면 그리운 부모도 만나고 모든 것이 다 좋을 줄만 알았다. 하지만 막상 나오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롭게 적응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더구나 그녀의 아버지가 무조건 자신을 받아주고 좋아해 줄 줄 알았는데 뭔가 모를 벽이 느껴진다. 거기서 오는 괴리감. 자신이 그럴진대 아들은 과연 세상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불안하기도 하다. 결국 그것을 폭발시킨다. 그런 불안한 엄마와 딸의 중첩된 감정을 조이 역을 맡은 브리 라슨은 실감 나게 연기한다.
어쩌면 아이는 어른 보다 현실 적응이 빠를지도 모른다. 어른이 된다는 건 자주 길을 잃어버린다는 것인지도 모르고. 영화는 어린아이의 심리를 잘 표현했다. 사회성이 아직 발달되지 않은 아이들은 종종 사물을 의인화한다. 잭도 갇혀있는 동안 그 안에 있는 사물을 모두 의인화한다. 그게 참 특별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오죽 친구가 그리웠으면 사물을 의인화할까 싶기도 하고, 어디서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쥐에게조차 친절을 베풀지 않는가.
여담이지만, 사물을 의인화하는 꼭 어린아이의 특징이라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어른도 가끔은 의인화한다. 단지 다른 게 있다면 아이들은 눈에 띄는 모든 걸 의인화하지만 어른은 선택적으로만 한다는 정도? 가령 나 같은 경우엔 버려지는 음식을 보면 이상하게도 안쓰러움이 있다. 이것들도 누군가의 위로 들어가 영양을 공급하는 에너지로 바뀌길 소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건 무사히 사람의 위에 도착이 되고 어떤 건 사람의 입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버려져야 한다니 그것들의 입장에선 좀 억울하고 원통할 것도 같다. ㅋ 그뿐인가? 책의 원성은 어떻고.
별것 아닌 장면 일 수도 있는데,(사실 영화에서 별것 아닌 장면은 없다. 모든 건 철저하게 짜인 각본대로다. 별것 아닌데 지나칠 수 없다면 그걸 디테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잭이 엄마의 집에서 계단을 오르지 못해 비틀거리는 장면이 있다. 순간 아,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하며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은 마당이 좁은 대신 옥상이 있었다. 거기에 오르는 계단이 제법 길었는데 난 너무 어려서 한동안 오르지 못했다. 그러다 조금 더 자라서 오르기 시작한 옥상은 아래에서 보던 세상과 너무 달랐다. 그렇게 세상을 깨우쳐 가기에도 아이는 너무 바쁘다.
조이가 그렇게 부모에게 화를 내고, 나는 좋은 엄마가 못 되는 것 같다고 자책한다. 그때 잭이 딱 한마디 한다. 그래도 엄마잖아. 그게 또 마음을 울린다. 세상의 모든 엄마는 자신이 좋은 엄마가 못 된다는 걸 너무 잘 아는지도 모른다. 그걸 아이도 알고. 그래도 엄마란다. 엄마는 역시 스스로 되는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한 김춘수의 시처럼 누군가 엄마가 되도록 해야 엄마가 되는가 보다.
영화는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요즘 들어 자발적 은둔자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요즘의 세상이 굳이 사람을 만나거나 사귀지 않아도 크게 불편함이 없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인터넷과 sns가 있는데 뭐 굳이 귀찮게 사람을 만나고 사귄단 말인가. 게다가 인간이 좀 복잡한 구조로 되어있는 생물체인가. 오해도 잘하고, 삐지기도 잘 하고. 그걸 일일이 맞추기도 피곤하다. 우정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도 오래 지속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방에 갇히고 싶을 지경이다. 더구나 지금의 팬데믹은 자발적 은둔자를 만들기에 최적 아닌가. 자꾸 사람을 만나지 말라고 하니.
하지만 지금의 팬데믹이 어디 그렇기만 하겠는가. 그것의 전제는 은둔을 합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배려를 바탕으로 한 거리 두기다. 인간은 절대로 혼자서 살 수 없다. 다소 힘들고 어렵더라도 함께 있는 이득이 혼자 있는 것보다 크다.
방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방은 혼자 있기 좋은 공간임에 틀림없다. 방은 깃들이고 쉬기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에겐 탈출을 위한 공간이고, 누구에겐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출격을 다짐하는 공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건, 어떤 의미가 됐든 거기에 언제나 머물 수 없다는 거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라고 한다. 소설이 먼저 나왔고 소설을 쓴 작가 엠마 도노휴가 시나리오를 써서 여러 유수한 영화제 각본상 후보에 올랐지만 실제로 수상으로 가지는 이어지지 못한 것 같다. 그래도 후보가 어딘가. 우리나라에 번역본이 나오긴 했지만 절판됐고 그나마 중고샵에선 일부 돌고 있는 것 같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