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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이종화 지음 / 홍성사 / 2016년 2월
평점 :
<중국 고전에서 그리스도를 찾다>란 책이 있다. 기독교인으로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더구나 이 책은 인터넷 서점에서 인하된 가격으로 팔고 있다.) 마음 같아선 한 권 장만하고 싶은데 700쪽이 넘는 분량을 읽어낼 수 있을지 의문스러워 망설이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프랑스 신부로 무려 1700년대에 중국 선교를 파송받고 웬만한 중국 고전을 독파하며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찾아갔다. 그것을 책으로 쓴 것이다. 심지어 저자인 프레마르 신부는 공자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것을 예견했었다고 한다.
문득 오래전 교회 청년부를 다니고 있을 때 성경공부 리더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진짜 기독교를 이해하려면 동양 철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알다시피 기독교는 서양에 영향을 주었고 동양철학과는 배치된다는 것이 보통의 인식인데 왜 그런지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동양철학이 서양철학 보다 훨씬 깊고 우위에 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세월이 한참 흐르긴 했지만 아마도 이 책이 그 리더의 말에 실마리를 제공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다. 그러면서 이 프레마르 신부가 자꾸 생각이 났다. 연구하느라 얼마나 고독했을까. 얼마나 지난했을까.
신부의 중국식 이름은 마약슬이다. 그는 30년 중국 사역 동안 경전과 고전, 주석서들과 중국 고대 역사서를 백여 차례나 읽고 또 읽으면서 기독교의 본원적 흔적으로 여겨지는 모든 구절을 수집하였다. 신부에 대해 좀 더 알아볼 수 없을까 생각하던 중 마침 그 책의 역자가 소설을 썼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일단 소설을 사서 읽었다.
제목 <물이 바다 덮음같이>는 '물이 받아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란 성경 이사야 11장 9절의 말씀에서 따왔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책은 좀 놀라운 책이다. 무엇보다 저자 이종화는 전문 소설가가 아니다. 대학 때 불문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는 경제학 석사와 박사를 받았다. 귀국 후 대학에 국제통상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는 수년 전(이 책이 나온 건 2016년이다) 유교 경전을 읽다가 그 내용이 성경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얼마 전 오강남 교수의 <장자> 조금씩 읽고 있는데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딱히 하나님이 거론되지 않을 뿐이지 대입하면 성경의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느낌을 받는다. 아무튼 저자는 그 후 혹시 고대 중국과 유대인들과의 교류가 있었는지 자료를 찾다가 프레마르 신부를 알게 되었고 <중국 고전에서 그리스도를 찾다>를 읽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친김에 번역까지 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프레마르 신부가 1725년 라틴어로 완성한 것을 그로부터 약 150년 후인 1878년 두 명의 프랑스 신부가 불어로 번역하고 그것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저자가 프레마르 신부의 책을 출판하기 전 일종의 예고편 같은 것이다.
이야기의 형식은 역사 추리다. 조선시대 경종 1년을 배경으로 신부가 중국에서 활동하던 시기 조선의 사신들이 서양 문물을 습득하기 위해서 북경 천주당을 왕성히 드나들던 때를 상정한다. 만약 신부의 그 책이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에 전해졌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를 상상하며 썼다고 하는데 내용이 흥미롭긴 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이해하려면 <서경>이나 <역경>을 알고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선 프레마르 신부의 책을 읽기 위해 알아야 한다. 버겁다. <사서삼경>도 제대로 읽지 못한 내가 서경이나 역경을 읽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내용에도 보면 마약슬 신부가 자신을 만나러 온 조선 사신에게 중국의 상형문자와 기독교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설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알 수도 없고 그저 이런 게 있었구나 나의 무지함을 또 한 번 일깨우는 정도 밖엔 되지 않았다.
이 책의 미덕은 저자가 전문 소설가도 아니면서 다양하고도 풍부한 어휘를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래 역사 소설에 고어나 사어들을 살짝살짝 써 주면 고급스러워 보이긴 하다. 하지만 요즘엔 아무리 역사 소설을 쓴다고 해도 현대적 감각을 내세워 익히 아는 단어만을 고집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보거나 잊힌 단어가 심심찮게 많이 발견했다. 이를테면 구실아치, 서쾌, 액흔, 치의, 맨드리, 곰비임비, 구메구메, 번주그레, 실천스럽게, 지망지망히 나부댔다, 바르집기, 생게망게 하다, 옹긋쫑긋 등. 운종가란 단어를 들어 보긴 했지만 이 책에서 그 뜻을 알았다. 사람이 구름 엉기듯 모이는 것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그뿐인가, 성경을 알려면 나라나 사람 이름도 알아야 하는데 그걸 한자어로 옮겨 놓은 것도 이색적이다. 예를 들면, 히브리를 희백래로, 이스라엘은 이색렬국, 앗시라아는 아서리아, 메시아는 미새아, 모세는 마서다. 중국 사람들은 코카콜라도 가구가락으로 고쳐 부른다던데 과연 대단한 중국이다 싶기도 하다.
원래 바울은 아시아를 선교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복음은 유럽에 전파되었다. 몇 세기가 흐른 후 복음이 아시아에 전파된다면 그건 중국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많은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 선교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중국이 공산화하면서 그 길이 막혔다. 선교사들은 일본도 겨냥했지만 그 역시 전제군주주의와 제국주의에 막혀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까지 아시아에서 복음 전파에 성공한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모르긴 해도 이 책도 그 맥락에서 쓰인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저자의 작품을 폄하할 생각은 없는데 일종의 신앙적 애국주의로 읽히기도 한다. 그 보단 프레마르 신부는 중국 고전을 연구하는 동안 중국 복음 전파의 당위성을 확신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프레마르 신부의 일생이나 그가 추구하는 바를 추적하는 방식으로 글을 썼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일종의 전기적 기법으로 말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비전문 작가라고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저자는 우치무라 간조의 신실함, 도스토옙스키의 인간성에 대한 통찰, 니체가 도달한 지성 최고의 경지, 카잔차키스가 갈망한 영혼의 자유를 사랑하고 그것이 조금이나마 소설에 표현되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썼다고 밝히고 있다. 웬만한 소설가 못지않은 노력과 지성을 겸비했다. 하지만 읽을 책을 항상 많이 쌓아놔서일까 아니면 게을러서일까 아쉽게도 이 소설을 읽었다고 <중국 고전에서 그리스도를 찾다>를 읽어 볼 마음이 당장 생기지는 않는다. 예전엔 동양 철학이 고리타분하고 어려워 관심이 없었는데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조금씩 관심이 가고 있다. 또 그러다 보면 신부의 책도 읽는 날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저자에겐 존경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