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용군이 되어 북으로 끌려간 시인 김수영 소설가 박계주, 유정(소설가 김유정을 지칭하는 것 같다) 등은 한동안 청천강변의 강제 노역에 동원됐다가 전선이 북상하면서 평양 방어전에 투입된다. 그러다 김수영이 훈련을 받던 중 먼저 평양의 관문인 진남포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먹으며 기회를 보다가 이탈하고 유정도 곧이어 탈출을 시도한다. 이들은 수수밭에 몸을 숨기고 있다 지나가던 늙은 농부의 도움으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삭발을 한 머리는 모자로 감추며 대동강 하류를 건너 평양에 주둔한 국군과 미군에 자신의 뜻을 알리지만 안타깝게도 곧바로 평양형무소에 수용됐다 얼마 뒤 인천을 거쳐 거제도로 후송된다.


인천에서 거제도까지 가는 기나긴 항해 동안 배안은 그야말로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부상자들의 상처에서 피고름이 흐르고, 사람들의 배설물과 토한 자국과 구더기가 득실거리고, 도중에 죽으면 바다에 내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 악명 높은 거제도 포로 소용소로 가는 첫 관문에 지나지 않았다.  


포개지 않고서는 잘 수 없을 만큼 비좁은 천막과 여기저기 방치된 오물은 말을 할 수가 없었고 그 와중에도 수용소 안에서는 파벌과 계급, 서열은 하나의 왕국이 형성된다. 이 작은 왕국의 주도권은 주로 전쟁터에서 포로가 된 골수 인민군 장교들이었고, 이들은 곧 민간인 반공 포로가 주류를 이루는 남한 출신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횡포가 자행되었다고 한다. 의복과 급식을 중간에 빼돌리는 건 물론이고 눈 밖에 난 포로들을 외진 곳으로 끌고 가 집단 폭행하거나 살해당하는 일도 자주 벌어졌고 한다.


고은은 <1950년대>란 책에서, 밤에 변소에 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은 우익 포로도 적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그것은 적색분자가 그들을 변소에서 처치했기 때문이다. 변소라고 하지만 큰 웅덩이에 널판을 걸어 놓았을 뿐이다. 언제라도 그냥 밀어버리면 그대로 오물 속에서 익사한다. 실족으로 익사했다고 변명하면 그만이다. 나중에 변소 수거 때마다 시체가 몇 구씩 발견되지만 그것은 휘발유로 변소의 밑바닥을 태울 때 함께 태워 버리면 그만이다. 장용학의 <요한 시집>은 바로 이 거제도 수용소를 무대로 삼고 있다. 아침에 변소에 가보면 오물 위로 손이 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그것은 어젯밤에 죽은 우익 포로의 손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포로들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건 미군이지만 정작 이런 만행을 잘 모르거나 알아도 못 본 척 중립적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김수영은 그곳에서 고난에 찬 나날을 보내다가 영어를 잘해 수용소에서 미국인 외과 병원 원장의 통역으로 일하면서 좀 다른 대우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좌익 포로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었지만 1952년 마침내 미군의 도움으로 그곳을 가까스로 빠져나와 숨어든 곳은 부산이었다. 그곳에서 박인환을 만나고 독신으로 지내던 이봉래의 집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 석방에 즈음해 친구들의 주선으로 도민증을 발급받고 비로소 떳떳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또한 (김)유정도 미군 부대 페인트공으로 일하다가 반공 포로 석방 때 풀려났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대해선 나도 얼핏 들어 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워낙에 잘 드러나지 않은 사건이라 잊고 있다 이 책에서 두 페이지 정도에 걸쳐 썼을 뿐인데도 이렇게 끔찍한데 실제로는 어땠을지 감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앞서 고은이 밝힌 장용학의 <요한 시집>이 이곳을 배경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실존주의를 표방한 그는 사르트르의 <구토>에서 자극을 받아 거제도 수용소 체험 수기를 읽고 그 작품을 썼다고 한다. 물론 작품 자체도 의미가 있겠지만 그것을 얼마나 현실성 있게 전달했을지 모르겠다. 난해하기로도 유명해 과연 순순히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쯤 되면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개정판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 책은 빅터 프랭크의 <죽음의 소용소에서>와 함께 르포겸 수용소 문학의 금자탑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떤가 본격적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다룬 책이 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 지면 없진 않았다. 김태일이 쓴 <거제도 포로수용소 비사>가 있다. 

 

그는 평양에서 출생하여 의과대학에 다니던 중 북한 인민군에 징집되어 군관학교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50년 10월 19일 미군의 평양 입성 시 미군에게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3년 동안 수용생활을 했다. 그 후 수용소 생활을 바탕으로 한국전쟁의 배경과 개요, 휴전회담에 대해 연구했다. 또한 그는 6.25 동란은 북한이 일으켰다는 증거와 미군의 참전 그리고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 등의 배경을 심층 취재하고, 미군 참전용사들의 자서전 등 많은 서적을 읽고 전쟁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거제도 포로수용소 내의 수많은 에피소드를 목격자로서 증언했다. 거기에 미군 포로들의 체험기 포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애석하게도 현재 절판이다. 출판 연도가 2011년으로 비교적 최근인데 세간의 관심도 받기 전에 벌써 절판이다. 그런 것을 보면 뭔가의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의 그러한 노력을 생각한다면 이건 어느 출판사에서라도 다시 복간해야 하지 않을까. 또 장용학의 <요한 시집>도 사정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것 역시 한 군데 출판사를 제외하고는 다 절판이다. 


그나마 두 권짜리 손영목의 <거제도>가 있는데 이 또한 소설이긴 하지만 읽을 수 있는 것 같다. 채만식 문학상을 타기도 했다. 이쯤 되면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우리나라 역사인데도 너무 홀대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우리가 솔제니친의 <포로 수용 군도>를 읽는 것도 좋지만 이런 책도 언제든 읽을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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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5 0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1-01-25 18:37   좋아요 1 | URL
직접 가 보셨군요.
저는 이렇게 부분적으로만 읽었는데도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니 직접 가보면 어떨지
감히 상상을 못하겠네요.ㅠ

cyrus 2021-01-25 10: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외국 문학에만 관심을 갖다 보니 국내 수용소 문학에 대해선 잘 몰랐어요. 누님의 글에 제가 알아야 할 정보가 있네요. 오랜만에 알라딘 서재의 ‘찜하기‘ 기능을 이용해봅니다. ^^

stella.K 2021-01-25 18:43   좋아요 2 | URL
보람있네.ㅋㅋ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당대 문인들이 있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관련 책을 찾으면서 <거제도 포로 수용소 비사>
벌써 절판이란 게 안타까워서 쓰기도 했어.
어느 출판사에서 복간을 하면 좋겠어.
남의 나라 수용소 문학도 좋지만 우리나라도 중요하잖아.

2021-01-25 2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6 1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7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7 1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ott 2021-02-10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댓글 예전에 썼는데 사라졌으요 ㅠ.ㅠ(북플을 믿지 말자 !!)
스텔라 케이님 이달의 당선작 ! 추카 !!
설연휴 가족들 모두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

stella.K 2021-02-10 18:41   좋아요 1 | URL
오, 좋은 소식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스캇님도 축하드립니다.
설 연휴 전날 이런 거 되면 웬지 보너스 받는 것 같고
기분 삼삼하죠? 마음도 넉넉해지는 것 같고.
스캇님도 설연휴 즐겁고 넉넉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