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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ㅣ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번도 안 읽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읽은 사람은 없다던 하루키의 책을 오랜만에 읽었다. 지금까지 드문드문 읽어도 몇 권 읽었다. 하루키 빠도 아니면서 읽게 되는 걸 보면 정말 하루키는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 하긴 그의 책은 제법 많고 명성도 있으니 아무래도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다.
본격 에세이를 읽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때 하루키가 인기를 끌면서 하루키 문체 또한 주목을 받았었다. 정말 누구라도 하루키를 따라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긴 한다. 결국 이것 때문에 그의 오리지널리티를 말하는 것 아닌가.
그를 두고도 장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가 보다. 누구는 단편이 좋다고 하고, 누구는 장편이라고 하고, 누구는 에세이라고도 한다. 이쯤 되면 이 사람을 두고 장르를 말한다는 게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저 독자로서 즐기는 게 서로 다를 뿐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오죽하면 그의 독자들을 가리켜 하루키 안이라고 하겠는가. 그래도 굳이 말하라면 난 에세이가 좋고 단편이 좋은 것 같다. 장편은 분량이 만만치 않아 늘 읽기에 실패한다. 그놈의 <1Q84>도 1권만 두 번씩 읽고, 2권을 3분의 1쯤 읽었던 것 같고, 3권은 아예 손도 못되고 있다. 하루키가 다시 좋아지면 모를까 앞으로 계속 내 방 어딘가에 나만 째려볼 것 같다. 이럴 것 같으면 나를 왜 샀냐고 절규하는 것 같다. 나도 이럴 줄은 몰랐다.
그래도 아주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 책을 몇 년 전에 사긴 했다. 그런데 몇 년이 흘러도 안 읽고 있기에 나완 인연이 없는가 보다고 중고샵에 미련 없이 팔았다. 그리고 다시 몇 년 만에 이렇게 중고샵에서 다시 건져 와 읽은 걸 보면 언제고 <1Q84>도 완독 하지 않을까. 사람의 마음은 갈대다. 책은 워낙에 많아서 어떤 책은 멀어지다가도 또 어느 순간 가까워진다.
솔직히 같은 책을 다시 사니 좀 한심하긴 했다. 이렇게 다시 읽을 거면서 그땐 왜 팔았을까 싶다. 책 중독 테스트 중 같은 책을 두 번 산적이 있다는 항목이 있던데 나는 절대로 이 항목엔 해당 사항이 없을 줄 알았다. 뭐 그것도 독자의 권리라면 권리일 것이다.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는다는 건 약간 김 빠진 맥주를 마시는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기는 하다. 그의 삶 자체가 딱히 극적이고 실험 정신으로 무장돼 있고, 모험 가득하고 뭐 그런 건 아니지 않나. 또한 그의 사진을 본 사람은 알 것이나 그 특유의 무표정. 기껏 표정을 짓는다면 떨떠름함 정도가 전부다. 그나마 노년이 되니 조금은 멋있고 표정이 유해진 느낌도 든다. (나만 이러나?) 게다가 그의 일상은 어떠한가, 매일 조깅을 한다고 그러지. 잠은 밤 9 신지 10시쯤에 자고 새벽 5시면 일어난다고 하지. 글은 그 사람을 닮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그의 에세이를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이미 그의 명성이 그렇게 할 수도 없겠지만 실제로도 그 안에 유머와 위트가 있다. 무심한 듯 시크해도 예리한 관찰력이 있다. 그것 없이는 특유의 유머와 위트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그의 에세이도 오리지널스럽긴 하다. 모든 에세이는 하루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하지 않았을까. 그도 그럴 것이 산문은 자유롭게 마음 가는 대로 쓰는 거라고 하지만 단서가 있다. 정제되었다는 것. 하지만 이 둘은 엄밀한 의미에서 조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화면 조화고, 자유면 자유다. 많은 작가들이 산문을 쓸 때 전자 보단 후자에 방점을 찍고 있지 않을까. 그래야 공감을 얻고 뭔가 글의 품위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하루키는 자유롭게 쓴다. 그리고 독자들은 그의 글을 선택한다. 기존에 점잖게 글을 썼던 작가는 좀 당황하지 않았을까? 뭐야?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이렇게 쓸 걸. 내가 한 편의 에세이를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아무도 모를 거야. 흐흑. 그러면서 어쩌면 하루키는 작가들 내에서는 공공의 적이 돼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리지널리티를 이뤄낸 사람의 비애쯤이라고 해 두자. (내가 지금 뭐라는 거니?)
어쨌든 글은 그 사람을 닮는 법이다. 잔뜩 기대를 하고 읽으면 김이 빠지기 시작한 맥주 같기도 하지만 또 좋게 말하면 그가 재즈를 좋아해선지 재즈의 자유분방함을 닮은 것도 같다. 사실 산문은 그 정제된 문장 때문에 뭔가 밑줄 그을 부분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루키의 글도 밑줄 긋고 싶은 부분이 아주 없는 것 아니지만 그냥 넘어가도 크게 나쁘지 않다. 어쩌면 그게 하루키 인지도 모른다. 하루키는 처음 글을 쓸 때부터 독자를 의식하고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독자를 의식했다면 이렇게 오래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신문 연재를 그렇게 싫어했다면서 이 책은 무려 5년간 모 신문에 연재했던 글을 모은 거라고 한다. 하루키는 거짓말쟁이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80년대 중반에 쓴 글들이다. 작가로 입문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고 전업을 진지하게 생각했거나 막 했을 때였을 것이다. 기회가 왔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겠지.
그의 일화 가운데 한때 재즈 바를 운영하면서 밤에 글을 쓴 것으로 유명한데 그럼 가난하게 살진 않았겠지 싶지만 그도 가난한 때가 있었다. 그게 이 책 맨 마지막 장 '가난은 어디로 가버렸나?'에 나온다. 어찌나 그리도 시크하면서도 명랑하게 쓰고 있는지. 우린 가난을 경제적인 관점보다 문학적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잠시 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건 그의 유명한 단편소설 '치즈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을 쓰게 만들었겠구나 생각했다. 거기선 가난을 얼마나 낭만적으로 그랬던지. 난 여기서부터 하루키가 좋아지기 시작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