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소설 조선왕조실록 12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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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바람이 무섭다고, 이제야 김탁환에 빠져 지내는 요즘이다. 오래전 <노서아 가비>를 읽을 때만 해도 싫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좋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역시 책이란 언제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나 의미가 다른 것 같다. 지금도 역사에 크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나이가 드는지 역사 소설이 가끔 당기기도 한다. 특히 이 책은 내가 관심 있어하는 글 쓰기 그것도 소설에 관한 성찰과 물음을 하고 있다.    


글 쓰기에 관한 책이야 지금도 여전히 인기 있는 종목이긴 하지만 주로 자기 계발서나 에세이 또는 전기류로 많이 나오지 소설로 나오기는 드문 것 같다. 김탁환 작가는 아주 능숙한 솜씨로 소설이란 장르에 그것을 담아냈다. 그것도 서포 김만중의 작품을 모티브로 했다. 조선 시대 고문학이 그의 전공이고 보면 그도 그럴 수 있겠다 싶다. 그런데 (다른 나라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는 역사 소설가들에 대해 조금은 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김탁환 작가도 대중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평단의 평가는 그렇게 높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소설가라기 보단 스토리텔러라는 약간의 비아냥. 


물론 순수 문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장르로 보자면 별로 맞지 않아 보인다. 요즘 순수 문학이 그렇게 환영받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자세는 문학을 너무 작게 보는 시도는 아닐까 싶다. 역사 자체가 스토리텔링이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얼마든지 상상이 가능한 것이 역사 소설이다. 하지만 이만큼 잘 쓰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눈에 보이는 듯하고, 손에 잡히는 듯하다. 왜 독자들이 김탁환, 김탁환 하는지 알 것 같다. 좋은 작가는 독자가 먼저 알아보는 법이다. 고맙지 않은가. 김탁환 같은 역사 소설가 (그는 현대물도 쓰지만)를 통해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이. 그것은 또 '제탁 월드'를 구축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서포 김만중의 <사 씨 남정기>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더 정확히는 서포 김만중과 희빈 장 씨와 작중화자라 할 수 있는 모독에 관한 이야기다. 짐작하겠지만 모독은 실제 인물이 아니다. 작품을 위해 가공한 인물이고 그것은 김탁환 작가의 페르소나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꼭 같지는 않아도 그와 비슷한 이름이 그 시대에 흔히 불려졌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 시절 양반들이나 성에 이름을 붙였지 보통의 사람은 예명인지 별명인지 본명 인지도 모를 이름으로 불려졌을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모독도 그리 신분이 높은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모독의 직업은 매설가. 조선시대엔 소설가를 그렇게 불렀나 보다. 물론 이 한 작품으로 조선시대 매설가를 다 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사람이었을까 알고 싶어 진다. 모르긴 해도 그들은 그 시대 의원이나 예인들처럼 중인 이상의 신분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재담가, 이야기꾼으로도 불렸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직업이 쉽지 않은 것처럼 매설가가 되는 것도 역시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조선 팔도의 있는 책, 없는 책을 다 주워 읽는 것도 모자라 대국의 책까지도 두루 섭렵했다고 한다. 오늘날 남의 나라 소설을 읽는 게 뭐 그리 어려울까만 당시론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 시대에 매설가의 권위는 거의 절대적이지 않았을까. 그때는 매설가가 아니면 양반이고 평민이고 어디서 이야기를 접하겠는가. 그 시대 작가와 독자들은 아직 문명의 이기를 경험하기 전이었을 것이다. 문득 그렇다면 문명의 이기 앞에 소설가들은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라디오가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 소설가들은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을 거라고 불안해하지 않았을까.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을지도 모른다. 라디오에서 성우를 내세워 이야기를 들려주니 비로소 이야기가 재밌다는 걸 알았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소설을 더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극장이 생기면서 소설가들은 그때야 불안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활동사진이란 것이 큰 스크린에서 현란하게 움직이는데 자기네들도 빨려 들어가겠는데 영화를 보지 무슨 소설을 읽겠냐며 이제 소설의 시대는 종말을 고할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건 라디오 쟁이들도 마찬가지다. 극장이 생겼는데 무슨  라디오 극장 같은 것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게다가 TV가 등장하기까지 했다. 그것의 등장 때문에 라디오는 물론 극장의 인기도 예전 같지 않아 졌다. 이쯤 되면 소설가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론은 그 모든 것들은 약화되었을지 모르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심지어 오늘날 SNS와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시대인데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 시대 매설가들의 인기와 자부심은 상상을 초월했을지도 모른다. 가히 제왕은 아니었을까. 그러니 오늘날 '제탁 월드'처럼 누구누구의 월드는 이미 그 시대에부터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재미만 보장이 된다면 세책방에 내놓으면 되는 일이다. 서로 간에 질투와 경쟁은 있을지 몰라도 오늘날처럼 문명의 이기 때문에 약화를 경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오늘날 문학판의 복잡한 카르텔의 문제도 없지 않았을까. 글 쓰는 게 권력이 되고 누군가의 비호를 받아야 한다니. 상업주의를 견제하고 문학의 권위를 높인다는 명분을 내세울지 모르겠지만 작가는 독자를 즐겁게 해 줄 의무가 있고 그런 점에서 소설가를 포함한 모든 스토리텔러들이야 말로 가장 대중적이야 하고 상업적이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역설을 주장하고 싶어 진다.


물론 현대의 모든 작가들이 카르텔에 편승하지는 않는다. 어떤 작가는 누가 무슨 상을 받고 누구에게로부터 사사를 받았는지와 상관없이 하이틴 로맨스 같은 B급 소설을 쓰는 작가들도 있다. 또한 그런 책을 내주는 출판사와 서점이 있고 읽어주는 독자들이 있다. 그게 꼭 의미 없는 독서라고 어떻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책들 중 당대엔 B급으로 취급받던 책도 있다. 이 B급이라는 것도 요즘에나 정의 내린 거지 당대엔 굳이 그런 구분이 필요 없지 않았을까. 저잣거리에 떠도는 이야기가 가장 그 시대를 대변해 주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의 B급이라고 말하는 마이너 한 형태가 그 시대엔 가장 보편적 형태는 아니었을까 감히 상상해 본다. 또 그런 점에서 지금의 서점은 아직 공평한 것 같기도 한다. 매대의 구조를 생각하면 그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서점은 돈 되고 고급 취향만을 취급하지는 않는다. 온갖 잡다한 책들을 다 구비해 놓고 있지 않은가.      


김탁환 작가는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서포 김만중을 통해 답을 얻으려 했을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매설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하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질문은 꽤 오래전부터 있어 오지 않았을까.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서포 김만중도 소설을 썼지만 그를 두고는 매설가라기 보단 문필가라고 했을 것이다. 그는 대사헌까지 지냈던 것을 보면 학식이 남달랐을 것이다. 그가 문필가로서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서는 모독과의 대비를 보면 짐작이 가기도 한다. 매설가는 그냥 이야기를 팔아먹고사는 존재일 뿐이다. 결국 매설은 양반도 쓸 수 있는 거지만 그런 문필가를 통해 그 격을 한층 높이지 않았을까.


서포 김만중이 <사씨남정기>는 희빈 장 씨를 겨냥해서 쓴 작품이다. 임금의 성은으로 희빈이 된 것도 부족해 황후의 자리를 넘보지 않았던가. 그것이 얼마나 인륜을 거스르는 파렴치한 짓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 썼다. 물론 오늘날 장희빈에 대해선 다른 해석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선이 유교 사회이고 보면 지식인이었던 김만중이 그런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조정이란 곳은 온갖 거짓과 술수가 난무한 곳이고 보면 일일이 상대하여 싸우는 건 피곤하지만 이걸 소설로 쓴다면 글감은 넘쳐났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김만중이 누군가를 겨냥한 소설을 써도 되는지다.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는 글을 써도 쓸 것이 많을 텐데 굳이 그런 글을 쓰는 건 그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람을 위험에 빠트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당장 그 책은 오늘 날로 말하면 불온서적으로 읽거나 소지하는 것만으로 참극을 면치 못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도 책의 존재를 말살하기 위해 분서를 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과연 그렇게 하면서까지 자신의 책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세상을 바로 잡으려는 지식인의 양심 때문었을 것이다. 또 매설만큼 사람과 시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르가 또 있을까.   


본노가 없이는 글을 쓸 수 없고, 스스로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면 작가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작가가 있다. 분노 거기엔 반드시 분노를 유발하게 만드는 부조리한 인물과 상황이 있고 그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싸우는 건 작가의 일이 아니다. 작가는 오직 글로만 싸울 수 있다. 그러므로 글은 그들의 무기다. 그건 결코 행복한 일은 아닐 것이다. 행복한 글을 쓰므로 독자도 행복하고 작가도 행복하면 좋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세상은 고대로부터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두 세계의 작가는 있을 수 있지만 김탁환 작가는 이것을 굳이 나누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작가의 딜레마는 거기에 있는 것 같다. 자신도 완벽하지 못하면서 누군가를 고발하고 훈계 아닌 훈계해야 하는 존재.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전지적 시점을 견제해야 하는 작가의 맹점 때문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보통의 매설가 모독은 자신을 모독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속죄하고 위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모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독이 맞다. 솔직히 왜 하고 많은 이름 중에 모독일까 조금은 불편했다. 작가 후기를 읽으니 김탁환 작가는 자신을 지독한 자기 모독적 존재라고 했다. 그래서 모독이란 이름을 쓰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고. 무엇이 그토록 스스로를 모독하게 만드는 것일까. 자존감을 가져라. 자기를 사랑하라. 이기적이 되라고 부추기는 시대가 아닌가. 하긴 그는 세월호 침몰 당시 너무 괴로워 앓아누울 정도였다고 했다. 그리고 소설 <목격자>에서 침몰하는 조운선에 죽어가는 사람의 이름에 자신의 한자 이름인 '제탁'을 끼워 넣음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고 했다. 침몰하는 세월호를 보면서 자신이 살아 있음이 한없이 부끄러워서. 책에서도 보라. 모독의 정인이 자신을 완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자신을 속이고 이용하려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무라기보단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려 하지 않던가. 이 또한 어쩌면 자기를 모독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새삼 소설가란 그렇게 자기 자신을 모독해야 쓸 수 있는 존재인가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책을 읽으니 부쩍 김만중의 <구운몽>과 <사씨남정기>가 읽고 싶어 졌다.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한 번쯤은 들어봤지만 감히 읽을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국어 강의를 들어도 언급된 책을 읽을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는 건 그럴 수도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잘못된 것인가 알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린 김탁환 작가에게 어느 정도의 빚을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아니면 어디서 우리나라 고전에 대해 읽어 볼 생각이라도 해 보겠는가. 앞으로도 내가 읽을 그의 책이 몇 권은 더 남아 있다는 게 나로 하여금 뭔가의 기대와 행복감을 갖게 만든다. 내친김에 우리 고전도 관심을 갖고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뒤에 그가 참고한 자료 목록이 나오는데 과연 그는 자료 벌레고 아무나 역사 소설 쓰는 게 아니구나 싶다. 작가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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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1-27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시대 한글로 쓰여진 문학 정말정말 좋아하는데 특히 구운몽 사씨남정기는 스토리 구성 재미가 뛰어난 고전이죠.
stella k님 페이퍼를 읽으니 다시 읽고 싶어졌네요.

김탁환은 리심, 노서아 가비 정도만 읽어봤는데,,,,
이렇게 한국적인 소재 한국 전통문학을 토대로 한 작품을 써내는 것만으로도 칭찬해줘야 할것 같아요.
옆나라 일본은 헤이케, 겐지 이야기, 괴담류 모노가타리 형식에 일본 전통 고전을 현대 작가들이 끊임없이 활용하고 이어가고 있는데 ,,,

stella.K 2020-11-28 16:13   좋아요 0 | URL
스콧님은 어떤 면에선 성향이 약간 비슷한 것 같네요.
하루키도 그렇고, 저도 노서아 가비 별로라서
리심도 있었는데 안 읽었어요. 마침 전 신경숙판으로
읽었던지라 김탁환까지 읽는 게 별로 안 땡기더라구요.
이 책이나 방각본 살인사건인가 백탑파 시리즈 1권부터 읽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더군요. 백탑파에 이덕무나 박지원 같은
조선의 걸출한 문인들이 나오잖아요.
그냥 무협 소설류 같아서 별로 관심도 없었습니다.

근데 스콧님은 도대체 안 읽은 책이 뭔가요?
여긴 독서 고수들이 많은데 스콧님도 예외는 아니신 것 같습니다.;;

페크(pek0501) 2020-11-29 10: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선 맘에 드는 작가가 생긴 거 축하드려요. 유익하고 기쁜 일이죠.
옛날엔 화가도 얕보고 환쟁이, 라고 했잖아요. 지금의 예술가 위치와 많이 달랐죠.
역사 소설을 쓴다고 해서 폄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그런 글을 써야 독자들이 쉽게 역사에 접할 수 있을 것 같아 저는 긍정적으로 봅니다. 누군가는 칼럼도 얕보더라고요. 소설 밑이라는 거죠. 게다가 문학이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우회해서 상황으로 보여 주는 소설이 있는 반면 메시지를 바로 직선으로 날리는 칼럼도 있어야 한다고 봐요. 짧은 글로 메시지를 읽어야 하는 것도 필요하거든요. 매번 메시지를 소설을 다 읽어야만 알 수 있다면 피로하죠. 신문에 칼럼이 많은 이유죠.

평론가들이란 소설가가 되고 싶었으나 그게 안 되니깐 평론가가 된 거라는 말이 있어요. 이게 맞는 경우가 있기도 하겠지만 누군가는 평론가가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평론을 쓰는 사람도 필요하니까요. 댓글이 길어졌어요. 이만 스톱...ㅋ

stella.K 2020-11-29 18:46   좋아요 2 | URL
그러니까요. 우린 좀 글을 포괄적으로 넓게 볼 필요가 있는데
너무 시야가 닫혀 있어요. 이건 좋고 저건 별로다란 인식이
필요없는 것 같은데. 옛날이나 어떨지 몰라도 요즘 칼럼 우습게 보면
안 되는데 말이어요.

평론가에 대해선 그런 말이 있긴하죠.
조선 시대 땐 세책방마다 평론가에 해당하는
쥐영감이 있었나 봐요. 뭐 평론가라기 보다
이 책을 팔아도 될지 안 될지 감별사 노릇을 했나 봅니다.
재밌죠?^^

레삭매냐 2020-12-02 19: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적해 주신 대로 순수문학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본질은 매설가라는 생각이
드네요.

김탁환 작가는 오래 전 책 읽기 시작하던
시절에 자주 만났더랬는데...
<노서아 가비>를 마지막으로 끊었나
봅니다.

stella.K 2020-12-02 19:29   좋아요 1 | URL
그래도 주요 작품들은 다 읽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됐죠.
전 솔직히 어느 작가가 막 좋다가도 어느 순간
권태로워질까 봐 그게 좀 불안하더군요.
전 김훈 작가가 여전히 좋긴한데 어느 순간 잘 안 읽게되더군요.
싫어서라기 보단 여지를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그래야 좋아하는 게 오래도록 유지될 것 같다는 변명 아닌 변명 같은 변명을...
김탁환은 워낙에 써 놓은 책이 많아서 오래 좋아할 것 같습니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