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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의 원고지 - 어느 예술노동자의 황홀한 분투기, 2000~2010 창작일기
김탁환 지음 / 황소자리 / 2011년 11월
평점 :
다시, 돌아왔다. 다시, 쓰는 수밖에 없다. -321p'
그런 말이 있다. 작가가 되려면 글을 잘 쓰려고 하지 말고 어느 한 분야에 도통한 사람이 되라고. 다소 의아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이 말을 가장 잘 증명해 낸 작가로 김탁환 작가만 한 사람이 있을까.
그가 작가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때가 언제였을까?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쯤은 아니었을까. 그때 나는 그가 어떤 작가가 될지 알지 못했다. 한때는 열심히 작품을 내다 소리 소문 없이 독자에게서 멀어져 간 작가도 많으니 그도 그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이름 하나가 특이해서 잘 잊히지는 않겠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시쳇말로 그의 책을 한 권도 안 읽은 사람은 있어도 한 권만 읽은 사람은 없다 할 정도로 유명을 넘어 대작가 되었다. 나 역시도 그의 책을 몇 권 읽었을 것이다. 알다시피 그는 조선을 쓰고 있다. 물론 현대물도 쓰고 다른 여타 장르의 글도 쓰지만 그는 조선 전문 역사 소설가라고 해야 가장 이해가 빠르지 않을까. 백탑파니 방각본이니 하는 말도 그가 아니면 평생 알지도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니 몇 년 전 그를 독자와의 만남에서 본 기억이 난다. 익숙히 보아 온 사진과 달리 턱에 난 거뭇한 수염을 제외하면 그는 의외로 소담하고 조근조근한 스타일이었다. 그는 일생동안 조선에 관한 책을 60권 쓰겠다고 했다. 그때는 그가 <목격자들>이란 책을 30, 31번째로 내놓고 작업의 반환점을 기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조금은 부러웠다. 자기 분야가 확실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게 뭔가의 자신감을 숨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도 그렇지만 그는 정말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 작품을 탈고하면 바로 다음 날 새로운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고 하니 말이다. 대단하다 싶었다. 나 같았으면 탈고했으니 한 일주일 적어도 3, 4일은 쉬어도 좋을 것 같은데 말이다.
이 책은 작가의 지난 2000년에서 2010년까지 기록한 창작 일기다.
일기만큼 사람의 관음증을 만족시켜주는 장르가 또 있을까. 나는 읽자마자 금세 빠져들었다. 왜 이 책을 이제야 읽었을까. 이 책이 막 발간될 때만 해도 비슷한 시기에 발간된 책들 중 단연 읽고 싶은 책으로 특 A 였는데 말이다. 솔직히 난 그때만 해도 이 작가를 완전히 좋아하지 못했다. 그러니 자꾸 다른 책이 끼어드는 바람에 이내 잊혔다. 변명은 또 있다. 역사 소설을 좋아하지 않은 때문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좀 그렇지만 한때는 사극의 열풍이 거셌던 때가 있었다. 그러면 꼭 그 사극의 배경은 조선 시대다. 그것도 당파 간의 싸움과 임금의 여자들의 알력 다툼으로만 모아지는 구조. 그래서 끝까지 본 드라마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니 그의 작품을 생각할 때 왜 하필 조선 시댈까 할 뿐이다. 확실히 사극은 양날의 칼이다. 사극을 통해 역사에 더 가까이 가던가 멀어지던가. 하지만 무엇이 중하단 말인가.
작가만큼 아름답고도 신비한 존재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주관이다. 작가는 인간적으로 부족하고 나약하고 독특한 면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전지적 시점을 견지할 수 있다고 신의 전지전능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격적으로 완벽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자꾸 그들의 삶을 엿보고 싶고 그들을 알고 싶어 진다. 무엇보다 난 그들이 치열하게 쓰는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김탁환 작가는 글만 쓰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기도 한다. 그런 사람이 김탁환 작가만 있는 것은 아닐진대 업계(?)에서는 또 그런 작가를 특별히 반기진 않는가 보다. 가르치는 건 호구지책인 경우가 많으니까. 그는 그런 소리 듣지 않으려고 이 두 가지에 최선을 다한다. 인간은 원래 한 가지도 안 하는 게 문제지 닥치면 두 개, 세 가지 일도 해낸다.
그렇더라도 그는 언제 가르치고 언제 글을 쓸까 그저 놀랍기만 하다. 또 그 바쁜 중에도 짬짬이 전시회도 다니고, 영화도 보며 그때그때의 소회를 적기도 한다. 그뿐인가 작업실이 두 갠가 세 곳쯤 되는데 1, 2년마다 한 번씩 두 개를 하나로 합치거나 이사를 하기도 한다. 이사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못할 일 수위에 드는 일이 바로 이사하는 일이다. 책이 오죽 많을까. 소설 쓸 자료들을 모으느라 책이라면 질릴 만도 할 텐데 어떤 이유와 어떤 경로로 책을 손에 넣건 그 책을 읽을 욕심에 그의 헤벌쭉한 미소가 보이는 듯하다. 물론 그 책들에 대한 간단 리뷰도 빠지지 않는다. 또한 40을 넘긴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입을 앞둔 고3 학생 이상으로 공부를 하기도 한다.
다른 일도 그렇지만 글을 쓰는 사람에겐 체력이 관건이다. 그래서 하루키는 마라토너를 자청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작가가 마라토너가 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책엔 작가의 건강 관리법에 대해선 특별히 나와있지 않다. 그저 아프면 모든 일을 작파하고 한 번씩 호되게 앓고 일어나는 게 전부다. 그래서 그는 아픈 때를 생각해서 쉬지 않고 글을 썼던 것일까. 아님 그 안에 있는 뭔가의 힘이 그렇게 몰아붙이는 걸까. 라틴어 격언에 그런 말이 있다고 한다. "나는 나를 일에 매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내게 매이게 하려고 애쓴다." 아마도 그도 그러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정작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새 작품을 쓰는 것이 아니라 퇴고다. 퇴고에 대해서 그는 굉장히 섬세한 작업이라고 했다. 하루라도 쉬면 표가 나며 빨리 정상궤도로 돌아가야 한다며, 밤을 새우고 호흡을 되찾아 급해질까 봐 천천히를 스스로에게 주문한다. 그리고 퇴고에 관한 글은 책 여기저기에 빈번히 나타난다. 새 책을 쓰기 위해 부지런을 떨었던 것이 아니라 퇴고하기 위해 글을 썼던 것이다. 작가의 지난한 작업이 종이를 뚫고 전해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의 일기 끝자락에 이런 말을 남겼나 보다. 하나가 완성되면, 또 다른 미완성으로 가는 것! 그게 바로 작가의 운명이라고. 이쯤 되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누가 생각이 난다. 그렇다. 시지프스. 세상을 사는 사람 치고 시지프스의 후예가 아닌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시지프스의 후예이기에 시지프스의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내하는 사람 그가 김탁환이고, 세상의 모든 작가다. 누구는 퇴고로 밤을 새우지만 누구는 이 수고를 감당할 수 없어 대신 이 책을 읽고 있나 보다.
나는 작가가 외롭고 고독하게 혼자 글만 쓴다는 것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이 글을 쓰는 것도 알고 보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에게 뭔가의 재능이 있다는 건 세상과 소통하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그는 그런 말을 한다.
...... 이은미의 노래와 말을 많이 생각하는 요즘이다. 적어도 그녀는 이쁘게 노래하는 단계에서 벗어났다. 나는 안다. 그 예쁜 단계를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가를. 나 역시 미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아직까지 몸부림치고 있다. 물론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 때문에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된다. 나는 아름답게 쓰지 않고 정확하게 쓰고 싶다. 그 길은? 일단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 그래서 그것을 만들어낸 앞뒤 문맥을 모두 파악한 상태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 그러나 나는 또 정확하다는 것이 그런 공부를 넘어선다는 것도 안다.(45p)
미문만이 최고의 문장이라고 생각했던 우리에게 뭔가 뒤통수를 때리는 말 같다. 우린 왜 미문을 최고의 문장인 양 알고 살아왔던 것일까. 나도 동의한다. 이은미는 정말 예쁘게 노래하는 가수는 아니다. 마치 어느 흑인 가수가 노래 부르는 듯하다. 흑인들이 언제 예쁘게 노래 부르는 것 봤나? (물론 역으로 예쁘게 부르는 흑인도 있긴 한다.) 하지만 누가 감히 그들의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고 밉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예쁜 모습을 포기하고 영혼을 다해 노래를 부른다. 이은미도 그렇다. 나는 어떨까. 나의 문장 하나가 어느 독자에게 와 닿았으면 그래서 글 잘 쓴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TV 드라마 작가 중에 시나 독백을 하듯이 대사를 쓰는 작가들이 있다. 얼핏 굉장한 능력처럼 보이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채널을 돌리곤 한다. 저건 드라마가 아니다. 아무리 드라마라고 하지만 일상에서 저렇게 대사 하지 않는다. 배우가 저런 대사를 하는 건 그 배우를 통해 작가를 드러내겠다는 속셈인데 드라마에서 작가가 드러나는 건 그 드라마의 실패를 의미한다. 드라마는 오직 주제와 상황과 캐릭터로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탁환 작가의 저 말은 맞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예쁘게 쓰기 전에 먼저 정확하게 쓸 수 있어야 한다. 글로써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사람은 명심해 둬야 할 것 같다.
그런 그가 어느 날의 일기에 40의 나이에 고별 무대를 갖는 어느 발레리나와의 대화를 적기도 했다. 그 발레리나는 그에게 소설가가 부럽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했더니 발레리나는 40이면 은퇴를 하지만 소설가는 늙어서도 계속 이야기를 만들지 않냐고. 그러자 그는 늙어서까지 진짜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는 아주아주 드물다고 했다. 오히려 마흔 살도 되기 전에 이야기와 이별을 고하는 소설가도 적지 않다고. 정말......? 순간 내 나이를 생각하고 뜨끔했다. 아무래도 이번 생에선 소설은 못 쓰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난 '아직' 이야기를 시작도 하지 않았다. 늦게 시작해서 늦게 마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니까 소설을 쓰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 작가는 자신이 절필하지 않는 이상 은퇴도 없다. 소설가 중에 절필은 선언해도 은퇴를 선언하는 작가는 있는가? 그는 그저 조용히 사라져 갈 뿐이다. 그러니 김탁환 작가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아직 시작하지 않은 작가가 있다면 더 늦기 전에 시작하라.
이 책을 읽으니 비로소 이 작가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 생겼다. 김탁환 다시, 돌아왔는가? 다시, 쓰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다시, 그의 책을 읽어야겠다. 그의 책 모두를 읽지는 못하겠지만 중요하게 읽고 싶은 책은 목록을 추려서 다시 읽어가야겠다.
그런데 이상하지? 이 책을 읽는 동안은 나도 덩달아 일기를 비교적 충실하게 썼던 것 같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다시 옛날로 돌아가 아주 드문 드문 쓰고 있다. 남의 일기를 읽는다는 건 그런 것 같다. 나도 덩달아 쓰고 싶게 만드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