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구들이랑 만나서  영화를 봤다. 저녁에 듣는 강의가 있어 시간을 맘대로 조절할 수 없으니 그 시간대에 만만하게 볼만한 영화가 <천년학> 뿐이 없었던지라, 그것으로 결정하는데는 별로 망설임은 없었다. 딱히 임권택 감독을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아닌지라 그의 100번째 영화를 선택했다고 후회될 것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집에서 영화를 볼 땐 꼭 굳이 팝콘이 필요했던 것은 아닌데, 왜 극장 같은데 오면 팝콘과 콜라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어쨌거나 셋이 먹기에도 버거운 한 상자의 팝콘과 콜라를  샀다. 그런데 팝콘 파는 청년이 재밌다. 간, 쓸개 다 빼놓은 사람처럼 약간은 원맨쇼적인 태도로 손님을 대한다. "오~ 안녕하세요? 무슨 영화를 보시나요? 300?" "아뇨. 천년학요." "오, 천년학! 임권택 감독. 쥑이죠. 세분의 아가씨들 너무 아름다우세요." 우린 순간 뻘쭘해졌다. '그러면 우리가 좋아할 줄 알았지? 네 눈엔 우리가 아가씨로 보이냐?' 하기야 아줌마라고 부를 순 없겠지. 아가씨라고 하기엔 뭐하고 그렇다고 아줌마라고 부르기도 뭐한 이 중간에 낀 세대를 뭐라고 부르면 좋단 말인가? 그래도 이 청년, 그 뻘쭘한 순간들을 잘도 넘긴다. "제가 실수했나요? 그렇다면 죄송합니다." '뭐 죄송할 것 까지야 없고.  좀 어색하기야 하다만 그래도 손님을 최선을 다해 섬기려고 하는 자세를 우리가 몰라 볼 수야 없잖니.' 기왕이면 기를 더 좀 세게 넣어 봤으면 좋겠다. 누가 아는가? 방송국에 갈 일 생길지...

영화는 서편제를 봤다면 그다지 새롭진 않아 보였다. 서편제의 새로운 버전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임권택은 역시 능수능란하다. 조금은 지루할 것이라고 했던 말도 있었는데, 그다지 지루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지극히 한국적인 것에 천착하는 그의 정신이 마음에 든다. 하지만 여기서 빛났던 건 임권택이란 감독보단 정일성이란 촬영감독의 빼어난 영상이 더 빛을 바랬던 건 아닐까?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의 조우는 단연 환상의 팀플레이를 자랑한다.

선학동이란 지명이 과연 지도상에도 존재할까? 학이 날개를 피는 모양을 한 작은 섬(?)이 있다하여 선학동이란다. 기회만 닿으면 거길 찾아가 보고도 싶다.

소리꾼 양아버지를 둔 동호(조재현)과 그의 누나 송화(오정해). 이들 남매도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 만나 누나가 되고, 동생이 되었다. 동호가 자라면서 양아버지에게 반항하고 송화 누나에게 연정을 품으나 누나라는 명분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이 이 영화의 포인트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부자라고 하는 한약을 먹은 탓에 송화의 눈이 멀게되고 그것이 양아버지가 송화가 여자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영원히 당신의 여자로 만들기 위한 속셈이라고 말하다, 아버지의 친구인 붓글씨 써 주는 노인에게 뺨따귀를 후려 맞는다. 어찌보면 외디푸스 컴플렉스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나는 속으로, '그래. 넌 맞아도 싸고, 할아버지는 잘 후려쳤소!' 잠깐이긴 하지만 시원하다.

영화에 대해서는 전반을 다 다룰 수는 없고, 내가 속으로 그렇게 쾌재를 올렸던 건 이 영화에만 국한해서는 아니었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했던 건, 그 놈의 소위 말하는 '야한 장면' 내지는 '살과 살이 맞다가 으깨지는 장면'이 안 나온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것을 가감없이 들어냈던 게 임권택의 영화라고 볼 수가 있는데 그 관음증을 이 영화에서는 가차없이 들어냈다. 물론 영화배우 오승은이 동화를 유혹하는 여자로 나와 조재현이를 눕히기는 하다만 영화는 그 장면에서 여지없이 "컷"을 했다.

지금까지 남녀간의 사랑을 다루는데 있어서 카메라는 인간의 관음증을 증폭시켜왔다. 영화가 아닌 일상에서 남녀가 같은 공간안에 있다고 다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아닐텐데, 카메라는 항상 인간의 구석을 훑다보니 인간의 의식을 바꿔 놓은 듯 싶기도 하다. 그래서 같은 공간 안에 있어도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은 아닐까? 아니 에로스적인 사랑만이 사랑의 전부 다인 것처럼 몰아갔다. 그러다 보니 플라토닉한 사랑도 사랑이냐라는 반문까지 나올 지경이다. 

에로스적인 사랑만이 사랑의 전부겠는가? 인간이 에로스에 탐닉해서 오르가즘에 도달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얼마일 것 같은가? 그런 것에 비하면 오래도록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며 쌓아 온 사랑도 사랑인지라 그것의 시간은 에로스적 사랑 보다 훨씬 깊고도 오래 간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만, 동화와 송화 의붓남매의 사랑은 참으로 질기고도 오래간다. 나중엔 동호가 다 버려진 폐가를 사 눈먼 누나를 위해 새집을 꼼꼼하게 짓지 않는가?  어찌보면 집착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사랑 같도 하다. 어쩌면 그 사람에 대한 집착이 사랑을 낳기도 하는 것이니, 집착과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 아닐런지?

한국적인 것에 있어서 '한'이란 정서를 빼놓으면 안 되겠는데 이 한은 또 허무주의와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허무주의에서만 끝나지 않고 영원까지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앤딩장면에서 두마리의 학이 서로 장난하며 날아다니는 장면은 역시 그것까지 표현해주기엔 다소 버거워 보인다. 그래도 그만하면 훌륭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배우면에 있어서는 조재현 외엔 딱히 눈에 들어 올만한 배우는 없어 보이는 듯하다. 조연들은 연극판에서 날리는 사람들을 기용한 것 같긴한데 그들이 영화에서 그다지 비중있는 역을 맡은 것이 아니라 나보이지는 않는다. 오정해야 얼굴이 갸름하고 창을 잘해서 도드라져 보일뿐이지 연기를 잘한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나이들어 가면서 볼살이 붙어 서편제에서 나왔을 때 보단 좋아 보이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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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4-18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정적인 글이었어요. 덕분에 영화 천년학도 궁금해집니다. 그곳에 저도 함께 가보고 싶네요. ^^

stella.K 2007-04-18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고마워요! 제 글은 누가 안 읽어주는 줄 알았는데, 마노아님이...! 흐흑~ 기회되면 같이 가요.^^

비로그인 2007-04-18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치라고 합니다.. stella님 리뷰가 제가 신문서 읽은 영화평보다 더 멋진걸요?

stella.K 2007-04-20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만치님! 반가워요. 그리고 고맙슴다!^^

비로그인 2007-04-20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를 못봐서 거기다 서편제도 못봐서 댓글을 못단 거예요...
아무도 안 본다니요 스텔라님... -.-...

stella.K 2007-04-21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그러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