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분량인 50페이지를 끝내서 책을 덮으려는데
마르셀 프루스트가 나와서 두 페이지를 더 읽었다. 두번째 발췌문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글인데 마침 아렌트의 프루스트 부분과 연관되어보여 올린다. 바우만은 좋든 싫든 간에 우리가 호모 엘리겐스 homo eligens,즉 선택하는 동물에 속한다고 말한다. 아무리 강력하고 고통스럽고 끈질긴 압력도 선택을 완전히 봉쇄함으로써 우리의 행동을 완전히 결정지은 적은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것이라고.


그런면에서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정확한 근거도 없이 수용해오던 것들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과연 경제발전만이 인류의 행복을 보장하는가? 극소수의 부를 축적하는 구조적 기만일 가능성은 없는가? 오래 반복되는 것들에는 의문을 갖기가 힘들다. 그것에 저항하는 것도 ‘힘‘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주어진 현실이 모두 참이라고 단정지을수는 없다. 다수가 불행하다면 열차를 세우고 방향이 맞는지 재검토를 해야한다. 깨어나기 위해서 사유는 필수적이다.
불행속에서 깨어나지못하게 우리를 몽롱하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자본주의다.
모두 중독상황이기 때문에 ‘소비하느냐 마느냐‘(바우만) 대부분 이것을 고민조차 하지 않는다.



 

 

 



반은 유대인이었고 위급 상황에서는 스스로 유대인이라 밝힐 자세가 되어 있던 마르셀 프루스트는 ‘지나간 일‘에 대한 탐색으로 돋보이는데, 실제로 그를존경한 비평가 중의 한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한 변론이라고 평한 작품을 썼다. 20세기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작가는 일생을 오로지 사회 안에서만 보냈다. 그에게는 모든 사건이 사회 안에서 성찰된 뒤 개인에의해 숙고된 형태로 보였기 때문에, 성찰과 숙고가 프루스트 세계의 특수한 현실과 구조를 구성했다. (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개인과 이 개인이 다시 사유한 생각들은 시종일관 사회에 속한다. 심지어그가 무언의 고독 속으로 침잠할 때에도 그러하다. 프루스트 자신도작품을 쓰기로 결정하면서 결국 이런 고독 속으로 사라졌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건을 내면의 경험으로 전환하기를 강요하는 내면의 삶은 거울처럼 되었고, 이 거울의 반사 속에 진리가 나타날 수도 있었다.
삶에 직접 접근하지 않지만 현실이 반영될 때에만 그것을 지각한다는점에서, 내적 관조자는 사회의 방관자와 닮아 있다. 변두리에서 태어난 아웃사이더일지라도 여전히 합법적으로 사회에 소속된 프루스트는 이 내면의 경험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보이는 측면을 또 그들이 반성하는 측면을, 모두 함축할 때까지 그것을 확대시켰다.

사회가 공적인 용무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정치 자체가 사회생활의일부가 되어가던 이 시기를 그보다 더 잘 보여주는 증인도 없을 것이다. 시민의 책임감을 누르고 부르주아적 가치가 승리한 것은, 정치적이슈가 분해되어 눈부시고 황홀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의미였다. 여기에 프루스트 자신이 이 사회의 진정한 대표자였다는 말을 덧붙여야한다. 그는 이 사회에서 가장 유행하는 두 가지 ‘악덕‘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교에서 벗어난 유대교의 가장 위대한 증인인 그는이제까지 있던 서구 유대교에 관한 비교 가운데 가장 어두운 비교를 통해 이 악덕, 즉 유대인이라는 ‘악덕‘과 동성애라는 ‘악덕‘을 서로 결합시켰다.  - P202

어떤 선택지는 다른 선택지에 비해사실상 더 안전하고 덜 위험하면서 매력적이거나 혹은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실제로 선택하고 따르기에도 더 쉽게나 최소한 쉬워 보인다. 따라서 그런 선택지들은 오늘날 인기가 없고 권유하기 곤란한 것으로 치부되는 다른 선택지들에 비해 선택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인기 없는 선택지들은 시간과 노력과 희생을 더 많이 요구하거나 사람들의 비난을 사거나 체면을 잃는 위험을 초래하지나 않을까 하는 의혹을 산다(대부분의 경우 의혹이 아니라사실이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선택지들이 선택될 확률의분포 또한 ‘운명‘의 영역에 속하는 셈이다. 어쨌든 우리는
‘구조화된‘ 사회 환경에서 살아가는바, ‘구조화‘는 바로 확률의 조작으로 이루어진다. 즉 특정 선택들의 확률을 훨씬 높이는 동시에 다른 선택들의 확률은 훨씬 낮추는 식으로 보상과 처벌의 배치를 조정하고 재조정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바우만,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P44

결국 ‘현실‘이라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내적 소망을 방해하는 외적 저항에 붙이는 이름에 다름 아니다.....저항이 강할수록 장애물들은 그만큼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법이다.ㅡ바우만,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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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0-06 00: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우리는 왜 정직하게 세금 잘 내는
시민인데
불평등을 감수하고

인내 해야 하나요😂

미미 2022-10-06 08:12   좋아요 2 | URL
이 부분 읽고 아렌트와 바우만의 가치관이 비슷하다고 느꼈는데요 바우만의 책에서 마침 아렌트가 언급되어 반가웠어요.

열차를 세워야할 시점인데 오히려
더 가속도가 붙어 달리는것 같습니다😔

새파랑 2022-10-06 07: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역시 계획독서 미미님 ~! 그런와중에 프루스트는 지나칠 수 없으시다는 ^^
프루스트에 대한 설명은 공감이 가네요~!!

미미 2022-10-06 08:16   좋아요 4 | URL
원래는 매일 100페이지씩 읽으려고 했는데 난이도가 있어서 안되더라구요.ㅠㅜ

프루스트가 나와서 얼마나 반가웠는지ㅋ 새파랑님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얄라알라 2022-10-06 12: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homo eligens
엘레강스하단건가 하다가, 미미님 설명 듣고 헉! ˝선택˝이라는 키워드로 인간을 고민해본 적이 전 별로 없었나봐요. 자본주의 하 몽롱한 중독상태여서 선택조차 고민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신가봐요....
이런 난이도의 책을 매일 100페이지씩 읽으시려면 스트레칭 중간 중간 많이 하셔야 할듯!

미미 2022-10-06 12:28   좋아요 3 | URL
아ㅋㅋㅋ얄라님 호모 엘리겐스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인데요 그 책은 아주 얇아요ㅋㅋ 빨간색 한나 아렌트의 책이 두꺼워서 50페이지씩 읽는 중입니다. 800페이지가 넘어서 완독가능할지 모르겠어요😅 일단 노력중입니다. 스트레칭 틈틈히!!

얄라알라 2022-10-06 12: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굴 하나 지나니, 그 다음 굴이 더 통과하기 어려워보이는 그런 느낌. 저도 아까, ˝바우만˝이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ㅋㅋ 아! 그냥 용어만 알자! 요런 가벼운 회피심이^^;; 끝까지 읽어내는 힘이 진정한 힘입니다! 미미님 완전 화이팅하옵니다

미미 2022-10-06 12:40   좋아요 3 | URL
그렇죠!ㅋㅋㅋ아렌트 글은 진짜 어려운데 바우만은 다행히 아주 쉽게 써주어서 잘읽힙니다. 얄라님 응원힘입어 완독해보도록 할께요♡^^♡

mini74 2022-10-06 13: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이 생각나요.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ㅠㅠ 소비중독 귀에 쏙 와닿습니다.미미님 우와 이 어렵고 두꺼운 책을 !! 멋집니다. ㅎㅎ 파이팅 미미님 *^^*

미미 2022-10-06 14:02   좋아요 3 | URL
오! 미니님*^^* 그 말도 바우만의 책에 언급되었어요.ㅎㅎ
어려워서 속독이 안되요ㅠㅠ 자꾸 다시 읽고있는...프루스트처럼아는?이름 나오면 그렇게 반가울수가 없습니다ㅎㅎ

페넬로페 2022-10-06 14: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에서 프루스트가 어떻게 언급되는지 궁금합니다. 인류에게는 그 기원부터 불평등이 존재했다고 생각해요. 어떤면에서 누군가는 그 불평등을 없애려는 역사가 전부였을텐데 지금 더 극성을 부리니 이래저래 힘이 빠지네요 ㅠㅠ

미미 2022-10-06 15:08   좋아요 2 | URL
네 페넬로페님!ㅠㅠ 바우만이 불평등을 감수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쉽게 설명해주었어요. 아렌트의 글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네요. 프루스트의 작품속 악덕의 (동성애등)묘사가 반유대주의관점에서 새롭게 다가옵니다. 샤를뤼스, 알베르틴도 언급되어 반갑ㅎㅎ

그레이스 2022-10-06 2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체주의 읽고 있어요
헌데 오늘 아니 에르노가 끼어드네요 ^^

미미 2022-10-06 23:25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님도요?!!🥰

북플 안들어와야 꿋꿋하게 읽던 책 마무리 가능한데 오늘은 아니 에르노가 흔드네요.ㅎㅎ <전체주의> 드레퓌스 사건 읽는 중인데 흥미진진합니다ㅎㅎ
 

서문을 쓰는 일에서 싫은 점은 아무것도 누설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문에서는 그저 애를 태울 수 있을 뿐이다. 독자에게 ‘당신은 이제 멋진 여행을 즐길 것입니다, 멋진 인물들과 멋진 이야기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말할 수는 있지만 정확히 왜그런지는 말하면 안 된다. 따라서 서문은 ‘나를 한번 믿어보세요‘ 하는 명제나 다름없다.  - P7

셰발과 발뢰를 생각하면, 뛰어난 작가인 리처드 프라이스가 언젠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누군가 프라이스에게 범죄와 수사의 영역을 거듭 시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질문한 때였다. 프라이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탐정 이야기를 즐겨 쓰는 것은, 하나의 살인 사건 주변을 오래 맴돌다보면 그 도시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 P9

작가 조지프의 말을 빌리자면, 최고의 범죄 이야기는 경찰이 사건을 작업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건이 경찰에게 작용하는 이야기다. 마르틴 베크는 이 말이 정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알맞은 예다. 그리고 잠긴방은 베크가 작업을 하고 작용을 당하기에 가장 알맞은 사건이다. - P12

몇 년 전, 경찰의 누군가가 범죄 통계를 조작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간단한 기법이지만 대번에 눈에 띄는 것은 아니었다. 대놓고 허위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그릇된 결론을 끌어내는 수법이었다. 그런 짓까지 하게 된 동기는 좀더 군사적이고 동질적인 경찰을 전반적으로 좀더 많은 기술적 자원을, 특히 좀더 많은 총기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경찰이 겪는 위험을 과장해서 내보여야 했다. 말은 이미정치적으로 효과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 그것이 바로 통계 조작이었다. - P100

요즘은 그런 곳을 ‘시설‘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양로원‘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요즘은 ‘은퇴자의 집‘이니 심지어 ‘은퇴자호텔‘이니 하는 말이 쓰였다. 이것은 대부분의 입소자들이 사실상 자발적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는 사실, 그들에 대해서 더는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른바 복지국가가 그들을 그곳에 입소시켰다는 사실을 얼버무리기 위한 표현이었다. 그것은 잔인한 선고였고, 죄목은 노화였다. - P120

일류 범죄자는 붙잡히지 않는다. 일류 범죄자는 은행을 털지 않는다. 그들은 사무실에 앉아서 단추를 누를 뿐,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사회의 신성한제도를 어지럽히지도 않는다. 대신 일종의 합법적 강탈, 즉 시민들의 주머니를 터는 일을 한다. 스모일류 범죄자는 별의별활동으로 돈을 번다. 독성 물질로 자연과 사람들을 오염시킨 뒤에 부적절한 처방으로 파괴를 복구하는 척하면서 돈을 벌고, 도시의 넓은 구역을 의도적으로 슬럼화한 뒤에 건물을 죄다 허물고 새로 지으면서 돈을 번다. 그렇게 해서 새로 만들어진 슬럼은 당연히 예전 슬럼보다 주민들의건강에 훨씬 더 해롭다. - P149

행운과 불운은 저울에서 균형을 이룬다고 흔히들 말한다. 그래서 한 사람의 불운은 다른 사람의 행운이 된다는 식이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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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늘하고 별이 총총한 밤이었다. - P17

그 방에 어울리지 않는 색깔은 하나뿐이었고, 그것은 새빨간색이었다. - P55

마르틴 베크는 왠지 찜찜했다. 어렴풋하고 종잡기 어려운 기분, 예를 들자면 책을 읽다가 깜박깜박 조는 바람에 책장을 한장도 넘기지 못하고 계속 같은 대목을 되읽을 때 드는 무지근한피로감 같은 기분이었다. - P60

경찰의 일은 현실주의, 정해진 절차, 집요함, 체계에 바탕을두고 이뤄진다. 물론 까다로운 사건이 우연히 해결되는 경우가많긴 하지만, 우연이란 융통성 있는 개념이고 요행이나 운과는다르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범죄 수사의 성패는 우연의망을 가급적 촘촘히 짜내는 데 달려 있다. 번득이는 육감보다는경험과 성실함이 더 많이 기여한다. 명석한 두뇌보다는 좋은 기억력과 건전한 상식이 더 귀한 자질이다.
현실에서 경찰이 하는 일에는 육감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육감은 애초에 자질이라고 볼 수도 없다. 점성술과 골상학을과학이라고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래도 뭔가가 있었다. 그가 아무리 인정하기 싫어도, 틀림없이 뭔가가 있었다. 그리고 예전에도 그는 이런 느낌 덕분에더러 올바른 방향을 찾을 수 있었다. - P61

지난 십년동안, 스톡홀름 도심은 대대적이고 폭력적인 변화를 겪었다. 원래 있던 동네는 모조리 철거되고 그 자리에 새 동네가 지어졌다. 도시 구조 자체도 바뀌었다. 도로가 확장되었고고속도로가 놓였다. 그런 활동을 부추긴 것은 사람들이 어울려서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는 꿈이 아니라 귀한 땅을 한 뼘도 남기지 않고 최대한 착취하겠다는 욕망이었다. 도심에서는기존 건물의 구십 퍼센트를 허물고 기존 도로망을 깡그리 지운것만으로도 모자라 지형 자체에도 폭력적인 변화가 가해졌다. - P81

만약 당신이 정말로 경찰에 붙잡히고 싶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경찰관을 죽이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통하는 진실이고, 스웨덴에서는특히 더 그랬다. 스웨덴 범죄 역사에는 해결되지 않은 살인 사건이 무수히 많지만 경찰관이 살해된 사건 중에는 미해결 사건이 한 건도 없었다. - P88

스웨덴 텔레비전내에서도 집안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독점 방송사의 중앙 관리 본부는 여러 채널에서 송출되는 뉴스 서비스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갖은 수를 다 쓰고 있었다.
그게 바로 검열이지, 군발드 라르손은 생각했다. 투명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하는 검열. 자본주의사회의 검열이란 전형적으로 그런 식이지. - P102

동료들은 그를 특이한 사람으로 여겼고, 대부분 그를 싫어했다. 그도 동료들을 싫어할 뿐 아니라 자신의 원래 가족과상류층 배경도 싫어했다. 형제자매는 그를 역겨워했다. 그가 자신들과는 다른 세계관을 가진 것이 한 이유였지만 더 큰 이유는그가 경찰관이라는 점이었다. - P104

"아빠?"
"응."
"요아킴이 말썽 부렸어."
"응."
"기저귀를 벗어서 벽에 똥을 발랐어. 엄청 많이 발랐어."
콜베리는 신문을 내려놓고 다시 끙 소리를 내면서 일어났다.
아이들 방으로 가보았다. 곧 한 살이 되는 요아킴이 아기 침대안에 서 있다가 아빠를 보고는 난간을 쥐었던 손을 놓고 베개에엉덩방아를 통통 찧었다. 요아킴이 벽을 예쁘게 꾸며두었다는보딜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 P106

프레드리크 멜란데르는 강력반의 귀한 자원이었다. 멜란데르는 기억력이 비상했다. 못 견디게 따분한 인간이었지만, 수사관으로서는 특별한 자질을 지닌 사람이었다. 난다 긴다 하는 현대 기술도 멜란데르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멜란데르는 특정 사람이나 주제에 관해서 지금까지 자신이 보고 듣고 읽은 것을 모조리 기억했다가 몇 분 만에 그 내용을 머릿속에서 가지런히 정렬하여 명료한 이야기 형식으로 들려줄 줄 알았다.
세상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컴퓨터는 아직 없었다.
멜란데르가 서툰 것은 글씨 쓰기였다. 마르틴 베크는 멜란데르의 노트에 적힌 글씨를 보았다. 깨알만 하고 독특한 그 필체는 남들은 절대 알아먹을 수 없었다. - P199

마르틴 베크는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것은 아이의 얼굴이자 노인의 얼굴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 눈은 공포, 혹은 증오, 혹은 절박함 탓에 광기에 사로잡힌 눈이었다. 아니면그냥 완벽하게 공허한 눈이었다. - P327

"여기는 모스크바도 베이징도 아니야. 택시 기사가 고리키를읽는 나라, 경찰관이 레닌의 말을 인용하는 나라가 아니라고,
여기는 정신 나간 나라의 정신 나간 도시야. 그리고 저 지붕에는 웬 망할 놈의 미치광이가 올라가 있어. 이제 그만 놈을 끌어내려야 해."
"동의해." 콜베리가 대꾸했다. "하지만 그 대목에서 레닌은아니지" -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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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저 청년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야?"
콜베리는 그때 이렇게 대답했다. "녀석의 허세로 걸친 자신감을 깨부수기 위해서지, 새롭게 진정한 자신감을 구축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언젠가 좋은 경찰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거야.
걸출한 성과를 내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거랄까." - P110

그는 경찰의 마스코트나 마찬가지였다. 잘생긴 생김새에 호감 가는 태도에, 육체적으로 건강했고, 훌륭한 운동선수였다. 경찰 모집 광고에 나서도될만했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확실히 내세울만했다. 가령 거만하고, 흐느적거리고, 비만 조짐이 있는 콜베리보다는 최고로 따분한 인간이 최고의 경찰이 된다는 가설의 완벽한 사례로 보이는 금욕적인 멜란데르보다는, 어느 면으로 보나 평범하기만 한 딸기코 뢴보다는 집채만 한 몸집과 꿰뚫는 듯한 눈빛으로 누구든 단박에 벌벌 떨게 만들 수 있으며 스스로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는 군발드 라르손보다는.
그리고 물론, 코가 막혀 찡찡대는 마르틴 베크 자신보다도. - P111

"좋지 않아."
"내가?"
"아니, 책 모퉁이를 접는 것."
"내 책이야. 내 돈으로 샀다고." - P168

크리스마스까지는 한 달도 더 남았지만광고 잔치는 벌써 시작되었다. 한껏 장식된 쇼핑가를 따라 쇼핑강박증이 흑사병처럼 빠르고 무정하게 번졌다. 그 전염병은 눈앞에 마주치는 모든 것을 휩쓸었다. 피할 길은 없었다. 전염병은 가가호호 방문하여 모두를 전염시키고 무너뜨렸다. 아이들은 벌써부터 기진맥진 울어대며 떼를 썼고, 가장들은 다음 명절까지 빚에 시달릴 형편이었다. 거대하고 합법적인 신용 사기가도처에서 희생자를 양산했다. 병원은 심근경색, 신경쇠약, 급성위궤양 환자들로 붐볐다. - P198

"경찰이 필요악이기 때문이야. 누구든 불현듯 경찰의 도움이필요한 순간이 온다는 사실을 알지. 직업 범죄자들조차 그래,
제아무리 도둑이라도 자기집 지하실에서 뭔가 달각대는 소리가들려서 밤중에 잠을 깨면 어떻게 할 것 같나? 당연히 경찰을 부르지. 하지만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찰이 자기 일을 방해하거나 마음의 평화를 어지럽히면어떤 방식으로든 두려움이나 경멸을 표현하기 마련이야." - P199

노라스타숀스탄 거리의 버스에서 총알이 예순일곱 발 발사된 지 한달이지났다. 아홉 명을 살해한 범인은 여전히 잡히지 않았다.
초조해진 것은 경찰 당국, 언론, 보통 시민들만이 아니었다.
경찰이 하루속히 범인을 검거하기를 애타게 바라는 사람들이또 있었다. 흔히 지하 세계라고 불리는 세상의 사람들이었다.
범죄가 주업인 사람들은 지난 한 달 동안 활동을 삼갈 수밖에없었다. 경찰이 경계를 조이는 한 납작 엎드려 있는 게 최선이었다. 스톡홀름 전역의 도둑, 중독자, 마약상, 강도, 주류 밀거래꾼, 포주는 살인자가 한시바삐 체포되기를, 그리하여 경찰이다시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나 주차 위반자에게 전념하여 자신들이 다시 활동에 나설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그들이 경찰과 공동전선을 펼치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추적을 기꺼이 돕고 나섰다. -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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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호 씨와 같은 공간에 있을 때면어김없이 광호 씨의 존재를 의식하게 됐고, 광호 씨를 일부러 바라보지 않는 방식으로 바라보곤 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쪽으로 걸어가는,그래서 자꾸만 나의 위치와 한계를 자각하게 만드는 광호씨의 용기를 경계하면서도 선망했던 게 아닐까 싶다. - P10

그 애는 그 부서지고 망가진 것 같은 문장들을 더 마음에 들어 했어요. 이제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이것뿐이고, 이렇게 하면 왠지 이 세상에 숨 쉴 수 있는 작은 구멍을 내는 것 같다나요. - P11

나는 빗속에서 달리기를 했다. 동네를 돌아 나가면 남산 둘레길이 멀지 않았다. 늦은 시간인 데다 비까지 와서인적이 드물었다. 나는 천천히 달리다가 숨이 차면 걷는것을 반복했다. 그러다 전력 질주를 했다. 몸이 뜨거워졌고 전력 질주 후에 숨을 토해내는 순간이 괴로워서 좋았다. 달리는 동안에도 나는 그를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언제나 그를 생각했다. - P64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내 말에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라니?
알잖아. 중요해 보여도 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래도 나는 좋았어. 고맙고.
네가 고마울 일이 아니야. 약속을 못 지킨 건 나니까. 약속! 무슨 약속?
결혼했잖아. 우리가.
아…… 희진아. 그거야말로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 P76

어떤 마음은 없는 듯, 죽이고 사는 게 어른인 거지. 그렇지? 그런데 어째서 당신들은 미래가 당연히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건가? 그러나 이 모든 말을 나는 할 수 없었다.  - P88

나는 지금 꿈을 꾸는 것 같아. 아주 낯선, 처음 꾸는 꿈. 그런데 이게 좋은 꿈인지 나쁜 꿈인지 모르겠다?
빨리 깨고 싶어?
나는 남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깨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아마 그런 사람은 없겠지. 아무도. - P89

이주혜:이해는 잠시나마 서로의 영혼이 포개지는 가장 반짝이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오해 혹은 몰이해는 날카로운 것으로 영혼을 긋는 가혹한 순간이 될 수도 있겠지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해받는 일이 더없는 기쁨이라면 사랑하는사람에게 오해받는 일은 처절한 고통입니다.  - P144

이주혜:하고 싶은 이야기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일치할 때비로소 한 문장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할 수 없는 이야기일 때 혹은 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닐 때는 단 한 줄도 쓸 수 없게 되지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다른 작가가 써냈을 때 그것을 읽는 나는 큰 기쁨을 느낍니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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