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호 씨와 같은 공간에 있을 때면어김없이 광호 씨의 존재를 의식하게 됐고, 광호 씨를 일부러 바라보지 않는 방식으로 바라보곤 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쪽으로 걸어가는,그래서 자꾸만 나의 위치와 한계를 자각하게 만드는 광호씨의 용기를 경계하면서도 선망했던 게 아닐까 싶다. - P10

그 애는 그 부서지고 망가진 것 같은 문장들을 더 마음에 들어 했어요. 이제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이것뿐이고, 이렇게 하면 왠지 이 세상에 숨 쉴 수 있는 작은 구멍을 내는 것 같다나요. - P11

나는 빗속에서 달리기를 했다. 동네를 돌아 나가면 남산 둘레길이 멀지 않았다. 늦은 시간인 데다 비까지 와서인적이 드물었다. 나는 천천히 달리다가 숨이 차면 걷는것을 반복했다. 그러다 전력 질주를 했다. 몸이 뜨거워졌고 전력 질주 후에 숨을 토해내는 순간이 괴로워서 좋았다. 달리는 동안에도 나는 그를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언제나 그를 생각했다. - P64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내 말에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라니?
알잖아. 중요해 보여도 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래도 나는 좋았어. 고맙고.
네가 고마울 일이 아니야. 약속을 못 지킨 건 나니까. 약속! 무슨 약속?
결혼했잖아. 우리가.
아…… 희진아. 그거야말로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 P76

어떤 마음은 없는 듯, 죽이고 사는 게 어른인 거지. 그렇지? 그런데 어째서 당신들은 미래가 당연히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건가? 그러나 이 모든 말을 나는 할 수 없었다.  - P88

나는 지금 꿈을 꾸는 것 같아. 아주 낯선, 처음 꾸는 꿈. 그런데 이게 좋은 꿈인지 나쁜 꿈인지 모르겠다?
빨리 깨고 싶어?
나는 남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깨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아마 그런 사람은 없겠지. 아무도. - P89

이주혜:이해는 잠시나마 서로의 영혼이 포개지는 가장 반짝이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오해 혹은 몰이해는 날카로운 것으로 영혼을 긋는 가혹한 순간이 될 수도 있겠지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해받는 일이 더없는 기쁨이라면 사랑하는사람에게 오해받는 일은 처절한 고통입니다.  - P144

이주혜:하고 싶은 이야기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일치할 때비로소 한 문장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할 수 없는 이야기일 때 혹은 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닐 때는 단 한 줄도 쓸 수 없게 되지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다른 작가가 써냈을 때 그것을 읽는 나는 큰 기쁨을 느낍니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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