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들어와 사는 미국인,캐나다인들 중 한국어를 거의 못하는 경우를 여럿 봐왔다. 지금은 고향으로 돌아간 한 캐나다인 친구는 몇년간 한국의 영어학원,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쳐왔음에도 ,심지어 아내가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어를 잘 몰랐다. 그는 영어를 구사할때 같은 오류를 반복하는 아내에 대해 지적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한국어를 못하는데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국어도 아닌 외국어 구사에 자신이 없어 부끄러웠던 건 그의 아내와 나였다. '그래도 우리는 2개국어를 하는건데 너는 네 모국어밖에 못하지 않냐'고 목구멍까지 말이 차올랐지만 참았다. 그들은 한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 배우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여성의 언어는 기존의 가부장제 언어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는(beyond, overview) 것이기 때문에 ‘이길 수밖에 없다. 한국인과 미국인의 관계처럼 남성은 남성의 언어만 알지만, 여성은 남성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남성의 언어와 여성입장에서의 언어를 모두 구사해야 한다. 여성들이 이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개의 영화들은 여성에게서 언어를 뺏거나, 말하는 여성을 죽이거나, 남성의 언어를 대신 말하게 한다. - P49
주류가 아닌 목소리, 배제된 정체성은 생존을 위해 목소리 내기가 필수다. 그래서 자신들만의 목소리를 발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주류, 다수들 중 일부는 이런 '다름'을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자신들만이 옳고, 질서라는 착각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귀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다름'의 소리가 커질때 쉽게 위협을 느낀다.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럼에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알아야할 '필요'를 못느끼기 때문이다. 들어주는 것 자체에 특권의식을 가지기도한다. 그 증거는 '~~는 해도 된다. 하지만 ~~는 안된다.'식의 말하기다. 이쪽은 살기위해, 함께 공존하기 위한 외침을 멈출수가 없는데 어디서 얼마만큼 할 수 있는지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가 자유로운 것은 정작 누구일까를 생각해본다. 시야가 좁은 사람이 더 자유로울 수는 없다.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안에 감옥을 지어 그 안에 살고 있는 것과 같다. 물론 자기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데서 권력이 드러난다. 하지만 사회가 다름에 관대해질때 이 권력은 한곳에 집중되지 않고 개개인에게 분배될 수 있다. 나도 이런 문제에 있어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나 역시 어떤 면들에 있어서는 특권인식을 가졌기 때문에 시야가 한정적이라는 것을 한번씩 느낀다. 적어도 시야를 넓히기 위해 뭘 해야하는지는 알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여성에게 유일한 무기는 언어밖에 없다. 우리가 총칼로 싸우겠는가. '미러링'이라는 이름의 욕설로 싸우겠는가. 우리는 공부해야 한다. 공부하지 않는 한 해방은 없다. 여기서 공부의 첫 단계는 이론을 적용하지 말고 '지금 여기 자신'의 위치에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훈련이다. P.49
그녀는 날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원칙들을 만들었고, 날마다 다른 사람들의 편견이라는 암초에 부딪혔다. 그리고 또 날마다 ㅡ그녀는 현학자도 냉정한 이론가도 아니었으므로ㅡ그녀 안에서는 자신들의 원칙들을 밀어내고 그것들을 새롭게 만들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무엇인가가 태어났다. P.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