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구원
에단 호크 지음, 김승욱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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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유부남 아니에요?" 그녀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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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비상구 계단을 살금살금 내려와 주차장으로 가서, 남들이 볼 수 없는 곳에 이르자마자 입을 맞췄다. 키스가 어떤 것인지 나는 잊고 있었다. 내 품에 안기고 싶어 하는 사람을 품에 안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도 잊고 있었다. 내 손길에 녹아내리는 사람, 내가 자신의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주기를 바라는 사람, 내 손이 더 멀리까지 닿기를, 더 심하게 밀어붙이기를 바라는 사람, 그럴 때 작게 소리를 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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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욕망이 아니었다.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나는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이 세상에서 나고 죽는 인간. 지금 이곳에 나는 살아 있었다.
(31 쪽)


아내였다. 혈관의 피가 멈추는 기분으로 나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내가 힘들게 말했다.
내 귀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내가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약속했던 여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흐느끼는 소리뿐이었다. 그녀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울기만 하다가 숨을 몰아쉬고는 또 엉엉 울었다.
"미안해, 미안해, 당신을 정말 사랑해" 내가 말했다. 메리는 거의 숨도 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말했다. "당신을 정말 사랑해. 미안해"
그녀가 전화를 끊었다. 내가 곧바로 다시 걸었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145쪽)

스무 살 시절에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사랑은 정의 내리기에는 너무나 가슴 벅찼다. 규정 짓기에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숭고했다. 담아두기에는 너무나 뜨거웠다.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파괴적이었다. 함께하기에는 너무나 아팠다.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달콤했다.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외면하기에는 너무나 어지러웠다. 무엇인지 알 수조차 없는 사랑은 나를 부드러운 미풍에 실어서 짓무른 꽃내음 가득하고 햇살 따사로운 공중으로 둥실둥실 떠올려 주었다. 그리고선 변덕스럽게 나를 끌어내려 쓰러뜨리고 굴리고 짓밟고 모욕하고 더럽혔다. 사랑은 나를 오물 속에 내동댕이쳤다. 그러고 나서도 사랑 그놈은 끝내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 사랑은 숭고하다고 하기에는 너무 원초적이고, 파괴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관대하고, 아프다고 하기에는 너무 요란하고, 달콤하다고 하기에는 너무 계산적이고,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하고, 어지럽다고 하기에는 너무 맹목적이다. 이제 사랑이 무엇인지 찾기에는 나는 너무 비루하고, 누추하고, 탐욕스럽다. 이제 사랑마저 내게 오면 부끄러운 무엇이 된다. 그 정도로 나는 더럽혀져 살아왔다. 내 손으로.


도서관이었다. 다시 영미소설 신작 코너였다. 작가의 이름이 눈에 확 들어왔다. '에단 호크' 그 에단 호크인가? 책을 뽑았다. 맞다. 그 에단 호크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그 여린 소년, '가타카'의 그 절박한 젊은이, '트레이닝 데이'의 그 거친 형사, '비포 시리즈'의 그 에단호크, 그가 지은이였다. '톰 행크스'의 '그렇게 걸작은 만들어진다'를 보았을 때처럼 부러움과 호기심, 그리고 질투심이 확 밀려왔다.

이 책은 에단 호크가 쓴 소설이다. 연극에 대한 얘기고, 예술에 대한 얘기고, 사랑에 대한 얘기고, 상실에 대한 얘기고, 위로에 대한 얘기고, 치유에 대한 얘기고, 이별에 대한 얘기다. 그리고 지루한 얘기고, 뻔한 얘기고, 진부한 얘기다. 그러면서도 매혹적인 얘기다. 그렇게 삶은 상투적이다. 한 번 밖에 살지 못하면서도.


영화 배우에 대한 이야기였다. 30대 후반의 남자 영화 배우, 세계적인 록스타를 부인으로 두고서 한 순간 일탈을 한 영화 배우. 그로 인해 이혼을 겪게 되고, 덕분에 온 세상의 조롱을 받는 유명한 남자 배우. 그런 그가 뉴욕의 연극 무대에 서는 이야기다. 그렇게 연기를 통해서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호기심으로 시작했지만, 처음에는 진도가 나아가지 않았다. 책을 잡고 있으면 자꾸 눈이 감겼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때는 눈이 번쩍 뜨였다. 내 얘기 같았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가 나올 때는 지루했다. 그러다가 점점 빠져들었다. 책을 다 덮은 지금 내 가슴은 따뜻하게 벅차오른다.

책은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나는 사랑 얘기만 말하련다.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으련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나 연기에 대한 이야기는 말하지 않으련다. 다른 얘기들까지 하는 건 나에겐 너무 버거운 일이다. 처음 시작할 때 사랑에 대한 얘기로 읽었듯이, 다 읽은 지금 사랑의 얘기로만 기억하겠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 다 읽은 지금 나에게 이 얘기는 사랑 얘기가 아니다. 이 얘기는 욕망에 대한 얘기고, 고통에 대한 얘기고, 실존에 대한 얘기다. 삶은 그렇게 혼란스럽다. 최소한 나에게는.

"우리 둘 다 서로를 놓아 보내고 있었다. 우리는 미친 듯이 서로를 사랑했다. 수많은 젊은 연인들이 그렇듯이, 우리는 시를 쓰고, 별을 보고, 서로를 끌어안은 채 밤을 꼬박 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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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달플 때도 있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고, 하기를 잘했다 싶기도 하고, 끝나서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이 모든 감정이 어떻게 동시에 진실일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정말로 진실이었다"
(3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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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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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적으로 말해서, 폭발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었다. 크게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빛이 번쩍거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엄청난 충격을 느꼈다. 통증은 없었다. 아주 격렬한 충격만 느꼈을 뿐이다. 전극에 몸이 닿았을 때의 느낌과 동시에 완전한 무력감을 느꼈다. 짓눌리고 움츠러들어 무(無)로 변해버리는 느낌이었다. 앞에 있던 모래주머니들이 엄청난 거리로 멀어졌다. 아마 번개에 맞았을 때도 이런 느낌이 아닐까. 나는 즉시 총에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굉음과 섬광 때문에 바로 옆의 소총이 오발되어 맞은 줄 알았다. 이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다음 순간 나는 무릎이 꺾이면서 쓰러졌다. 머리가 땅에 부딪히면서 꽝 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 그러나 다행히도 다치지 않았다. 멍하고 어찔어찔한 느낌이었다. 매우 심하게 다쳤다는 의식은 있었으나,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통증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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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이 목을 관통했다는 것을 안 순간 나는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총알이 목 한가운데를 관통하고도 살아남은 사람이나 짐승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입 가장자리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동맥이 날아갔구나' 나는 생각했다. 경동맥이 잘렸을 때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내가 죽음을 예상한 시간이 2분은 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재미있었다. 그런 시간에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지 아는 것도 재미있다는 뜻이다. 처음 떠올린 것은, 다분히 관습적이게도, 아내였다. 두 번째 떠오른 것은 세상 - 생각해 보면 결국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세상이었다 - 을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에 대한 격렬한 분노였다. 나는 이 터무니없는 불운에 격분했다.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이냐! 전투도 아니고 이 염병할 참호 한 귀퉁이에서 순간의 부주의 때문에 죽게 되다니!"
(238쪽 부터~)

1936년 잉글랜드 작가 조지 오웰은 '신문 기사를 쓸까 하는 생각으로' 스페인에 갔지만, 가자마자 의용군이 되었다. '그 시기, 그 분위기에서는 그것이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조지 오웰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기록을 적은 참전기이다. 그리고 동시에 전장의 초연하면서도 달아오른 열기를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그리고 동시에 파시스트 반란군 앞에서 연합 세력인 노동 계급에 대한 탄압에 골몰한 좌파 권력에 대한 고발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의 품위에 대한 믿음과 실천의 고백록이다.

나는 스폐인 내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1930년대 후반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군인 프랑코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 이에 대항하여 헤밍웨이 등 수많은 외국의 지식인들이 공화정부를 지키기 의해 목숨을 걸고 참전했다는 것. 그럼에도 프랑코는 승리하여 끝내 수십 년간 계속될 파시스트 정권을 세웠다는 것 정도?

마찬가지로 나는 조지 오월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조지 오월의 책을 읽은 것이 없다는 것에 부담감을 가끔 느끼곤 했는데, 그것은 내가 수년 전에 우연히 보았던, 읽었다기 보다는 보았던 그의 짧은 인용문 때문이었다.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글이었던 것 같다. 그는 사회주의를 얘기하면서도 이념보다는 인간애를 우선하였고, 나는 그 짧은 글로 그에게 호감을 품게 되었다.

그후 그를 잊어버렸다가 올해 초 '조지 오웰 사후 75년 이벤트'로 그의 책 몇 권이 재출간 되면서, 그의 책을 뭐라도 읽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살짝 들었다. 그래서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중간까지 읽고는 만기일이 되는 바람에 반납하였다. 그러다가 밴드에서 독서 토론으로 '1984'를 하면서 처음으로 그의 책을 제대로 읽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전 도서관에서 제목에 끌려서 이 책 '카탈로니아 찬가'를 빌려 읽게 되었다.

조지 오웰의 글을 읽을 때 마다 느끼는 건데, 그는 글을 쉽고 평이하게 쓴다. 화려한 수식이나 과장된 치장 없이 담담하게 글을 써 내려간다. 그러면서도 명료하고 진솔하다. 이 책 또한 마찬가지였다. 참혹한 전쟁터의 경험을 기록한 글임에도 그 섬뜩하고 치열하고 험악했을 경험을 진솔하고 담담하게 써내려간다. 심지어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자기 자신의 목을 관통하는 총상조차 관찰자처럼 차분하게 써내려 간다. 덕분에 나 또한 궁핍하고 참혹한 전쟁터의 현실에서, 엄혹한 파시스트의 공격 앞에서 분열하는 이념 속에서, 웃기기도 하고, 저열하기도 하고, 치열하기도 하고, 숭고하기도 한 인간 군상의 다양한 모습을 차분하고 냉정하게 바라보게 된다.

조지 오웰은 의용군에 자원한 후 부대와 함께 제대로 된 소총조차 없이 전선으로 배치된다. 총알이 머리 위를 날라다니고, 고양이만한 쥐가 몸을 넘어 다니고, 진창이 된 참호 속에서 포개어서 잠이 들고, 몇 날 며칠을 씻지 못하고,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조악한 수류탄을 품고 다니고, 먹을 음식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그 궁핍하고 곤란한 상황에 적응해 살아가고, 그 누추하고 옹색한 생활은 그들의 일상이 된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때가 오면 그들은 그 궁상스러운 일상을 떨치며 용기있고 숭고한 모습으로 일어선다. 그럴 때 그들은 목숨조차 초개같은 치열한 전사가 된다.

그 '일상성'을 보면서 나는 깨닫는다. 지금의 내 모습 또한 내 본질의 모습이 아니라 내 일상의 모습이라는 것을. 살아오면서 변해온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일상일 뿐이었다. 언제인가 때가 오면 나도 일상을 떨치고 내가 바라고 꿈꾸는 삶의 모습으로 용기 있게 일어설 수 있을까? 지금은 그럴 수 있다고 그저 스스로를 믿어야 할 뿐이다.

우리는 보통 스페인 내전하면 조지 오웰,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를 얘기하지만, 파시스트에 맞서 제대로 된 무기 조차 없이 제일 먼저 전장으로 달려간 사람들은 수많은 이름 없는 노동자들이었다. 비록 피고 지는 꽃봉우리처럼 짪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카탈로니아에서 차별 없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주저없이 전장으로 달려가 목숨을 던졌다. 그것이 바로 혁명과 해방의 뜨거운 열기였고, 조지 오웰은 그 열기속에 스스로를 던졌다.

근데 어떻게 그들은 패배했을까? 왜 공화주의자들은 패배했을까? 수 많은 사람들이 몸을 던져 싸웠던 스페인 내전은 왜 파시스트들의 승리로 끝났을까? 늘 그것이 궁금했었다.

그것은 자유주의 열강들의 야욕 때문이었다. 민주주의의 수호 보다는 자신들의 시장 보호를 우선한 서구 열강들의 방관 때문이었다. 프랑코 반란군을 적극 지원한 독일, 이탈리아의 파시즘 정권과 달리 영국을 비롯한 서구 자본주의 국가는 그저 방관만 했다. 공화주의자들을 지원한 국가는 오직 소련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분열 때문이었다.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은 공산주의 세력은 파시스트 반란군의 진압 보다 내부 권력 쟁취가 더 급했다. 그들은 연합하여 파시스트 반란군에 저항했던 아나키스트들을 공격했고, 아나키스트 의용군의 일원으로 싸워왔던 조지 오웰은 몸을 숨겨 영국으로 도망쳤다..

삶은 가혹하고, 세상은 잔혹하고, 신은 불공평하다. 노동자는 궁핍하고, 부자는 배부르고, 악인은 승승장구하고, 밤길은 멀고, 해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인간은 아름답고, 용기는 숭고하다. 


조지 오웰은 공화주의 세력의 분열과 거짓에 피로와 환멸을 느꼈다. 그러나 그 환멸도 그가 카탈로니아 해방 정국에서 느꼈던 혁명과 평등의 열기를 지울 수는 없었다. 조지 오웰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이 책 '카탈로니아 찬가'를 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에서 숭고한 아름다움을 마주한다.

책은 책을 부른다, 여행이 좋았을 때 새로운 여행을 계획하듯이, 등산이 좋았을 때 새로운 산을 오르듯이, 사랑이 달콤했을 때 또 다른 사랑을 찾듯이, 좋은 책은 또 다른 책을 찾게 만든다.

나는 이제 스페인 내전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나는 이제 조지 오웰의 책을 더 읽고 싶어졌다. 그리고 나는 이제 갈등한다. 다음엔 '스페인 내전'을 읽을 것인가 아니면 '나는 왜 쓰는가'를 읽을 것인가? 좋은 책은 또 다른 책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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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십 트루퍼스 환상문학전집 27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김상훈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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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협하고 졸렬한 폭력성을
삶의 진리로
떠들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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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인간을 먹고 자란다 - 인공지능 신화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
마크 그레이엄.제임스 멀둔.캘럼 캔트 지음, 김두완 옮김 / 흐름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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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찬란한 AI의 시대다. AI는 예술을 창조하고, 음악을 작곡하며, 시를 쓴다. 온 세상이 AI가 우리에게 가져다 줄 편리하고 풍요롭고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세상을 노래하고 있다. 그야말로 환희에 빛나는 세상이다.

그러나 빛은 늘 그늘과 함께 한다. '스스로 작동하는 자동화'라는 허구를 지탱하기 위해 그늘 속에서 AI를 만들고, 유지하고, 수리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저임금의 단조로운 노동을 반복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논평가들이 AI의 미래에 대해 추상적인 논쟁을 벌인다. 그러나 지나치게 미래 지향적인 논의는 AI 산업을 실제로 지탱하고 있는 '현재'를 가린다. 특히 '터미네이터' 같은 극단적 디스토피아를 상상하는 논의들은 AI 산업을 둘러싼 현실적인 권력 관계를 감추고, 그 속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존재를 지워버린다

먼 미래를 향한 시선을 현재로 돌리면, AI 시스템이 가진 실제적이고 심각한 문제점들이 선명히 드러난다. AI는 추출 기계다. 인간의 노동력을 추출하고, 개인 정보와 사생활을 추출하고, 편견과 불평등을 추출하고, 지구의 자원을 추출하고, 인간의 지적 자원을 추출한다. 편향성과 차별을 재생산하는 속에서, 여성과 소수자들과 저개발국가 노동자들은 배제된다.

이 책은 AI의 발전에 기여하는 '보이지 않는 노동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쓰여졌다. 데이터 주석 작업자, 머신러닝 엔지니어, 기술자, 예술가, 물류 노동자, 투자자, 노동 운동가의 일곱 사람을 보여준다.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보자. 그들의 이야기는 쉽고 명확하다.

우간다 굴루의 '애니타'는 AI 훈련 시간의 80 퍼센트를 차지하는 데이터 주석 작업을 한다. 애니타를 비롯한 비정규 노동자들은 강력한 감시 아래에서 극한의 노동 강도를 견디며 데이터에 주석을 붙이고, 시간당 대략 2달러를 번다. 데이터 주석 센터의 노동 관리 방식은 과거 식민지 시대에 확립된 후, 유럽과 미국으로 확산된 경영 기업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공식적인 식민주의는 끝났지만 불평등한 구조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영국 런던의 머신러닝 엔지니어 '리'는 AI 모델의 매개변수를 최적화하는 일을 한다. 리의 팀은 모델의 성능을 개선하는 동시에 안전성과 윤리성을 유지할 보호 장치를 마련하려 애쓰고 있지만, 팀원 누구도 모델이 특정 질문에 잘못된 답을 내놓는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이를 해결하는 방안도 불분명하다. 리는 회사의 AI 모델이 상당한 편향과 한계가 있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결국 수익 창출이 AI의 안전성과 윤리적 고려보다 우선시될 것이라는 현실도 잘 알고 있다.

아이슬란드의 기술자 '에이나르'는 데이터 센터의 시설을 관리한다. AI 모델이 동작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연산 자원이 필요하다. AI 시스템이 하나의 두뇌라면, 해저 광섬유 케이블은 혈관이다. 이 혈관에 AI의 심장부를 이루는 데이터 센터들이 전 세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AI 개발 생테계는 엄청난 전략과 막대한 물과 희귀 광물들을 소모한다. 앞으로 이 자원들은 공급 부족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아일랜드의 배우 '로라'는 어느 날 온라인 아바타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로라의 목소리는 로라의 동의없이 추출되어 로봇의 목소리로 쓰이고 있었다. 로라는 자기 목소리의 합성 버전과 일자리 경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AI 혁명이 예술에 가져올 진정한 위험은 인간이 창작한 예술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 기술이 권력자에 의해 남용되어 창작자를 착취하고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지 모른다는 것이다.

영국 코번트리의 '알렉스'는 아마존의 물류 노동자다. 그는 하루 종일 똑같은 자리에 서서, 그 누구와의 대화도 없이, AI 시스템의 지시에 따라 똑같은 작업을 반복하며, 매 순간 감시와 추적, 관리를 당한다. AI 감시 기술은 폭발적으로 확산되었고, 시스템은 감시에서 데이터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아무리 정교한 경영 기법이라 해도 노동자들이 싸울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한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타일러'는 벤처캐피털의 파트너다. 타일러가 수익을 실현하는 방식은 세 가지다. 첫째, 스타트업이 주식시장에 상장하면서 보유 주식을 매각하는 경우. 둘째, 빅테크 기업에 인수되는 경우, 셋째, 다른 투자자에게 지분을 되파는 경우. 투자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AI가 현실적으로 얼마나 실용적인 기술인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미래 수익성에 대한 기대'를 정당화할 수 있는 성장과 혁신의 서사를 만드는 것이다.

케냐 나이로비의 '폴'은 메타 외주 업체의 콘텐츠 검수자였다. 근무 환경 개선을 요구했다가 해고된 수백 명의 동료들과 함께 아프리카 최초의 콘텐츠 검수원 노조(ACMU)를 만들었다. 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기업들이 전 지구적 노동시장을 이용해 노동자들을 압박하는 것처럼, 노동자들 또한 국경을 초월한 전략 수립과 행동을 조직화해야 한다. 바로 연대와 연합과 초국적 노동조합이다. 룰론 수많은 난관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투쟁이 쉬웠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따라다가 보면 우리는 구름 위에 신기루처럼 떠있는 AI가 아니라, 현실의 물리 세계에서 존재하는 AI를 깨닫게 된다. AI 시스템이 어떻게 세계적인 불평등과 권력 불균형을 초래하는 지를 알 수 있다. 주변부에서 자원과 노동력을 추출해 선진국의 중심으로 부를 이동시키는, AI 생산 네트워크에 드리워진 오랜 제국주의적 유산을 만날 수 있다.

또한 AI 시스템의 본성과 구조도 알게 된다. AI 시스템은 우리가 '사유'라고 부를 만한 과정 없이도, 사고와 비슷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오늘날 AI가 일반 지능처럼 보이는 것은 데이터셋의 크기와 연산 능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챗 GPT같은 LLM은 데이터 기호의 통계적 관계만을 분석할 뿐, 그 기호의 의미에 대한 참조점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LLM은 종종 명문대를 졸업한 정치 엘리트층과 비슷하다. 겉보기에는 유창하고 그럴듯한 정보를 늘어놓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정확한 내용이 많으며, 사회의 편향과 권력 불균형을 그대로 반영한다.

AI 생태계의 노동자들은 로봇처럼 일하면서 정작 기술의 혜택에서는 소외되어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기술의 진보 뿐만 아니라 그 기술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새로운 상상력이다.

저자들은 AI 네트워크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경제적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다섯 가지 실전 전략을 제안한다. 이 전략들이 함께 실행된다면, 인간이 AI를 위해 일하는 세상이 아니라, AI가 인간을 위한 도구가 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최소한 저자들은 그렇게 믿는다.

1. 노동조합과 노동자 조직의 힘을 강화한다.
2. 시민사회가 조직적으로 기업을 견제하고 책임을 묻는다.
3. 엄격한 규제를 도입한다.
4. 노동자들이 기업을 직접 소유하거나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모색한다.
5. 기업을 넘어서 전체 시스템의 불평등과 부정의에 맞선다.

AI 시스템은 우리의 노동, 아이디어, 예술, 물, 에너지, 데이터, 그리고 필수 광물을 원한다. 이 모든 것은 거대한 AI 추출 기계에 투입되어 생산, 권력, 이윤으로 전환한다. 시스템을 만든 것은 자본주의이며, 자본주의는 경제를 소수가 사적으로 소유하고 통제하는 사회다.

AI 시스템은 자본주의의 본질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권력을 소수에게 집중시키고, 식민주의의 권력 구조를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한다. 노동을 단순화하고 강도를 높여, 노동자들로부터 더 많은 이윤을 추출한다. 가장 저렴한 노동력과 자원을 찾아 생산지를 세계 곳곳으로 끊임없이 이동한다. AI는 글로벌 자본의 도구를 넘어, 이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필수적인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방향의 기술 활용을 상상할 수 있다. AI가 노동을 자동화하고, 희소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며, 과학 연구를 발전시키는 세상 말이다. 그러나 이런 미래는 몇몇의 선의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AI 시스템을 가능하게 해온 사회적 관계 자체를 재구성하기 위한, 전 세계적인 연대가 필요하다.



2023년 'AI 지도책'을 읽었다. 내가 읽었던 여러 AI 관련 책 중에서 가장 명쾌하고 인상적인 책이었다. AI에 대해 많은 의문을 품고 있던 나에게 AI 시스템 세계의 속성과 구조와 본질을 보여주는 '지도책'이었고, 나의 2023년 최고의 책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 'AI는 인간을 먹고 자란다'를 읽었다. 'AI 지도책'에서 만났던 많은 문제의식을 다시 만났다. 이 책은 많은 부분 AI 지도책과 겹치는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두 책은 각자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두 책 모두 AI의 속성과 사회적, 정치적 구조를 다루면서도, AI 학자인 '케이트 크로퍼드'가 지은 'AI 지도책'이 AI의 본질에 대해 좀 더 깊고 넓게 다루는 반면에, 'AI는 인간을 먹고 자란다'는 AI의 노동 문제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쉽고 명확하게 쓰고 있다.

'AI 지도책'은 AI의 본질을 꿰뚫는 심층적인 깊이와 명료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강하게 추천을 할 수 없었다. 문장은 불친절하고, 어휘는 매끄럽지 못했다. IT 관련 상식을 어느 정도 갖추지 못한 사람에게는 헷갈리고 혼란스러운 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이 책은 매우 쉽고 명료하다. 노동의 관점에서 AI를 이야기하면서도, AI의 다른 여러 모습들을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일상의 언어를 사용하며 쉽고 간단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IT 적인 상식과 지식이 부족하더라도 편하게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의 커다란 장점이다.

쉽고 편하게 설명하면서도 예리한 통찰력을 놓치지 않고 있다. 때문에 부담 없이 추천한다. 꼭! 읽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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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그랩 - 내 정보를 훔치는 빅테크 기업들
울리세스 알리 메히아스.닉 콜드리 지음, 공경희 옮김 / 영림카디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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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이윤의 축적을 통해 존재한다. 이를 위해 투입 요소의 가격을 낮추고 공급을 늘려야 한다. 즉, '자연, 노동, 돌봄, 식량, 에너지, 돈, 생명'을 적은 비용으로 최대한 많이 '추출'해야 한다. 그런데 국가 경제의 한계 안에서는 이것이 지속될 수 없다. 이를 위해 자본은 언제나 '외부'를 필요로 하고, 여기서 '식민지'가 들어온다.

식민주의는 자본주의하에서 늘 완벽하게 작동했다. 식민지의 추출과 수탈은 내 땅이 아닌 멀리 떨어진 남의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무관심 속에서 '안전하게' 이루어진다. 대신 원거리 운송 비용 등으로 인한 수익성의 제약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거리의 제약을 받지 않는 새로운 식민지를 발굴했다. 그것은 바로 '규제 없는 데이터 추출'이다. 그리고 그 식민지에서 우리는 데이터 발전소(發電所)다.



식민주의는 다른 시대, 다른 지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시행되었지만, 마지막에는 늘 같은 결과를 낳았다. 토지와 부와 노동력의 강탈. 식민주의는 수 세기에 걸쳐 전개된 과정이며, 그 영향은 계속되고 있다. 식민 지배 국가는 부의 축적으로 혜택을 계속 누리고 있고, 식민지는 빈곤, 폭력, 기회 부족이라는 형태로 그 피해를 계속 안고 있다.

오늘날 식민주의는 데이터라는 새로운 자원에 대해 수탈을 가속하고 있고, 그 자원은 바로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서 추출되고 있다. 데이터 수탈이라는 이 신종 자원 수탈은 식민주의의 특성들을 고스란히 보이고 있다. 빅테크 기업들의 개척과 확장은 데이터화된 삶이라는 가상의 영토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이런 식민지화에서 벗어난 영역이나 활동은 거의 없다. 세계 구석구석 그 기술과 플랫폼이 뻗쳐 있다.

하지만 이 영토 점령은 시작에 불과하다. 일단 식민지가 설립되면, 거기서 지속적인 자원 수탈 시스템이 작동한다. 빅테크는 우리 모두의 삶을 추적한 데이터로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얻는다. 페이스북, 유튜브, 왓츠앱, 인스타그램, 위챗, 틱톡 등에서 추출된 데이터는 빅테크에게 전례없는 부를 창출하고 있다.

역사에서 식민지의 말살은 다양한 형태를 띠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원주민 1억 7천 5백만 명이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미국인들의 손에 죽었다. 인도에서 1억 명이 영국인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아프리카에서 3천 6백만 명이 노예선에 실려 대서양을 건너다가 사망했다. 알제리에서 백만 명이 프랑스인들에게, 인도네시아에서 수십만 명이 네덜란드인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로 집계되지 못한 이들도 수백만 명에 달한다.

하지만 말살은 야만적이고 물리적인 폭력만 있는 게 아니었다. 플랜테이션은 식민지의 자급자족 능력을 말살했고, 강제적인 공산품 공급은 식민지의 산업을 황폐화시켰다. 경제적, 문화적 말살은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지만, 강력한 문명의 전파를 통해 식민지인들의 육체뿐 아니라 마음과 정신도 통제할 수 있게 만든다. 과거에는 기독교와 서구 과학이 문명 전파의 토대였다.

이제는 빅테크가 기술과 사업 목적이 섞인 문명 전파를 시행한다. 삶의 편리성, 인간보다 뛰어난 과학과 인공지능. 선택받은 소수에게 이런 꿈은 현실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유년기 상실, 새로운 노동 착취, 개인 정보의 통제권 상실이라는 악몽이 될 것이다. 문명화라는 선물의 저변에는 새로운 형태의 감시, 프로파일링 기반의 차별, 저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심화되는 착취가 도사린다.

식민주의는 세계 자원을 '그저 거기 있으니' 강탈했다. 오늘날 빅테크들은 그저 거기 있으니, 데이터의 형식으로 인간의 삶을 강탈한다. 그리고 그 수탈은 과거에도, 오늘날에도 국가와 기업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식민주의는 늘 착취하는 특권층과 착취당하는 노동 대중 사이에 극심한 불평등을 일으켰다. 데이터 식민주의는 새로운 불평등을 조장하고,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포함한 오랜 불평등을 재연하고 심화시킨다. 그리고 식민주의는 늘 약탈을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위장하고 포장한다.

'역사적 식민주의'와 '데이터 식민주의'라는 용어는 마치 전자가 끝나고 후자가 시작되는 듯한 오해를 부른다. 그렇지 않다. 식민주의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데이터 식민주의는 역사적 식민주의의 단절이 아니라, 그 연장이고 진화이다.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은 식민주의와 함께 등장했다. 저항은 모든 곳에서, 모든 삶에서 일어날 수 있다. 그 모든 저항은 하나의 공통 분모를 갖는 것이 중요하고, 그 최대의 무기는 바로 상상력이다.

데이터 탈식민주의는 데이터를 수집하는 수탈 모델의 해체를 뜻한다. 삶을 강탈의 영토로 삼아 수익만 추구하는 것을 거부하고, 데이터를 집단의 도구로 전환해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기술뿐 아니라 사회, 정치, 규제, 문화, 과학, 교육에 걸쳐 지금까지와는 다른 해답을 찾아야 한다. 데이터 식민주의 시스템에 대한 저항은 시스템의 안에서, 시스템에 맞서서, 시스템을 넘어서, 동시에 세 수준에서 일어나야 한다.

존재 방식을 다시 규정할 때 첫걸음을 디딜 주체는 식민자가 아닌 피식민자다. 빅테크 기업과 정부가 아닌 우리가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그려야 한다.



그래, 대충은 알고 있었다. 우리의 사생활과 개인 정보가 얼마나 무방비하게, 광범위하게, 무차별적으로 수집 되고 있는지. 내 정보는 공개 정보이고, 나는 데이터 소스라는 것 정도는. 이 재미있고 신기한 AI 세상이 뒤로 감추고 있는 오류와 편견과 왜곡 정도는. 그러나 몰랐다. 그것이 '수탈'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수탈의 능력이 얼마나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지를. 내가 데이터 소스를 넘어서 데이터 발전소로 가동되고 있다는 것은.

그냥 어쩔 수 없는 삶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문명 세계'를 살아가는 비용이라고 생각했다. 지문 날인처럼, CCTV처럼 이 사회를 살아가는 비용이라고 생각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걸쳐진 유니폼 정도로 여기며 적응했다. 그리고 그 편리함에 파묻혔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들은 달랐다. 공저자 중 한 명은 멕시코계 미국인이다. 수 백 년 간 수탈당하고 착취당해온 역사의 DNA 덕분일까? 피식민자의 피 흘린 감수성에 힘입었을까? 저자들은 이 풍요롭고 편리하고 효율적인 세상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여전히 계속되는 식민주의를 읽는다. 모두가 찬양하는 이 발전된 세상에서 식민주의의 역사성과 구조를 읽는다. 모두가 환호하는 이 창의적인 세상에서 수집되고 수탈당하는 인간을 본다.

그리고 그 시선은 깊고 예리하다. 화려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테크놀로지의 이면을 그들은 본다. 그들의 시선은 단지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다양한 분야의 많은 이름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모두 저자들과 같은 관점을 갖는 것도 아닐 터이고, 저자들과 같은 생각을 갖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저자들의 의견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그들 각각의 시선과 관점은 나름의 독특함과 번뜩임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과 생각은 저자들의 관점에 단초를 마련하고, 일단을 제공하고 있다. 저자들은 그 각각의 지혜를 디딤돌삼아 '데이터 식민주의'라는 프레임을 구축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식민지를 보여준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지속적이고 광범위하고 파괴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철도를 깔고, 도로를 짓고, 항만을 건설했다. 그걸 누군가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라고 이야기한다. 작가 황석영의 표현을 빌면 '도적놈이 남기고 간 사다리'가 우릴 부자로 만들었다는 얘기다.

1945년 미군정은 포고령 1호를 통해 자신들이 일본 제국주의를 대신해 38선 이남을 '점령'한다는 것을 선포했다. 2025년 트럼프는 한국에게 '중국을 견제하고, 미국의 정치·경제·군사적 이익을 보호하는' 주한미군을 위해 매년 13조원을 내라고 강요한다. 어떤 이들은 그 은혜에 감읍하여, 성조기를 흔들며 거리를 누비고 있다.

이제 우리들 한 명 한 명은 데이터 소스이자, 데이터 발전소로 매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에서 추출한 그 데이터를 빅테크 기업들은 우리에게 되팔고 있다. 우리는 이 편리하고 신기한 문명 세상에서 풍요롭고 창의적인 5차 산업 혁명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 얼마나 환희에 빛나는 시대인가? 

나는 노래하고 싶다. 남인수가 불렀던 그 노래 '감격 시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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