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머신 - 바다는 어떻게 세계를 만들고 생명과 에너지를 지배하는가
헬렌 체르스키 저자, 김주희 역자, 남성현 감수 / 쌤앤파커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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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야기는 하나로 향한다. 인류의 미래.

물질과 자연과 세계에 대한 이야기의 귀결은 결국 하나다. 인류의 미래. 모래, 소금, 철, 구리, 석유, 리튬의 여섯 가지 물질에 대한 이야기도, 바다에 대한 이야기도 인류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 끝난다. 그만큼 우리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이겠지.

우리가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몰라서 그런 거다. 우리가 무지해서 그런 거다. 우리가 추상과 관념과 사변의 하늘을 노닐고 있을 때, 우리 발밑의 지구는 허물어지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모를 뿐이다. 오직 아는 사람들만 모색하고 있다. 인류와 지구가 살아남을 방법을.

'블루 머신'은 해양과학자이며, BBC 다큐멘타리 진행자인 '헬렌 체르스키'가 지은 책이다. 태양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원료로 지구를 순환하며 조절하는, 바다라는 지구의 엔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바다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바다가 지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건지, 인간과 바다가 어떻게 연결되는 건지 알려주고 있다.

이야기는 재미있다. 전혀 모르던 바다의 생리에 대해서 듣게 되니 재미있다. 게다가 그냥 바다 이야기도 아니다. 바다가 어떻게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발목을 잡았는지, 스코틀랜드의 청어 소녀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파도를 어떻게 피해갔는지 등 인간의 삶과 연관해서 바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근데 마냥 재밌기만 한 건 아니다. 문과 남자인 나로서는 이야기 중간 중간에 나오는 화학과 물리와 지구 과학에 관한 (것으로 추정되는) 설명들이 버겁다. 학생 때도 들어보지 않은 자연과 물질의 원리를 늙어가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저자는 BBC 다큐멘터리 진행자답게 쉬운 언어로 쉽게 설명하지만, 그래도 기계치이자 과학맹인 나에게는 버겁다. 다행인 건 교과서의 별나라 이야기처럼 어렵지는 않다는 것이다. 붙들고 버티면 얼추 짐작하며 넘어갈 수 있다.

책을 끝까지 읽었지만 사실 기억나는 건 없다. 초반에는 정리하며 읽으려고 했지만 금방 포기했다. 일단 지나가고, 기회가 생기면 한 번 더 읽어봐야겠다. 그때는 내 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정리가 가능하리라 기대한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그리고 인상적인 것은 바다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다. 그리고 인류의 미래에 대한 저자의 전망이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이야기는 인류의 미래로 귀결된다.


우리는 인간이 호기심을 품고 거친 해수면을 바라보는 독립적인 관찰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인간은 거대하고 푸른 액체형 메커니즘의 기슭에 서식하는 작디 작은 개미에 불과하며, 이 메커니즘이 도출하는 결과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바다를 깊이 들여다보는 것은 지구의 거주민이 된다는 개념이 무슨 의미인지 고찰하는 것이다. 먼 우주의 관점에서 인류의 이야기는 햇빛이 지구에 도착하며 시작된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빛이 되어 우주로 떠나면서 끝이 난다. 우리는 바다다.

인류는 유한한 행성에 살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고, 자신을 생존하게 하는 지구의 생명유지시스템에 대한 별다른 고민 없이 성장과 소비에 기반한 문화를 구축했다. 뿐만 아니라 자연 세계와의 관계를 상실하면서 자연이라는 거대한 존재의 구성 요소가 되는 기쁨과 경이로움을 잃었다.


지식과 이해는 우리에게 선택지를 제공한다. 인류가 바다에 초래한 문제(따라서 간접적으로 우리 자신에 초래한 문제)를 떠올리면 우울감을 느끼기 무척 쉽지만 이런 감정이 무관심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행동해야 하고, 행동에는 열정과 에너지와 결단력이 필요하다. 이를 실현하는 일이 가능한지 의문이 든다면 지난 50년 동안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떠올려보자. 우리가 변화를 일으키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우리는 바다가 변함없이 지구의 생명유지시스템에서 건강한 심장 역할을 하는 미래를 원한다. 그러한 미래를 위해 희생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지구 뿐만 아니라 인류에게도 나은 시스템은 분명 존재한다. 우리는 화석연료 중독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는 더 나은 세상을 향해 가는 길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실천해야 할까? 첫 번째이자 가장 큰 과제는 바다가 있는 지구의 거주민으로서 인간이 어떤 상태에 놓였는지 배우고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행동에 나서야 한다. 바다가 직면하는 문제는 개인의 잘못된 행위가 아닌 인간 사회 시스템에서 유래한다. 전체적인 그림을 고려해야만 인류 문명은 문제를 바로잡고 거대한 지구의 생명유지시스템과 공존할 수 있다. 인류는 지구에 탑승한 승무원이기에 모두 실천할 수 있다.

실천은 정치인에게 편지를 쓰거나, 투표권을 행사하거나, 물건을 구매하면서 우선시하는 가치를 분명히 표현하거나, 작은 지역적 결정이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는지 확인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진다. 참여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하다.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변화를 실현할 수 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어떤 사람이 되기로 하는가? 지구의 특징을 자기 삶에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며 푸른 행성의 거주민이 되기로 선택하는가? 아니면 외면하는 쪽을 택하는가? 우리 모두 바다로 둘러싸인 지구의 거주민이다. 인류는 푸른 기계와 어떻게, 얼마나 강하게 관계를 맺을지 선택해야 한다. 바다를 무시하는 쪽은 택할 수 없다. 바다는 인간을 포용할 수도, 파괴할 수도 있다. 인간은 바다와 함께 일할 수도, 바다에 맞설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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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없이도 생각할 수 있는가 - 식물에서 발견한 새로운 지능의 미래
파코 칼보 지음, 하인해 옮김 / 휴머니스트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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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지능'이란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것은 영리한 말 '한스' 때문이었다. 나는 인공지능의 실체를 다룬 문제적 책, 'AI 지도책(케이트 크로퍼드 저)'을 통해서 한스를 알게 되었다. 한스는 '산수 문제를 풀고 시계를 볼 줄 알고 달력의 날짜를 판독하고 음을 구별하고 단어와 문장을 표현'했었던 영리한 말로, 19세기 말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학자들의 조사 결과 이것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한스는 실제로 문제를 푼 것이 아니라 질문자의 호흡, 표정, 자세 등을 읽고서 질문자가 원하는 답을 한 것이었다. 한스의 주인은 사기꾼으로 몰렸고, 한스는 군마로 팔려나가 전쟁터에서 죽었다.


한스 이야기로 책을 시작하면서 케이트 크로퍼드는 지능에 관한 우리의 두 가지 환상을 지적한다. 첫째, 훈련과 자원만 충분히 투입하면 세계와의 관계 맺기 없이도 인간 지능을 백지 상태에서 만들 수 있다는 환상. 둘째, 지능이 자연, 사회, 문화, 역사, 정치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환상. 한스는 이미 다른 종과의 소통, 공연, 높은 인내심 같은 놀라운 위업을 선보였지만 우리는 이것을 지능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지능을 너무 편협하게 인식한다. 우리는 지능을 물질 세계와 무관한 컴퓨터 같은 것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이 책 '뇌 없이도 생각할 수 있는가'를 읽으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지능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한다. 저자 파코 칼보는 인간과 동물을 넘어서 식물지능에 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뉴런이 지능을 일으키고 의식의 중심에 뇌가 있다는 도그마에 갇혀 다른 종류의 내부 경험을 잘 상상하지 못한다.


AI 지도책이 말하는 것처럼 지능이 의식적, 계획적으로 세계와의 관계를 맺는 것이라면, 식물의 지능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봐야 할 터이다. 식물이 무기력하고 정적인 존재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식물이 자연 세계와 어떻게 상호작용 하는지, '식물의 관점'으로 살펴봐야 할 때다.


적응이 특정 정보 입력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응이라면, 인지 행동은 유연하고 예측적이고 목표지향적인 행동이다. 학습과 기억, 위험 대응 행동의 수학적 능력에 이르기까지 식물은 인지 과정에 의한 행동을 한다. 식물은 학습을 기억할 수 있고, 다양한 통로를 통해 다른 종과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스스로 내린 선택의 위험성을 판단할 수 있다.


지능에 관한 컴퓨터 메타포는 생각이 체스 게임에서 이루어지는 엄격한 데이터 처리와 비슷하다고 상정한다. 하지만 컴퓨터의 능력은 결국 초 당 얼마나 많은 지시를 처리할 수 있는 지가 관건이다. 이는 생물학적 지능과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다. 식물과 유기체는 가시적인 상호작용의 망에 자리한 물리적인 존재이다. 식물의 인지는 환경과의 여러 역동적이고 연속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목적 지향적 행위이다. 식물의 생각은 생태적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물리적 변화를 통해 이해해야 한다.


식물은 같은 환경에 놓이더라도 개체마다 다르게 행동한다. 이는 식물 역시 우리가 성격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자질을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동물들도 인간처럼 성격을 지녔으며 개체마다 일정하게 보이는 행동 양상이 다르다는 생각은 비교적 새로운 발견이다. 식물에 성격이 있을 가능성에 주목한 과학자는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식물 성격 연구가 시작되고 있다.


식물이 의식을 지녔는지는 아직 확정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의식이 없다고도 단정할 수 없다. 동물은 뇌와 신경절에서 통합된 신경들의 전기 활동이 의식을 일으킨다고 여겨진다. 신경이 없는 식물은 관다발 세포로 이루어진 긴 관들이 뿌리에서 잎까지 서로 연결되어 신경과 같은 기능을 한다.


식물이 지능을 갖추었고 주변을 인식할 수 있다면 식물에 대한 윤리적 문제에 마냥 눈 감고 있을 수는 없다. 마취제와 어둠은 인간과 동물 뿐 아니라 식물에게도 마취와 졸음의 효과를 일으킨다. 우리 자신이 다른 존재의 고통을 고민하는 존재라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모든 유기체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식물이 의식을 지녔을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식물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생각을 가두는 껍데기를 깨려면 새로운 질문들을 받아들이며 우리와 함께 하는 존재들의 본질을 상상해야 한다. 식물로 존재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인간으로 존재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에 관해 많은 걸 깨달을 뿐 아니라 유기적 세계를 망가트리지 않고 유기체들과 공존하는 방식들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식물의 지능에 대한 가설과 추론을 담고 있는 책이다. 책에 의하면 식물의 지능은 다수의 학자들에게 인정받는 정론이 아니라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가설이다. 나로서는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다. 논리적이고 설득력있는 주장에 솔깃하면서도, 직관을 벗어나는 파격적인 주장이 낯설기도 하다.


이 책은 '빛을 먹는 존재들'이란 책을 살피다가 알게 되었다. 기자 출신의 작가가 쓴 그 책을 미리보기로 살펴보니 은유적이고 수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식물지능에 관한 책이면서 과학자가 쓴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다. 다 읽고 난 지금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빛을 먹는 존재들'은 여전히 보관함에 올라 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렸을 때부터 혼자 가끔 품었던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혹시 지구도 살아있는 것 아닐까? 지구는 살아있으면서도 우리 인식을 벗어가는 거대한 생명체이기에 우리의 인식 능력으로는 지구를 생명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지구가 생명이라면 우주는 더 거대한 생물이고, 어쩌면 지구는 우주의 세포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의 감각은 너무나 작고, 우리의 시간은 너무나 짧아서 우리는 지구와 우주라는 영겁을 살아가는 거대한 생물의 작동 방식을 감지조차 못하는 것 아닐까?


물론 내 생각은 근거 없는 공상에 불과하다. 이 책의 주장처럼 근거와 논거를 갖고 오랜 실험과 연구 끝에 내놓는 체계적인 가설이 아니다. 그럼에도 내 공상이 책의 주장과 비슷한 출발점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인식 능력이 모든 것을 파악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인간은 지식과 지혜와 진리를 향해 끊임없는 도전을 하며 자신의 틀을 넓혀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틀 안에 갇혀있는 미미한 존재다. 우리는 지식과 세계 앞에  겸허해져야 한다. 그리고 상상력을 해방해야 한다.


저자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생물학자가 아니다. 저자는 철학자이면서 과학자이다. 그는 식물의 지능에 대해 단순한 실증(實證)을 넘어 넓은 사유를 동반한 통합적인 자세로 접근한다. 그리고 식물의 지능에 대해 논하면 결국은 마주할 수 밖에 없는 고민을 던진다. 채식주의의 윤리 체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사실 정답은 없다. 우리는 다른 생명체의 생명을 갈취해야만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고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존재다. 그것은 악이 아니다. 생명은 자연의 순환이다. 우리의 생명도 순환의 일부이다. 우리는 생명과 죽음 앞에서 겸허하게 살아가면 되었다. 그러다가 자연의 순환을 넘어서는 자본주의의 대량 생산, 대량 도살 시스템이 정착되었다. 이제 삶이 죄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길을 찾기 어렵다. 동물 복지는 동물의 고통을 줄여주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벽이 너무 높다. 채식주의는 윤리적으로 안전했지만, 이제는 자유롭지 못하다. 자본주의는 멈출수 없다. 인류를 파멸로 내모는 기후 위기 앞에서도 우리는 멈추지 못한다. 고작 동물이나 식물의 고통 따위 때문에 멈출 리가 없다.


나는 무기력하다. 그저 고민할 수 밖에 없다. 내가 다른 생명에게 주는 고통에 대해서. 자본주의가 멈추지 않는 것처럼 나의 고민도 멈추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겸허해져야 한다. 그것이 지능이라는 마음을 가진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 아닐까? 부끄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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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전쟁 - 우리는 왜 이 전쟁에서 실패를 거듭하는가
요한 하리 지음, 이선주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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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전쟁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마약에 대한 전쟁으로, 국가가 마약 사용자 그리고 중독자와 벌이는 전쟁이다. 또 다른 하나는 마약을 위한 전쟁으로, 범죄자들이 마약 거래를 장악하기 위해 서로 싸우는 전쟁이다.


1930년, 알코올과의 전쟁을 벌이다 대패하여 의기소침해진 미국 연방마약국의 수장으로 '해리 엔슬링어'가 임명되었다. 해리는 흑인, 멕시코인, 중국인들이 화학물질을 사용하면서 그들의 위치를 망각하고 백인을 위협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재즈를 대마초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또 다른 증거라고 여겼고, 중국인들이 백인 소녀들을 아편굴로 끌어들여서 타락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약을 몽땅 뿌리 뽑겠다고 다짐했다.

마약 판매가 불법이 되기 전 마약 복용자들은 동네 약국에서 모르핀과 헤로인 등 아편제를 싸게 구입했다. 1914년 헤로인과 코카인을 금지하는 해리슨마약법이 제정되었지만, 대법원은 마약 중독자들을 처벌이 아니라 의사의 진로에 맡겨야 한다고 판결했고, 의료 전문가들은 마약을 계속 처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리는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무료 진료소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다. 2만 명 정도의 의사들이 기소되었고, 95퍼센트가 유죄판결을 받았다.

의사들을 제압한 후 해리는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을 위태롭게 하기 위해 마약을 대량으로 유입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마약과의 전쟁을 전 세계에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엔을 찾아가 다른 나라들을 위협했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마약이 합법적으로 판매되고 있었지만 1960년대가 되자 모든 나라에서 마약이 금지되었다.

해리 엔슬링어가 30년 가량 연방마약국 국장을 지내는 동안 마약과의 전쟁은 전세계로 확대되었고, 지금까지 100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그 동안 두 가지 범죄가 급증했다. 첫째, 마약을 밀수하는 폭력 조직이 생겨났다. 둘째, 마약 가격이 10배 이상 뛰었고, 중독자들이 마약을 계속 얻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강간범을 많이 체포하면 강간사건이 줄어든다. 폭력적인 인종주의자를 많이 체포하면 인종차별 폭력이 줄어든다. 그런데 마약상을 아무리 많이 체포해도 마약 거래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대신 살인이 늘어난다. 새로운 두목 자리를 놓고 전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약이 금지되면 도덕적 제약을 가장 먼저 버리는 사람이 마약시장을 장악하게 된다.

2006년부터 2012년의 멕시코 마약 전쟁 기간 공식적으로 최소 6만 명 이상이 사망했고, 현재까지 누적 사망자 수는 수십 만 명인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에서 마약 사건으로 압류한 소유물은 경매로 처분할 수 있고 그 수익의 80퍼센트는 지역 경찰의 예산으로 들어간다. 어느 시기든 미국에서는 15~35세 흑인 남성의 40~50 퍼센트 정도가 감옥에 있거나, 보호관찰을 받거나, 구속영장이 발부된 상태다. 그들 중 마약사범이 압도적으로 많다.

마약에 반대하는 관료들로 구성된 미국 정부가 벌인 '마약에 대한 전쟁'은 결국 최근 몇 세기 중 가장 강력한 '마약을 위한 전쟁'을 만들어냈다. 마약은 '의사들 손'에서 '폭력배들 손'으로 옮겨갔고, 마약 중독은 공중보건의 문제에서 형사사법의 문제로 변화했다. 연방마약국이 마피아의 뇌물을 받고 무료 진료소를 폐쇄했다고 주장한 의사 '헨리 윌리엄스'는 마약과의 전쟁이 계속된다면 미국에서 마약 밀수 사업의 규모가 50년 안에 50억 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의 예측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마약 사용자 중 90퍼센트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일상의 생활을 잘 해나간다. 문제를 일으키고 중독에 빠지는 사람은 10퍼센트 정도다. 마약 중독은 어린 시절의 정신적 외상과 깊은 관계가 있다. 어린 시절에 정신적 외상을 겪은 사람들은 평생 자기혐오에 빠져 사는 경우가 많고, 그런 사람들 중 많은 수가 환각 물질을 찾아서 의지하게 된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그들의 땅과 문화를 빼앗겼을 때 집단 알콜중독에 빠졌다. 18세기 영국의 가난한 사람들은 살던 땅에서 쫓겨나 도시로 내몰렸을 때 알콜중독에 빠졌다. 1970, 80년대 미국 저소득층 주민들은 공장의 일자리를 잃고 코카인을 피우기 시작했다. 1980, 90년대 미국 농부들은 농산물 시장이 쪼그라들자 약물에 빠져들었다.

사람들은 사회적, 문화적으로 고립감을 느낄때 위안거리를 찾고 중독에 빠진다. 중독은 화학물질이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중독은 외로움 때문에 생기는 질병이다. 중독은 적응의 문제다. 중독자들은 마약 때문에 부적응을 겪는 것이 아니라 부적응 때문에 마약에 의지한다.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의 문제다.

배트남전 종전 직전 미국 사회는 베트남에서 마약이 중독된 수많은 군인들이 돌아오면 거리마다 마약중독자들이 넘치게 될 것을 걱정하였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돌아온 중독 군인들의 95퍼센트는 1년이 되지 않아 그냥 마약을 끊었다.

스위스는 헤로인 처방 진료소에서 중독자가 원하는 헤로인을 받을 수 있다. 처음에 대부분의 중독자들은 점점 더 많은 양의 헤로인을 요구한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면 대부분의 중독자들은 투여량을 줄여간다. 마약중독자들은 얼마든지 오랫동안 이 진료소를 이용할 수 있지만, 평균 3년 정도만 찾아온다. 그 기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매일 마약을 찾는 사람은 15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진료소가 문을 연 후 헤로인 처방을 받은 사람들의 차량 절도는 35퍼센트, 강도와 도둑은 80퍼센트 줄어들었다. 마약 판매는 94.7 퍼센트 즐어들었고, 노숙자가 사라졌다. HIV 신규 감염자 중 마약 주사 비율이 68퍼센트에서 5퍼센트로 감소했다. 마약중독자 한 명을 체포하고 처벌하는데 하루 44스위스프랑이 들어가지만, 헤로인 처방 진료소는 환자 한 명당 하루 35스위스 프랑의 비용을 들인다.

1974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포르투갈에서는 2001년 마약 혁명을 일으켰다. 이제 포르투갈에서는 마약 사용자와 중독자에 대한 박해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마약 판매는 불법이지만, 마약 사용은 금지되지 않는다. 미국과 반대로 마약 예산의 90퍼센트를 예방과 치료에 사용하고 10퍼센트만 처벌에 사용한다.

10년이 지난 후 포르투갈의 마약 사용률은 유럽 평균보다 낮고, 이웃한 스페인보다 훨씬 낮다. 마약을 주사하는 사람은 절반으로 줄었고, 주사로 인한 HIV 감염률은 52퍼센트에서 20퍼센트로 떨어졌다. 중독자가 줄어들었고, 헤로인 사용은 절반으로 떨어졌다.

중독은 처벌해야 할 범죄가 아니라 치료해야 할 질병이다. 중독의 반대는 마약 끊기가 아니라 관계 맺기다. 혼자라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사랑을 받고 있다면 가능성이 있다. 중독은 절망의 표현이고, 절망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좋은 치료 방법이다. 이런 치유의 노력을 무너뜨리는 것이 바로 마약과의 전쟁이다. 마약 전쟁은 중독자들과의 전쟁이 아니라 중독의 원인에 대한 전쟁으로 바뀌어야 한다.

해리 엔슬링어는 한때 정신이 쇠약해져 병원에 입원했을 정도로 편집증에 시달리던 사람이었다. 그는 나중에는 그 자신이 마약 사용자가 되었다. 그리고 마약상 역할을 했다. 그는 마약과의 전쟁을 시작했지만 마약중독자인 매카시 의원에게는 몰래 마약을 공급했다. 은퇴 후 협십증에 걸리자 그는 매일 모르핀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설득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설득되고 싶었다. 인종, 불평등, 지정학처럼 복잡하고 심오한 문제들을 몇몇 가루와 알약의 문제로 치부해서 세상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다. 그런 일은 십자군 전쟁부터 마녀사냥, 그리고 오늘날까지 되풀이되고 있다.

해리가 물러나고 벌어진 1970년 토론회에서 정신과 의사 '조엘 포트'는 해리 엔슬링어를 바라보며 말한다. '당신은 이 나라가 과학적으로 논의해야 할 문제를 중세와 같은 방식으로 다루도록 이끌어왔어요.'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마약과는 무관한 나의 10대 시절을 떠올리게 되었다. 유독 사춘기의 방황이 심했던 주변의 몇몇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감수성'이 매우 예민한 사람들이라고 느꼈었고, 그들에 대해 혐오나 분노보다는 연민의 감정을 느꼈었다. 그 후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기억들은 다 잊혀졌고, 나는 10대를 보면 눈쌀을 찌푸리며 외면하는 아저씨가 되었다.

내가 마약에 대해 아는 것은 소설과 드라마와 영화와 미디어를 통해 접한 것이 전부다. 마약 복용자나 중독자를 실제로 접한 적도 없고, 마약의 폐해를 실제로 목격한 적도 없고, 마약 판매상을 실제로 본 적도 없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마약은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었고, 그 관점은 고스란히 내 안에 녹아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가끔은 또 다른 관점을 접하곤 했다. 미국 정부가 효과가 전무한 마약 전쟁에 쏟아붓는 어마어마한 재정의 일부라도 마약 치료에 돌리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비판적인 시각.

법정 소설의 대가 '존 그리샴'의 소설 '수호자들'에 따르면 미국의 교도소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거대 고용주이다. '미국에서는 200만명이 넘는 사람이 교도소에 갇혀 있다. 이를 운영하려면 1백만 명의 직원과 800억 달러의 세금이 필요하다.' 미국 교도소의 상당수는 민간 기업이고, 교도소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흑인이고, 그들의 대부분은 마약 사범들이다. 그렇다고 백인들이 마약을 복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내가 느꼈던 것은 미국의 교도소와 인종 문제와 마약 문제는 서로 무관한 듯 하면서도 얽혀 있다는 것이었다.

하루 한 갑씩 30년 간 담배를 피우다가 끊었던 사람으로서 나는 중독에 대한 화학물질의 강한 영향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담배를 처음 피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끊은 지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심리적, 정신적, 문화적 요인이 화학물질 이상으로 중독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에게 마약과 중독자는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다. 낯설고 불편하고 난해한 문제를 접했을 때 제일 쉽고 명확한 건 혐오와 기피다. 답답하고 어려운 건 고민과 성찰이다. 그러나 나는 고민과 성찰이야 말로 인문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겪어본 적도 없이 수십 년 간 혐오와 공포로 다져온 마약 문제,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하는 이 책 '마약전쟁'은 고민과 성찰을 위한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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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쑤기미 - 멸종을 사고 팝니다
네드 보먼 지음, 최세진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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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은 거의 고유 명사다. 자칭 문명 국가의 국민이라면 거의 모두가 알고 있을, 중장년층이라면 숀 코네리나 로저 무어를 통해서, 좀 더 젊은 사람이라면 피어스 브로스넌이나 대니얼 크레이그를 통해서 접했을 그 유명한 '제임스 본드'의 별칭이다. 그러나 본래 007은 고유 명사가 아니다. 살인 면허 번호다.

1953년, 영국 소설가 '이언 플레밍'은 자신의 소설 속에서 살인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는 면허 번호 00을 만든다. 그리고 제임스 본드에게 7번째 살인 면허를 발급한다. 007은 일곱 번째로 발급된 살인 면허 번호다.

상상력을 살짝 열어서 한 발짝만 더 나가보면 어떨까? 살인 면허를 바우처로 발급하면 어떨까? 제임스 본드 아니더라도 누구나 이 살인 쿠폰을 구매할 수 있는 공정하고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거다. 3만 8482유로. 원화로 65,908,506원. 살인의 무게를 생각하면, 이 정도의 금액일지라도 구호만의 평등이 아니라 거의 실효적 평등에 가까운 것 아닐까?

2022년, 영국 소설가 '네드 보먼'은 소설 '독쑤기미'에 그런 세상을 담았다. 다만 살인 면허가 아니라 멸종 면허다. 어떤 생물을 지구상에서 멸종시키고 싶은 회사가 있다면 멸종 크레딧을 구매하면 된다. 너무 비현실적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들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실 세상에서는 이미 '탄소 배출권'이 또 하나의 산업이 되어서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다. 2025년 11월 현재 국내 탄소배출권은 톤당 1만원이라고 한다. 우리는 진작부터 인류에 대한 살인 면허를 거래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포식성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살인도, 멸종도, 지구 파괴도 모두 시장으로 집어 삼킨다. 그러면서도 시장의 상인이면서 동시에 손님인 우리들에게 최면을 건다. 우리는 자신이 시장의 일원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멸망으로 달려가는 세상을 바꾸는 대신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아주 능숙하다. 이 책에서도 그렇다. 세계멸종위원회는 '멸종'의 기준을 바꾸려고 한다. 어떤 종이 지구상에서 모든 개체가 사라지더라도, DNA 스캔, 행동 기록, 서식 자료가 남아 있다면 그 종은 멸종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 멸종은 그저 산업일 뿐이다. 사람도, 생명도 다 상품인 세상에서 자연마저 상품인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멸종 크레딧으로 투자라는 도박을 하는 것도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헬야드' 또한 그런 평범한 사람의 하나다. 광업 회사 직원인 헬야드의 담당 구역에는 '독쑤기미'라는 멸종 직전의 물고기가 있다. 개발이 시작되면 독쑤기미는 멸종될 것이고, 그의 회사는 해당하는 멸종 크레딧을 납부하면 된다. 독쑤기미의 지능이 없다면 1개, 지능이 있다면 13개를 납부해야 한다. 그를 위해 그는 회사의 멸종 크레딧 13개를 갖고 있다.

세계멸종위원회가 멸종 기준을 완화할 것이라는 계획을 미리 알게 된 주인공은 자신이 관리하는 회사의 멸종 크레딧을 팔고 현금을 챙긴다. 곧 계획이 공표되고 멸종 크레딧 가격이 폭락하면 그때 다시 크레딧을 구입해서 회사에 돌려주면 된다. 일종의 공매도인 것이다. 그는 꿈에 부푼다. 그렇게 그는 영리한 개미 투자자다.

그러나 개미 투자자 위에는 언제나 개미핥기 같은 작전 세력이 있는 법. 주인공이 부자가 될 꿈에 부풀어 있는 어느 날 사고가 터진다. 세계멸종위원회의 데이터베이스 센터가 해킹 당하고, 센터에 보관되어 있던 모든 생물종의 DNA와 자료가 소멸된다. 멸종 크레딧 가격은 폭등하기 시작한다. 주인공의 부자의 꿈은 감옥의 공포로 바뀐다. 주인공은 회사가 알기 전에 어떻게든 13개의 멸종 크레딧을 채워 넣어야 하는 위기에 처한다.

작가 네드 보먼은 1985년생이다. 젊은 나이의 작가 답게 책도 젊고 산뜻하다. 나처럼 칙칙하고 우울하지 않다. 담고 있는 주제는 무겁고 암울해도 이야기의 전개 방식은 경쾌하고 매끄럽다. 이제 낡은 나는 그래서 오히려 몰입하기 어렵고 헷갈렸다. 책에 등장하는 많은 생물종 이름과 유럽의 지역명과 사건들. 그것들이 작가의 지어낸 허구의 것인지 실제의 것들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이야기의 분위기와 감성도 나에게는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반가운 것이 하나 있었다. 영화 '나의 사촌 비니'. 조 페시와 마리사 토메이가 주연한 코메디 영화 나의 사촌 비니가 책의 앞에서 그리고 뒤의 에필로그에서 다시 한 번 거론된다. 어떤 장치로 이 영화 얘기를 넣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젊은 시절 내가 재미있게 봤던, 그러나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1992년 영화를 이 젊은 작가가 의미심장하게 다룬 것 자체가 반가웠다.

책은 블랙 코미디다. 멸종과 환경 뿐만 아니라 인공 지능, 경제 시스템, 미래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관점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나에게는 이야기의 전개가 지루하고 산만했다. 하지만 매번 반복되어 오는 좋은 이야기의 뻔한 책들과 트렌디하고 독특하게 뻔한 책들에 질려있던 나에게 이 책은 그 소재와 주제 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이고 강렬했다.

"동물 학살은 거대한 공동 프로젝트였다. 어쩌면 인류의 기본적인 프로젝트일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이 조금씩 기여하는 자선 활동이나 전쟁처럼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여는 매우 단편적이고 간접적이라서, (...) 희생자의 의식에 깊은 인상을 남길 기회가 없었다." (343쪽)

작가의 모든 생각을 내가 알 수는 없다. 작가의 모든 이야기에 내가 다 공감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에게 깊이 공감하는 것이 있다. 망하는 것은 지구가 아니라 인류다. 인류는 스스로 파멸의 길로 들어섰지만, 자연은 계속될 것이다.

"결국 인류는 종말을 맞이할 겁니다. 그 후 인류가 남긴 상처가 사라질 것입니다. 생물다양성은 다시 회복될 겁니다. 새로운 종들이 탄생할 것이고, 그중 상당수는 사라진 종들만큼이나 놀라운 종이 될 것입니다."(4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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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는 팔레스타인 제노사이드에 침묵하는가 - 잔해 속의 그리스도
문터 아이작 지음, 김상기 옮김 / 동연출판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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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학살이고 인종 청소다. 전쟁이 아니라 반인륜 범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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