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 자본주의에 숨겨진 위험한 역사, 자본세 600년
라즈 파텔 외 지음, 백우진 외 옮김 / 북돋움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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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만물이 그로 인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21세기에 마블 유니버스가 생겨났다. 마블 유니버스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 초인적인 힘을 지닌 슈퍼 히어로들이 필요했고, 그래서 '어벤져스'가 필요했다. 어벤져스는 '지구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지구를 대신해서 복수하겠다. '는 뜻이고, 그 주제는 '어벤저스는 슈퍼히어로 혼자서는 맞설 수 없는 적과 싸운다'는 것이다. 구성원으로는 캡틴 아메리카, 아이언맨, 토르, 헐크, 캡틴 마블, 미스터 판타스틱, 스파이더맨 등등이 있고, 이들의 힘에 의해서 지구는 지켜진다.


15세기에 자본주의가 생겨났고, 자본세(Capitalocene:자본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자본주의는 그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을 저렴한 비용으로 추출해야 했고, 그래서 '프런티어'가 필요했다. 프런티어는 자본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을 만나는 지점이고, 자본가와 국가와 제국의 권력이 자연을 적은 비용으로 동원하기 위해 폭력, 문화, 지식을 활용하는 자본주의에 최적화된 장소다. 그 내용으로는 자연, 노동, 돌봄, 식량, 에너지, 돈, 생명의 7가지가 있고, 이들을 저렴하게 추출해서 세계는 유지된다.


맛보기로 닭과 인간의 자본주의적인 관계를 살펴보자.


오늘날 우리가 먹는 닭은 한 세기 전에 소비된 닭과는 매우 다르다. 오늘날의 닭은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2차 대전 후 유전자를 재조합한 결과물이다.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가슴 근육이 부풀려진 닭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공간에서 몇 주 안에 성체가 되어 도축되는데, 연간 6백억 마리가 넘는다. 이를 '저렴한 자연'의 표지라고 생각하자.


닭고기는 전 지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육류다. 그만큼 아주 많은 노동력이 투입되어야 하는데 미국에서 판매되는 패스트푸드 치킨 1달러당 양계 노동자의 몫은 2퍼센트에 불과하다. 재소자를 시급 25센트짜리 노동력으로 쓰는 양계업자도 있다. 이를 '저렴한 노동'이라고 하자.


미국 가금류 산업에서 날개 자르는 일을 하는 노동자의 80%는 통증에 시달리고 고용주들은 이런 고통을 무시한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다치고 나면 10년 동안 소득이 15% 감소한다. 일을 쉬는 동안 노동자들은 가족과 지원 네트워크에 의존한다. 이를 '저렴한 돌봄'이라고 생각하자.


배는 부르지만 불만족스러운 음식들이 이러한 산업으로 생산되어 싼값에 팔려나간다. 이것이 '저렴한 식량'의 전략이다.


닭을 사육하는 대규모 양계장을 따뜻하게 유지하려면 연료가 많이 든다. 미국 가금류 산업의 탄소 발자국에서 연료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정도다. 프로판, 즉 '저렴한 에너지'가 풍부하지 않다면 저비용 닭은 생산할 수 없다.


한편 가공한 닭고기를 상업적으로 판매하는 사업에는 특권과 보조금이 투입된다. 닭 사료용 콩을 재배할 토지에서 소기업 대출에 이르기까지 공공 자금을 투입해 사적인 이익을 뒷받침한다. 이는 '저렴한 돈'의 한 측면이다.


마지막으로 앞의 여섯 가지를 저렴하게 만드는 것은 동물은 물론이고 여성, 식민지인, 빈민, 유색인, 이주민 같은 인간의 특정 범주를 배격하는 지속적인 쇼비니즘 행위이다. 이것이 바로 '저렴한 생명'이다.


우리의 저렴한 것들은 스스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사회와 자연, 식민지 정복자와 피정복자, 남성과 여성, 서구와 나머지, 백인과 비백인, 자본가와 노동자같은 이분법을 통해서 등장했다. 이 이분법 각각을 통해서 거의 모든 인간과 나머지 자연의 생명이 저렴해졌고, 권력자들은 이 이분법의 경계를 뚜렷하게 유지하는데 모든 힘을 기울여왔다.


노예, 원주민, 여성, 노동자는 애초부터 연결되어 있는 이들 이분법에 맞서 저항해왔다. 자본가들의 전략에 대응해 성공하기 위한 탁월한 가르침 같은 것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본주의 생태계의 산물이고, 이 생태계의 상태 변화를 제대로 다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다행히 라 비아 캄페시나, 흑인생명운동, 장애인권리운동,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운동, 빵과 장미(Pan y Rosas) 등 자본주의의 프런티어에 저항하면서 복합적이고 체계적인 탈자본주의의 대응을 하는 운동들이 있다.저자들은 이 운동들을 보완할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바로 미래의 인간을 포함한 우리 인간이 자본세 이후 지구의 나머지 부분과도 함께 번성할 수 있는 '보상 생태'이다. 보상 생태는 인식, 보상, 재분배, 재상상, 재창조를 포함한 프로그램이다.


책은 매우 의미있고 인상적인 내용들로 가득하다. '왜 세계가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되었는지 그 과정의 역사를 설명하는 책이다.' 그러나 내 지식 수준에서 읽기 편한 책은 아니다. 글이 상세하고 친절하기 보다는 함축적이어서, 많은 경우 '유추'를 해야 했다. 자본주의와 유럽 역사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간결하고 명쾌하겠지만, 내 수준에서는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넘어가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간신히 책이 말하고자 하는 전체적인 주제와 개괄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관찰과, 더 많은 지식과, 더 많은 숙고가 필요할 듯 하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한편으로는 책이 어려운 것에 번역도 약간의 책임이 있는 것 아닐지 의문이 든다. 책에서 사용되는 '보상'이란 단어. 책의 내용 상 보상이 아니라 배상이 되어야 할 것 같다. 'reparation'을 네이버 영어 사전에 찾아보았더니 배상이라고 나온다. 보상과 배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번역자가 과연 이 책의 내용을 온전하게 소화한 것이 맞을까?


재미있는 내용도 많다. 그 중의 하나. 밀은 토양을 걸신들린 듯 집어삼켜 정기적으로 휴경하게 만들고, 그 결과 가축 사육을 하게 만든다. 유럽은 밀을 재배했다. 그 결과로 늘 농업과 축산업을 병행하게 되었고, 육식을 하게 되었다. 쌀은 집중적인 재배 형태로 발전해서 동물을 위한 공간을 내줄 수 없었다. 쌀 재배 지역의 식단에 고기가 그렇게 적은 이유이다.


저자는 라즈 파텔, 제이슨 무어 공저. 그 중 라즈 파텔은 박사이면서 반세계화 활동가라고 한다. 72년생, 나이도 어린데 어찌 그리 똑똑할까? 나 만화책 보면서 희희낙락 거릴때, 그는 공부하면서 싸웠나 보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틈틈이 일본 만화 '진격의 거인'을 봤다. 책이 어렵거나 지루해지면 만화를 보고, 만화로 배가 불러지면 다시 이 책을 읽었다. 진격의 거인은 '일본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러일전쟁을 자위전쟁으로 보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일본의 극우적 가치관을 바닥에 깔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 만화이다. 나도 만화를 보면서 그런 의심이 들었다.


탈자본주의 서적과 일본 우익 만화를 동시에 읽고 있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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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컷들 - 방탕하고 쟁취하며 군림하는
루시 쿡 지음, 조은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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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이고, 흥미진진하며, 놀라운 사실들로 가득하다. 책에 소개되는 풍부하고 다양한 사례들이 나의통념을 깨부순다. 직접 읽어 봐야 이 책의 진정한 재미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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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임 머신 - 수치심이 탄생시킨 혐오 시대, 그 이면의 거대 산업 생태계
캐시 오닐 지음, 김선영 옮김 / 흐름출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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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 시스템에 매몰되어 있던 나를 깨우는 주의깊고 사려깊은 통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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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지도책 - 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케이트 크로퍼드 지음, 노승영 옮김 / 소소의책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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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케이트 크로퍼드는  대학교수이면서 MS 수석 연구원이고, 20년간 AI 관련 일을 해왔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AI라는 이름은 기만적이라고.


그녀는 먼저 한때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말이라는 오해를 받으며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영리한 한스'를 이용하여 우리가 지능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을 지적합니다. 백지 상태의 시스템에서 인간의 지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환상. 지능이 사회, 문화, 역사, 정치등과 무관한 자연적이고 독자적인 존재라는 환상. 


이러한 환상이 마음이 컴퓨터와 같고, 컴퓨터가 마음과 같다는 잘못된 믿음을 줍니다. 또한, AI가 물질세계와의 관계가 모조리 단절된 비실체적 지능이라는 편협한 인식을 심어줍니다.


이 책은 인공지능이 '인공'적이지도 않고, '지능'도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AI는 자율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으며 대규모 데이터 집합과 방대하고 집약적인 훈련 없이는 아무것도 분간하지 못합니다.


AI는 천연자원, 연료, 인간 노동, 물류, 분류를 통해 만들어집니다. 인공지능은 정치적, 사회적 구조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AI를 대규모로 구축할 자본을 필요로 하며, 이러한 이유로 AI는 궁극적으로 기득권에 유리하게 설계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AI는 권력의 등기부입니다.


저자 케이트에게 AI는 지도책입니다. 지도책은 별개의 조각들을 재편집하고 짜맞추어 세계를 다시 읽을 수 있게 해줍니다. AI에서 지형학적 접근법은 인공지능을 추동하고 지배하는 국가와 기업, 지구에 흉터를 남기는 추출식 채굴, 데이터 대량 수집, 이를 떠받치는 불평등하고 착취적인 노동 관행 등을 설명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질문합니다. AI는 무엇인가? AI가 전파하는 정치는 어떤 형태인가? AI는 누구의 이익에 봉사하는가? AI의 피해는 누가 짊어지는가? AI의 이용은 어디에 국한되어야 하는가?


이 책은 읽기에 불편합니다. 문장은 불친절하고, 어휘는 혼란스럽습니다. 번역도 매끄럽지 못합니다. AI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 독자들을 위한 자세하고 친절한 맥락 설명이 부족합니다. 컴퓨터 용어와 일반 영어의 구분도 명확하지 못합니다. 번역은 그 혼란을 더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책을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자신이 객관적이거나 통달했다고 주장하지 않고, 특정 관점을 취하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그 관점은 매우 의미있고, 설득력 있습니다. 저자의 주장에 동의는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무슨 말을 하는 지는 들어봐야 합니다.


 2016년 이세돌과 바둑을 둔 알파고가 AI의 대유행을 불러왔다면, 2023년의 쳇 gpt는 그 유행에 불을 지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AI는 잘 모르지만, 과거 컴퓨터 관련 일을 했던 사람으로서, 저는 이 유행이 석연치 않고 불편합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AI의 신통력을 찬양하고, AI 개벽을 이야기하고, 심지어는 AI 종말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이 AI의 내부적인 동작원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AI의 존재 방식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에게 그것은 마치 미신처럼 느껴집니다. AI 미신. 구글이니 MS니 하는 거대 기업들의 신전에서 제사 지내는 언론 미디어 무당들. 누군가를 흉내내어 말하고 싶어집니다. "하나의 유령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인공지능이라는 유령이." 


이 책은 인공지능을 '추출 산업'으로 규정합니다. 현대 AI 시스템을 창조하려면 지구의 에너지와 광물 자원, 값싼 노동력, 대규모 데이터를 추출해야 합니다.


1장은 현대 컴퓨터에 동력을 공급하는 행위들이 어떻게 지구를 대규모로 변화시키는 지를 살펴봅니다.

2장은 인공지능이 실은 인간 노동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3장은 AI의 데이터를 이용 관행이 개인정보 유출과 감시 자본주의 외에도 윤리적, 방법론적, 인식론적 우려를 낳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4장은 AI 시스템의 분류 행위가 어떻게 위계를 강화하고 불평등을 증폭하는지 말해 줍니다.

5장에서는 속속 도입되는 감정 탐지가 많은 과학적 논란에 휩싸여 있으며, 불완전하고 부정확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6장에서는 AI 시스템이 국가 권력의 도구로 이용되는 방식을 살펴 봅니다.

7장에서는 인공지능이 어떻게 권력 구조의 역할을 하며 하부 구조, 자본, 노동을 결합하는지 평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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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자들
존 그리샴 지음, 남명성 옮김 / 하빌리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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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자들>

이 책은 법정 스릴러의 대가인 존 그리샴의 작품입니다. 존 그리샴은 변호사 출신의 소설가로, 1989년 타임투킬로 데뷔하여 47권 연속 베스트셀러 1위에, 전 세계에서 3억부 이상이 팔려나간 어마어마한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아마도 그의 최전성기는 데뷔 직후부터 90년대 일 겁니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흡입력 뛰어난 이야기와 탄탄한 짜임새로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소설들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당대의 최고 배우들이 출연하여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하는 흥미 만점의 영화로 재탄생 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쉽고 평이한 문장으로 쓰여져 술술 읽힙니다. 탄탄한 구성속에 이야기를 풀어놓는 재미가 탁월해서 특별한 반전이나 유별난 소재 없이도 이야기 자체의 재미에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소박한 행복과 카타르시스를 줍니다. 왜곡되고 구겨진 정의가 제 자리를 찾아가는 희열을 느끼게 해줍니다.

존 그리샴은 제가 읽은 스릴러 작가 중에서 스티븐 킹과 더불어 가장 뛰어난 스토리텔러입니다. 사실 스티븐 킹에서 호러를 떼어내고, 존 그리샴에서 법정을 떼어내도, 그들은 여전히 삶에 대한 통찰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탁월한 이야기꾼들입니다. 무협지에서 김용이 그러하듯이. ㅋ

그는 법정 스릴러 말고도 '시어도어 분 시리즈' 같은 아동용 법정 소설이나 일반 소설도 발표했지만 국내에서는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법정 스릴러들 또한 2000년대 들어서면서 초기작들의 신선하고 탄탄한 재미를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힘도 많이 딸리고, 소재도 점점 진부해지는 느낌을 주었죠.
2017년 불량 변호사 이후 국내에서 그의 소설들이 출판되지 않았는데, 작년부터 다시 그의 책이 국내 출판되는 것 같습니다. 작년의 '카미노 아일랜드'에 이어서 올해 이 책 '수호자들'이 출간되었습니다.

존 그리샴은 그의 흥미만점인 법정 스릴러 속에서 일관되게 약자에 대한 연민을 보여주는 작가입니다. 또한 미국 사법 제도에 대한 문제의식과 사형제도에 대한 회의와 비판을 보여줍니다. '가스실', '고백', '이노센트 맨'등은 사형제도를 소재로 쓴 작품들이구요.
수호자들 또한 재미있는 법정 스릴러 소설입니다. 무고한 장기수들의 결백을 증명하고 석방시키는 일을 하는 ‘수호자 재단’과, 그 재단의 핵심 인물인 성공회 신부이자 변호사인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비록 초창기 소설들처럼 압도적인 긴박감과 쫄깃쫄깃한 스릴은 부족해도, 여전히 탄탄하고 시원시원한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번 '수호자들'에서도 미국 사법 제도에 대한 그의 문제 의식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그가 탁월한 베스트셀러 작가인 것은 문제 의식을 소설의 재미 속에서 잘 녹여낸다는 것입니다. 주제에 매몰되어서 소설적 재미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재미를 위한 소재에서 멈춥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약자에 대한 연민 속에 풀어 놓고 있습니다.

그의 소설들을 읽어보면 돈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미국 사법 시스템의 모순은 그 나라의 시민에게는 큰 문제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는 돈에 의해 좌우될망정 미국 사법 시스템은 규칙에 의한 시합으로 보여집니다. 메시나 호날두를 스카웃해서 우승하는 프로 축구처럼.
돈만 많으면 엄청난 물량 공세로 배심원들을 뒤흔들 수 있는 미국 사법 제도는 분명 문제가 많은 제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돈으로 규칙을 활용할 수는 있지만, 돈으로 규칙을 멋대로 바꾸지는 못합니다. 규칙 따위는 뻔뻔하게 팽개치고 판사와 검사 맘대로 법을 유린하는 우리 나라 사법 제도를 생각하면 , 그들의 사법제도가 부럽기만 합니다. 그들의 사법 제도에서는 판사와 검사도 플레이어의 하나일 뿐입니다. 재판이라는 도박장의 하우스장도, 전주도 아닙니다.
미국 사법제도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몇몇 구절들을 책에서 뽑아 보았습니다.

"제대로 된 재판에서는 교흔, 이른바 물린 자국과 모발 분석이 신빙성을 상실한지 오래다. 두 가지 다 뒤가 구리고 항상 변하는 지식 분야로, 무죄를 주장하는 피고 측 변호인들 사이에서 '쓰레기 과학'이라는 조롱을 받고 있다. 자격이 없는 전문가들과 이들의 근거 없는 유책 이론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교도소에 갇혀 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21 쪽)

"백인들의 미국에서 교도소는 나쁜 사람들이 저지른 범죄의 대가를 치르는 곳이다. 흑인들의 미국에서 교도소는 소수 인종을 길거리에서 보이지 않게 치우는 데 사용하는 창고 같은 곳이다."(79 쪽)

" 그 교도소 역시 주 정부가 아닌 일반 회사에서 이익 창출을 위해 운영하고 있다. 그 말은 교도관들의 월급이 짜고, 교도관들의 수가 적고, 원래도 끔찍한 음식이 더 수준이 낮고, 매점에서는 땅콩버터에서 화장실 휴지까지 모든 물건을 두고 재소자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의료적 보살핌이 거의 전무하다는 말이다."(86 쪽)

"1980년대와 90년대에는 형사 재판에서의 전문가 증언이 급격히 증가했다. 인기 높은 텔레비전 범죄 드라마들에서는 법의학 수사관들을 오류 없는 과학에 근거해 복잡한 범죄 사건을 해결하는, 유능하고 똑똑한 탐정처럼 묘사했다. 판사들은 과학에 압도당해 버렸고, 독학으로 이해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적거나 아예 없었다. 그들의 이력서가 두꺼워지면서 피고를 유죄로 모는 그들의 이론도 점점 더 다양해졌다."(104 쪽)

" DNA 검사는 범죄 수사의 미래를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쓰레기 과학에 대해 신선하고 파괴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불러왔다. DNA 검사를 통해 풀려난 무고한 사람들의 절반 이상의 경우가 검찰이 제시한 근거 없는 법의학적 추리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105 쪽)

"확실한 건 교도소는 거대 고용주라는 점이다. 교도소를 유치할 수 있을 정도로 운이 좋은 지역에서는 그 어떤 사업장보다 많은 일자리를 제공한다. 미국에서는 200만명이 넘는 사람이 교도소에 갇혀 있다. 이를 운영하려면 1백만 명의 직원과 800억 달러의 세금이 필요하다."(131 쪽)
"연방 법원이든 주 법원이든 대부분의 항소심 판사들은 일단 이런 유의 사건을 무시하고 본다. 이미 수십 년을 끌어온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한번 피고가 유죄라는 판결을 내리면 아무리 새 증거물이 나온다고 해도 마음을 바꾸는 일이 드물다."(248 쪽)

"조이 바는 강간죄로 7년째 복역 중이다. 그는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그의 피해자 역시 그와 같은 입장이다. 두 사람은 그들의 관계가 합의 하에 이루어졌다고 했다. 조이는 흑인이고 여자는 백인이다. "(265 쪽)

"하지만 우리는 웬만하면 교도관은 손대지 않으려고 해. 당신 말고도 많은 교도관들이 물건을 배달해 주면서 뒷돈을 챙기잖아. 교도소장은 재소자들이 약에 취해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니까 별로 신경도 안 쓰고. 죄수들은 제대로 걷지 못해야 얌전하게 있으니까. 교도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잖아. 우린 교도소 금지 품목의 밀매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 우린 훨씬 중요한 걸 쫓고 있다고."(355 쪽)

"나도 사람인지라 판사들이 경멸스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특히 사건을 제대로 보지 못하거나 나이가 많거나 백인이면 더욱 그렇다. 그들은 대개 검사 신분으로 법조계에 입문했고, 범죄 혐의를 받는 사람에게 한 치의 동정심도 보여 주지 않는다. 그들은 기소된 사람들을 무조건 유죄 취급하며 마땅히 감옥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사법 체계는 잘 돌아가고 정의는 늘 승리한다."(362 쪽)

"무고한 사람을 다루는 재판이 시간은 아무 문제도 아니라는 듯 길게 늘어지는 경우를 수없이 보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거만한 판사들을 강제로 교도소에 주말 동안 가두어 둘 수 있기를 수백 번 기도했다. 사흘 밤만 그렇게 해 본다면 그들의 직업의식은 놀라울 정도로 투철해질 것이다."(511 쪽)

"밀러 씨, 당신에게 잘못된 판결을 내려서 20년 넘게 가둔 사람들은 오늘 이 법정에 없습니다. 그들이 언젠가 오심에 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인지 저는 모릅니다. 저는 그들의 뒤를 추적할 권한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적어도 당신이 우리의 법률 체계에 의해 끔찍한 학대를 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 체계의 일부로서 당신에게 벌어진 일에 사과드립니다."(515 쪽)


저는 사형제를 찬성합니다. 양심수 석방과 사형제 폐지를 주활동으로 하는 국제 사면 위원회의 20년 넘은 (유령) 회원이면서도 사형제를 찬성합니다.
사형이 강력 범죄를 줄이지 못한다는 연구, 오심에 의한 억울한 사형의 엄존하는 가능성, 사형은 법이 저지르는 또 다른 살인이라는 사형 반대론자들의 주장을 저는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형은 절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굳이 조봉암이나 인혁당 사건이나 민족일보같은 고의적인 사법 살인이 아니더라도.

근데 그러다가도 유영철이나 조주빈같은 자를 보면 사형을 원하게 됩니다. 저는 복수도 정의의 일부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사적 복수와 사적 정의까지 저는 믿습니다. 온전히 사법제도에만 기대기에는 우리의 사법제도는 너무나 부실합니다.

하지만 저는 또한 사법제도가 너무 부실하기 때문에 사형 반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전에 가석방없는 종신형이 도입되어야 겠지요. 인권 침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요.

사형제를 찬성하면서도, 사형제 반대의 목소리에 솔깃해지는 저. 너무 귀가 얇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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