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 킹덤 - 15세기 후반에서 현재까지 러시아의 민족 만들기와 제국을 향한 탐색
세르히 플로히 지음, 허승철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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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첫 내용은 흥미롭다. 

'러시아'라는 정체성의 시작에 대한 역사적 설명으로 내용을 시작한다.


근데, 번역 내지는 교정이 아쉽다.


책 48쪽을 보면 

"블라디미르 공국 대공들과 모스크바 공국 대공들은 12세기 키이우 통치자 볼로디미르 모노마흐의 상속자들이었다. 블로디미르 모노마흐는 비잔티움 황제 모노마호스 9세의 친척이었던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이름을 물려받았고, 모노마호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후손이었다"


'블라디미르'라는 동일한 고유 명사에 대해 블라디미르-볼로디미르-블로디미르로 미세하게 다른 명칭을 연이어 사용한다. 영어권이 아니라 슬라브권이라는 가뜩이나 낯설고 어색한 지역과 명칭에 대해 이렇게 비슷하면서도 다른 명칭을 사용하니 헷갈린다. 


세 번째의 '블로디미르'는 동일인인 모노마흐에 대한 이름인 '볼로디미르'의 오타인 것 같고, 검색을 해보니 '블라디미르'와 '볼로디미르'는 같은 이름인 것 같다. 블라디미리는 러시아식, 볼로디미리는 우크라이나식. 


과거 통상적으로 사용해왔던 '키예프'를 책에서는 '키이우'라고 표기한다. 책에서 이런 예가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너무 모르기에 그 변화를 구분 못하는 것일 수 있다.


가뜩이나 낯설고 어색한 지역명과 인명과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 세심하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쉽다. 저자나 번역자는 러시아 전문가이겠지만, 러시아에 대해 무지몽매한 나같은 일반 독자가 제법 많다는 점을 세심히 고려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책 앞부분에 나와있는 러시아, 우크라이 주변 지도들같은 배려가.


앞부분이긴 하지만 책의 내용은 흥미롭고, 글도 어렵지 않다. 나같은 문외한을 위한 '역주'들이 좀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 바람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역주라는 것들이 숙독을 방해하기도 하니까. 


워낙 낯선 역사에 관한 이야기라서 천천히 읽어가면 재밌기도 하고, 얻는 것도 많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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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인 블랙니스 - 아프리카, 아프리카인, 근대 세계의 형성, 1471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하워드 프렌치 지음, 최재인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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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은 오랫동안 아프리카에는 전근대 역사가 거의 없거나, 적어도 우리 세계의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필요할 정도로 중요한 역사는 거의 없다고 길들여져 왔다. 헤겔에서부터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사상가와 정치가는 아프리카 사회들이 완전히 역사의 밖에서 늘 옛날과 같은 모습으로 태초부터 최근까지 살아왔다고 주장해왔다. '검은 아프리카'를 고립 상태에서 끌어낸 것은 오직 유럽과의 접촉이었다는 관점이 오랫동안 지배해왔다.

그러나 유럽의 '근대'를 열어 젖힌 것은 아프리카였다. 아시아와 이슬람 세계에 뒤쳐져 있던 유럽 세계는 아프리카의 노예 무역과 아메리카 식민지의 플랜테이션 경작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흑인 노동력에 대한 가혹한 착취로 부와 생산성의 원천지가 만들어졌고, 이는 대서양 경제가 새롭게 부상하고, 유럽 자체가 새 발판을 얻는 데 기여했다.

16세기 이래 유럽은 수백만 평방마일의 아메리카 농토를 유럽의 경제 영역으로 통합시켰고, 엄청난 규모의 아프리카인 노동력을 징발했다. 설탕, 커피, 면화 등의 노예 플랜테이션은 대서양 경제를 움직이는 중심축이 되었다.

뉴잉글랜드를 비롯한 북아메리카 식민지들은 서인도 제도에 식량을 공급하면서 영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독립에 대한 생각을 키울 수 있었다. 영국 직물 산업은 아메리카 노예의 옷을 공급하면서 성장했고, 이른바 '산업 혁명'의 원동력이 되는 부를 키울 수 있었다.

이를 통해서 대서양을 중심으로 지구적 차원의 새로운 자본주의 경제가 등장했고, 지금 우리가 '서구(the West)'라고 부르는 개념이 만들어졌다. 유럽의 부를 쌓아 올린 것은 프로테스탄트의 근면한 윤리 의식도, 유럽인의 모험 정신도 아니었다. 그것은 아메리카 선주민의 학살과 아메리카의 자원 수탈과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착취로 이뤄낸 것이다. '근대'는 살육과 수탈로 시작되었고, 그것은 제국주의자들의 것이었다.

이 책 '본 인 블랙니스'는 잊혀진 아프리카의 역사, 흑인의 역사에 관한 책이다. 그러나 그냥 막연한 흑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른바 '서구'라고 불리는 현대의 풍요로운 백인 문명의 기틀을 마련한 아프리카 흑인들의 죽음과 피와 눈물과 땀에 대한 이야기다. 유럽과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라는 대서양 문명의 기저를 다진, 그러나 잊혀지고 외면 당한 흑인들의 노고에 관한 이야기다.

책은 '서구 중심 교육'을 통해서 민주 시민으로 성장해온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 덮어지고 숨겨지고 감춰졌던 많은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가 아프리카와 흑인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얼마나 강고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 일깨워준다.

백인들에 의해 살해되고 수탈당했던 아메리카에 대한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많은 반면, 마찬가지로 죽어가고 착취 당했던 아프리카에 대한 이야기는 접하기 쉽지 않다. 사실 나는 아프리카 역사에 관한 책을 이미 두 번 정도 손에 잡은 적이 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도 멀리 동떨어져 존재하는 '검은 대륙'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하고는 무관한, 아지랭이처럼 모호하고 애매한 이야기로 느껴져서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꽤 의미심장했다. 우리와 동떨어진 외딴 곳의 아프리카가 아니라, 우리의 문명과 유기적으로 결합된 아프리카의 이야기였기에 그 내용이 남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로 느껴졌다. 흑인의 관점에서 풀어낸 아프리카의 이야기였기에, 그동안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생각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래도 아쉬운 점은 있었다. 저자는 책 전체에 걸쳐서 이른바 '근대'라는, 현대 서구 문명의 수립에 기여한 흑인들의 기여도를 강조하는데, 그 강조하는 방식이 좀 씁쓸할 때가 있다.

나는 세계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백인들이 미개하고 야만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중세 이래 유럽은 종교적 광신과 무비판의 맹목과 가혹한 공격성과 끝이 없는 욕망과 야만적인 폭력이 지배한, '악마성'의 사회였다는 생각을 한다. 현대 유럽 사회의 인권과 자유에 대한 높은 감수성과 열린 의식은 잔혹한 식민지 착취로 쌓아 올린 풍성한 부에 기초하는, 더 오랜 의심과 더 많은 검증이 필요한 불안한 진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근데, 이 책의 저자는 근대의 형성에 대한 흑인의 기여도를 강조하다 보니, 어떨 때는 그 악마 같은 백인 제국주의 문명에 착취 당한 역사를 생색내는 듯한 모양새가 될 때가 있다. 아프리카의 능동성과 희생을 강조하느라, 그 억울한 희생을 공로처럼 느껴지게 만들 때가 있다. 물론 저자의 의도는 그게 아닐 테지만.

내 생각에 이건 저자가 현대의 백인 문명을 너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인 것 아닌가 싶다. 현대 자본주의 산업 사회를 그저 긍정하기에, 그 영광의 자리에서 흑인들의 '정당한' 자리를 찾는 것에 너무 몰입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피해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면서도, 가해자를 극복하려고 하기 보다는, 가해자에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보수적인 저자가 모순과 불평등과 불의와 생명 파괴의 파멸로 치닫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에 대한 문제 의식이 부족한 것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렇기에 저자는 이 풍요롭고 화려하고 찬란한, 그러나 파국적인 현대 산업 문명을 극복하기 보다는 그 속의 또 다른 주체로 수용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잊혀지고 지워지고 외면 되었던, 근대를 형성한 아프리카 흑인의 기여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지식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참 좋은 경험을 제공한다. 그렇지만 현재를 넘어서는 상상력의 부재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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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연구 - 비밀에 부쳐진 말들, 삭제된 존재의 배회, 트라우마의 체현
그레이스 M. 조 지음, 성원 옮김, 김은주 해제 / 동녘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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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는 우리의 DNA 안에 부호화되어 있다(...) 우리의 몸은 부모와 조부모들이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물려받는다. 과거는 물질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빚어낸다.'(12쪽)


'양공주'는 미국인과 성적인 관계를 맺는 한국 여성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양공주, 양키 갈보, 미군 색시, 양갈보, 양색시, UN 숙녀, 위안부, 기지촌 매춘부, 군인 신부. 미군 기지 근처의 술집에서 일하는 이 서구화된 여성은 공식적으로는 한국과 미국 정부 모두에게 멸시 당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미군에게 휴식과 오락거리를 제공하고 한국 경제에는 달러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격려받는다.


그들은 미국의 이해관계를 묶어둠으로써 자국을 위해 봉사하는 애국자인 동시에 반미 정치의 화염에 기름을 끼얹는 미 제국주의의 비극적인 피해자다. 이들의 노동은 국가의 외화 소득을 늘려주었지만 막상 이 여성노동자들 스스로는 빛이 눈덩이처럼 불어서 가혹한 환경 아래의 성노동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 여성들은 한국의 예속 상태에 공모한다는 이유로 동포들의 증오를 자아내는 동시에 아메리칸 드림의 손길이 닿는 곳에 있다는 이유로 동포들의 질투를 유발한다. 한반도의 한국인들에게 혐오와 욕망을 자아내는 과잉 가시적인 대상인 동시에 한인 디아스포라의 집단 정서 안에 감춰진 그늘진 인물이다.

전쟁은 미군과 한인 여성이 빈번하게 성적 만남을 가질 조건을 낳았고, 이 가운데 일부는 1945년의 전쟁신부법에 힘입어 결혼과 미국 이민으로 귀결되었다. 이 만남 속에는 미군 지배, 전쟁의 폭력, 자애로운 미국이라는 폭력의 미화가 얽혀 있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국가적인 담론 속에 편입된 전쟁신부는 한국전쟁과 한미 관계의 트라우마에 관한, 그리고 자신의 과거에 관한 비밀을 묻어두어야 한다.

그들은 미군을 상대로 매춘 일을 했던 100만여 한인 여성의, 그리고 미군과 결혼한 10만여 한인 여성의 상징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집단 트라우마와 판타지에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 모든 것이 삭제된 유령 같은 인물이다. 그들에게는 뒤에 남겨진 모든 양공주들과 죽음을 통해 기지촌을 탈출한 이들 뿐만 아니라, 감춰진 그 자신의 과거가 유령처럼 들러붙는다.

미국 신부로서 양공주가 자기 몸 안에 있는 양갈보로서의 양공주를 억압할 때, 그는 자기 과거의 유령에 의해 배회당하고, 이 유령들은 여러 세대를 거쳐.대물림되어 가족사에 관한 앎의 틈새라는 형태로 자녀들을 배회한다. 그들이 그 자신에 관해, 그리고 자신이 상징하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관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은 디아스포라 전체에 무의식적으로 전파된다.

이 책 '유령 연구'는 '양공주라는 상실과 창조성을 상징하는 인물이 어떻게 트라우마의 효과로부터 그 생명력을 얻게 되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그레이스 M. 조. 저자 자신이 미군 상선의 선원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주한 양공주의 딸이다. 절은 시절 이 사실을 알게된 저자는 큰 충격에 빠졌다.

저자는 정체성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고, 그런 경험은 저자를 정신적, 지적으로 재구성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 이후로 저자의 목표는 '가족에 관한, 그리고 내가 태어난 나라와 나를 받아준 나라, 그리고 나의 관계에 관한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 그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저자의 대학원 박사 논문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저자는 양공주 이야기의 진입점을 3곳으로 본다. 미군이 한반도에 발을 들인 1945년, 끝나지 않았으나 잊혀진 한국 전쟁이 시작된 1950년, 그리고 어쩌면 그보다 더 일찍, 일본군 위안부 징발과 함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이들 진입점 자체가 양공주라는 영적 힘을 가진 인물이 어떻게 트라우마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그 자신의 삭제를 통해 한인 디아스포라의 무의식에 어떻게 침투하게 되었는지, 개인적 트라우마가 제국주의와 국가주의에 의한 역사적, 공동체적 트라우마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암시한다. 그리고 이 책은 그 트라우마의 해체와 극복을 위한 노력이다.

저자는 이 책을 꽤 고통스럽게 썼다고 한다. '이 책을 쓰는 과정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한국 내 미군 점령지에 물리적으로 가까이 가는 게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 뒤에 나는 고통과 친구가 되었고 이후 작업을 하는 동안 그 고통을 길잡이 삼아 수차례 한국을 방문해서 내 정신과 DNA 속에 살아있는 역사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책은 오래 전에 지어진 책이다. 미국에서 책이 출간된 후 15년이 지나서 2025년 말에 한국어판이 나왔다.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에 의하면 2022년 대법원은 한국 정부가 미군의 포주 역할을 하며 '치료 시설'에서 여성들을 가두고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했다고 주장한 전직 기지촌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2024년 여름, 활동가들은 한국에 마지막으로 남은 몽키 하우스(치료를 받은 여성들이 원숭이처럼 늘어졌기 때문에 붙은 별명)를 한미 동맹이라는 미명하에 학대 당한 여성들을 기리는 기념물로 보존하기 위해 동두천에서 천막 농성을 시작했다. 그리고 저자가 서문을 쓰는 시점까지 343일째 최전선에서 몸을 던지고 있다. 기억은 잊혀졌지만 삭제당하지 않는다. 유령은 대한민국에서도 배회하고 있다.

저자 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이 책을 제법 힘들게 읽었다. 내용의 역사성이 나를 아프게 만들기도 했지만, 저자의 글쓰기 방식도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책의 말미에 달린 해제는 '책을 구성하는 다섯 장은 일관되지 않은 서술에 따라 각기 다른 목소리와 서사들이 겹치고 서로 다른 장르적 형식이 뒤섞이면서 다층적이며 다중적인 글들의 겹을 만들어낸다.'고 표현한다.

그리하여 심층적이고 다층적이고 예리하고 역사적이고 해체적인 이야기가, 어휘는 학문적이고, 문장은 현학적이고, 서술은 연극적이고, 인용은 넘쳐나고, 동어는 반복되고, 은유는 과하고, 수사는 장황하다. 무식한 나에게는 그렇다.

어쩌면 그것은 다층적이면서 상충되는 여러 겹의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파편과 반복으로 엮어내는 실험적 글쓰기 방식'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덕분에 나는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의 고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매 문장마다, 매 단락마다, 매 챕터마다 달라지는 파편 같은 생각을.

책을 끝까지 읽었지만 여전히 많은 것들이 미진하게 느껴진다. 나는 저자가 말하는 많은 것들을 알아듣지 못한 채, 이해하지 못한 채, 비껴가고 넘어갔다. 대신에 저자가 말하는 것들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직관적으로 느꼈다.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볼까 생각했지만, 지금 다시 읽어봤자 여전히 힘들고 애매할 거라는 것을 안다.

이 책을 다시 읽는 건, 내가 더 유식해진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언제 이 책을 다시 읽을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이대로 잊어버리기에는 아까운 책이다. 이 파편적이고 반복적인 이야기는 무지한, 아니면 무관심한 나를 자꾸만 밀어붙인다. 생각하라고. 그것이 이 책이 나에게 가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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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의 아주 짧은 역사 - 충돌하는 역사 속 진실을 찾아서
일란 파페 지음, 유강은 옮김 / 교유서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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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급습한다. 이스라엘인 약 1천 2백 명이 목숨을 잃었고, 2백 40명이 인질로 잡혔다. 이스라엘은 그 보복으로 4만 6천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을 살해했고, 그 중 4분의 1이 어린아이들이다. 이스라엘의 폭력으로 가자 지구 주택의 90퍼센트가 파괴되었고, 주민 2백 30만 명 중 90퍼센트가 난민으로 전락했다.

식민주의자들은 토착 주민들을 '야만인'이나 '원시인'으로 묘사하면서 비인간화한다. 고전적 식민주의는 자신이 야만인들에게 근대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한다. 반면, 정착민 식민주의는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 땅을 근대화한다고 여긴다. 사람들은 치워버려야 하는 존재다. 필연적으로 토착민들에 대한 축출과 학살이 따른다.

19세기 말,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약 50만 명이 살았고, 그 중 70퍼센트 정도가 무슬림이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자는 시온주의는 16세기 유럽 복음주의 기독교에서 출발하였다. 시온주의는 정착민 식민주의다.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는 것'이 종말을 앞당기는 성경의 실현이라 믿었고, 한편으로는 유대인을 유럽에서 몰아내고 싶었다. 이후 유럽에서 유대인 집단 학살이 일어나면서 유대 시온주의가 생겨났고, 영국 제국주의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오스만 제국에게서 빼앗기 위해 시온주의를 지원한다. 홀로코스트가 벌어지자 시온주의는 유대 세계 전체로 확산되었다.

1926년 무렵, 시온주의자들은 토지 소유의 관습을 뒤엎으며 팔레스타인 농민들을 땅에서 쫓아내고 학살하며 팔레스타인 종족 청소를 시작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저항했고, 영국은 잔인하게 진압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하자 시온주의자들은 급진화한다. 1942년, 뉴욕에서 시온주의 지도부는 팔레스타인 전체를 유대 국가로 만들겠다고 선포했고, 시온주의의 중심은 영국에서 신생 강국 미국으로 옮겨진다. 유럽 열강은 홀로코스트의 양심을 깨끗하게 세탁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인들을 외면한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하던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창설된 지 2년도 되지 않은 유엔에 회부한다. 1947년,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 분할을 선언하고, 시온주의 세력은 대대적인 종족 청소를 시작한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나크바(재앙)가 시작된다. 1948년 말에 이르면, 최대 1백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쫓겨난다. 나크바는 현재 진행형이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종족 청소하기 위해, 역사적 팔레스타인의 2퍼센트에 불과한 가자 지구를 일종의 구금 우리로 만들었다. 1967년에는 6일 전쟁을 일으켜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체를 차지하고, 팔레스타인인 30만 명을 추방한다.

1967년 이래 가자와 요르단강 서안 주민들은 점령된 상태다. 재판 없는 구금, 통행금지, 추방, 살해, 가옥 파괴, 토지 수용, 군대의 권한 남용. 두 지상 최대의 감옥은 2026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박해는 1987년과 2000년, 1차와 2차의 인티파다(봉기)를 불러온다. 두 차례 봉기의 실패는 세속적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의 실패로 이어진다. 이제 팔레스타인 해방의 희망은 하마스나 팔레스타인 이슬람 지하드 같은 이슬람주의 단체로 옮겨간다.

21세기가 되어서 상황은 더 나빠진다. 서방 세계가 팔레스타인의 고통을 강요하는 평화 교섭을 시도하는 동안,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탄압과 학살은 더욱 더 잔인해지고 강고해진다. 이스라엘은 점점 더 인종주의적이고 파시즘적인 유대교 신정 국가를 향해가고, 이제 이스라엘에 진정한 평화 진영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자 지구는 최근 17년 동안 힘겨운 포위에 시달렸다. 이스라엘군은 가자를 지상과 해상, 공중에서 네 차례 직접 공격했다. 가자 주민 절반이 21세 이하이기 때문에, 이런 포위과 폭격의 현실이 그들이 아는 세상의 전부다. 10월 7일, 이스라엘을 급습한 하마스 투사들은 대부분 이스라엘이 떨어뜨린 폭탄을 통해 폭력의 언어를 배운 젊은이들이다.

시온주의는 정착민 식민주의고,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은 반식민주의 운동이다. 그동안 팔레스타인 반식민주의 투쟁은 타당한 이유가 없는 난폭한 테러 행위로 묘사되어왔다. 팔레스타인인들의 해방 투쟁을 벌일 권리를 전 세계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유혈 사태는 계속될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 태생부터 피를 뒤집어 쓰고 태어난 나라가 두 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북아메리카 선주민의 피를 뒤집어 쓰고 태어난 미국, 또 하나는 팔레스타인 토착민의 피를 뒤집어 쓰고 태어난 이스라엘.

인류 역사의 수 많은 잔혹 범죄가 그러하듯이, 이 두 나라의 반 인륜 범죄 또한 종교의 강력한 지원 아래 저질러진다. 이 때 종교는 강력한 프로파간다가 되어, 진실을 왜곡하고 범죄를 미화한다. 뉴스와 역사는 범죄자의 눈으로 쓰여진다. 종교는 그렇게 이데올로기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또 다른 목소리는 존재한다.

이 책은 이스라엘 출신의 학자 일란 파페가 지은 책이다. 한없이 길고, 한없이 무거운 '인종청소'의 이야기를, 130*200mm의 작은 규격과 본문 195쪽의 얇은 책에 담았다. 마치 그의 또 다른 저서 '이스라엘에 관한 열 가지 신화'나 팔레스타인 역사 학자 라시드 할리디의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의 축약본을 읽는 듯 하다.

뼈대 위주의 핵심적이고 축약적인 서술 덕분에, 고통스러운 감정 이입을 최대한 피한 채로, 팔레스타인 100년 수난사의 골격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복잡하고 사연 많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의 본질은 인종 청소에 대항하는 반식민주의 투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감정 이입은 피할 수 있어도, 위태로운 양심마저 외면하기는 어렵다. 저자 일란 파페는 말한다. '한 세기 넘도록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해진 불의를 보면서, 여러분이 그들의 투쟁에 연대하고, 어디에 있든 억압에 당당히 맞설 영감을 얻기를 기대한다' 나도 그 여러분 중의 한 명이고 싶다.


'강에서 바다까지' 평화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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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는 왜 아프리카에 갔을까 - 거짓 관용의 기술
리오넬 아스트뤽 지음, 배영란 옮김 / 소소의책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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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신대륙에 당도한 유럽인들은 자연과 공존하던 선주민들을 학살하고, 선주민들이 공유하던 자원과 자연을 사유화했다. 그리고 그 자연을 팔아 부와 절대 권력을 차지한다.

식물의 '종자'는 수천 년간 인류가 함께 일구고 가꿔온 작업의 결실이다. 어느날 갑자기 몬산토라는 화학기업이 등장해 종자에 '약간의 변형'을 가했다는 구실로 종자에 대한 모든 독점적 권리를 가로챈다.

컴퓨터 산업의 태동기, 거의 모든 것이 오픈 소스 체제였던 시절, 빌 게이츠는 모두가 공유하던 컴퓨터 기술에 자신의 기술을 가미하여 특허를 출원했고, 공공재처럼 사용되던 초기 컴퓨터 기술들을 자신만의 것으로 사유화한다.

2000년, 성공과 부의 상징이 된 빌 게이츠는 게이츠 재단을 설립하고 돌연 자선사업가로 변신한다. 이제 빌 게이츠는 세상에서 가장 너그럽고 관대한 사람이 되었다.

게이츠 재단에서 후원하는 많은 사업은 중요하고 긍정적인 효과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이런 유용한 공익 사업이 숲을 가리는 나무들이라는 점이다. 초특급 거대 부호들이 관용의 탈을 쓴 자선사업을 통해 보건, 환경 등의 분야를 장악하고, 자신들이 편승한 신자유주의 체체를 강화하고, 불투명한 자금 구조를 통해 더욱 배를 불리는 '자선 자본주의'의 민낯을 가리는.

'자선 자본주의'라는 신조어는 빌 게이츠에 의해 생겨났다. 이는 억만장자들이 자신의 성공 수완을 기부 활동에 접목시켜, 빈곤 구제에 시장 원리를 도입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늘날 자선 자본주의는 호화로운 빌라나 전용기처럼 '슈퍼리치 클럽'에 들어가는 또 하나의 새로운 상징이다. 세계화된 경제에서 가장 번창하는 사업인 기부 사업은 교육 정책, 세계 농업, 보건 분야에서 억만장자들이 전대미문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컴퓨터 운영체제와 소프트웨어에 대한 독점으로 막대한 부를 구축한 빌 게이츠의 사업 방식은 그의 재단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빌 게이츠는 생물 자원을 이용하여 다국적기업이 특허를 출원하는 '생물 해적 행위'를 옹호함으로써 빈곤국에 대한 의료 혜택 접근을 제한했고, 재단은 인권과 노동권을 유린하고 환경을 훼손하며 조세 회피 정책으로 극심한 비판을 받는 많은 기업들에 투자한다. 재단은 자신들이 투자한 이들 업체들의 사업에 재단 기부금을 제공하여, 기부하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회수한다.

빌 게이츠는 녹색 혁명을 주장하며, 자유로운 종자의 사용을 불법화하고 그 씨를 말리기 위해 활동한다. 특허받은 종자를 사용하도록 NGO와 자선 기관에 권고하고, 각국 정부가 지적 소유권을 제정하도록 압력을 넣는다. 그러나 녹색혁명의 폐단은 인도의 사례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토양이 메마르고, 생물다양성이 빈약해지고, 기후 온난화가 초래되고, 농민은 빈곤해진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씨앗을 버리고 기업이 판매하는 씨앗과 화학비료까지 구매해야 한다. 몬산토는 수많은 농민들을 자살하게 만들었다.

보건 분야는 게이츠 재단에서 특히 관심을 갖는 분야다. 빌 게이츠는 백신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게이츠 재단은 효과적인 예비책 정도만 있으면 개선될 수 있는 만성질환과 아동 사망 관련 연구 지원은 등한시하면서, 에이즈와 소아마비 연구에만 우선권을 부여했다. 게이츠 재단의 막대한 보조금은 보건의료 체계를 왜곡시키고 있고, 빌 게이츠가 세계 보건 시장을 장악하게 만들어준다.

자선 자본주의 사업가에게 돈을 버는 것과 자선 사업을 하는 것은 이율배반이 아니다. 재단과 기업이 서로 뒤섞여 투자에 기부의 옷을 입힘으로써 생기는 이득이 무엇이건, 한 가지는 분명하다. 빌 게이츠는 기부를 시작한 뒤 이전보다 더 부유해졌다는 점이다. '포브스'에 따르면 빌 게이츠의 개인 자산은 2011년 560억 달러에서 2015년 789억 달러로 증가했다.

초국적인 권력을 가진 게이츠 재단의 활동은 그 어떤 민주적 통제도 받지 않는다. 빌 게이츠와 그 아내 멀린다 게이츠, 그리고 워런 버핏 세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게이츠 재단은 그 막대한 자금력으로 학자들과 NGO와 언론의 입을 막고 있고, 전 세계 보건 사업과 여러 나라의 정부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외부 감시도 받지 않는다.

막대한 권력을 손에 쥔 게이츠 재단은 반드시 독립된 기관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민간 재단 같은 자선 단체의 영향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현재 상황에서 이 같은 주의와 경계는 더욱 필요하다. 수익에 집착하는 거대 기업이 정말로 빈곤과 불평등을 물리치고 사회 경제 정의를 추구하는지 예의 주시해야 한다.

우리는 빌 게이츠라는 인물 한 사람을 넘어서서 소수의 대부호가 어마어마한 권력을 쥐고 있는 '자선 자본주의' 관행 자체를 경계해야 한다. 빌 게이츠와 마크 저커버거의 온화한 얼굴 뒤에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환경을 유린하여 축적한 부가 숨어 있다.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주범은 돈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다. 빈곤을 없애기 위한 실절적인 대책은 부자 한 사람의 자비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존엄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2,30년 전, 많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에게 빌 게이츠는 '선한 사람의 대명사'는 아니었다. 나를 포함한 많은 개발자들에게 그는 탁월한 프로그래머가 아니라 약삭빠르고 뻔뻔한 장사꾼으로 인식되었다. 돈을 주고 사들인 Dos 프로그램으로 IBM을 이용해 개인용 PC 시장을 장악한 후, 애플의 '매킨토시'를 본따 'Windows' OS를 만들어 PC 시장을 독점한 영악한 사업가.

독점한 Windows OS에 끼워넣기를 통하여, 인터넷 시대를 선도한 넷스케이프를 몰아내고,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그래픽 브라우저 시장의 새로운 지배자로 만든 반칙 기업가. 불법 독점으로 기업 강제 분할의 위기에 몰려있던 탐욕스러운 부자.

빌 게이츠의 대척점에서 'GNU 선언문'을 발표하고 '자유소프트웨어재단(FSF)'을 설립해 '카피레프트' 운동을 주도하여 마구잡이 지적 재산권에 저항했던 리차드 스톨만을 모든 개발자가 선호했던 것은 아니지만, 아이디어 도용과 지적 재산권에 대한 탐닉과 철옹성의 독점으로 부의 제국을 설립한 빌 게이츠를 경시하는 개발자들이 아주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상황은 많이 바뀌어 있다. '최후의 해커'라 불리던 탁월한 프로그래머 리차드 스톨만은 '소아성애' 관련 발언으로 배척받는 등 입지가 좁아졌고, 기업 강제 분할의 위기에서 살아남은 '제국의 황제' 빌 게이츠는 '당대 최고의 기부천사'로 사람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 인식의 근저에는 지적 재산권에 대한 대중의 많은 인식 변화가 있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오래전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에 제한을 둠으로써 돈을 벌어들이는 행위는 프로그램이 사용되는 범위와 방식을 제한하기 때문에 유해한 것이다. 이는 인간들이 프로그램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전체적인 풍요로움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선언하며 나를 감동시켰던 GNU의 정신은 지금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흘러간 옛 노래로 들릴 것 같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모든 지적 소유권은, 그것들이 어떻든지 그를 허용함으로써 사회 전체에 이득이 된다고 여겨져서, 사회가 허용할 때만 정당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지적 재산권을 창작자의 천부적인 권리라고 인식하고 지지한다. 사용자와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런 변화된 세상에서 특허와 지적 재산권을 희롱하며 자신만의 부유한 성을 쌓은 빌 게이츠는 풍요로운 부자 기업가로 존경을 받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철학을 고수한 리차드 스톨만은 현실 모르는 기인으로 경시되는 것 같다. 이제 세상은 포식자만을 존경하고 추앙한다. 그렇게 세상은 바뀌었고, 나는 바뀐 세상이 서글프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사람이 변하였어도 변할 수 없는 원칙이 있다. 그것은 '게이츠가 후원하는 교육과정을 밟은 기자가, 게이츠의 보조금을 받는 학자들이 수집하고 분석한 자료를 근거로, 게이츠가 돈을 대는 신문에, 게이츠가 지원하는 보건 관련 프로젝트에 관해 쓴 기사를 읽는' 세상을 우리가 그대로 따라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현실을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나는 내 눈으로, 내 판단으로, 내 원칙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어쩌면 그것은 이 난폭한 세상에 한없이 무기력하게 남아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작은 위로일 지도 모른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책은 또 다른 책을 부른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몬산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졌다. 이제 나는 '몬산토 - 죽음을 생산하는 기업'과 '에코사이드 - 글리포세이트에 맞선 세계 시민 투쟁기'를 보관함에 집어 넣는다. 그렇게 시선을 넓혀간다. 내 눈으로 보기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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