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제국: 권력, 자본, 노동 - 샘 올트먼과 오픈AI의 빛과 그림자
카렌 하오 지음, 임보영 옮김 / 생각의힘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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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미국 국회의 AI 청문회에 참석한 컴퓨터 과학자 '데보라 라지'는 증인으로 출석한 사람들 중 AI 업계와 재정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사람은 자기 하나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자리의 대부분은 샘 올트먼(오픈AI CEO), 일론 머스크(테슬라 CEO), 사티아 나델라(마이크로소프트 CEO),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메타 CEO), 선다 피차이(구글 최고 경영자), 잭 클라크(AI 기업 엔트로피 창업자)를 필두로 여러 빅테크 기업의 임원들이 채우고 있었다.


라지는 빅테크 기업 임원들이 AI의 약속과 위험에 대한 근거 없는 화려한 주장을 늘어놓으며 중간 중간에 시의적절하게 중국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말을 양념처럼 뿌리고, 그럴 때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상원의원들이 귀를 기울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무엇보다도 라지가 가장 충격받은 부분은 청중들 중 많은 이들이 빅테크 임원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옆에 앉은 빅테크 임원들과 그들의 거대한 정책팀들이 너무도 오랜 시간 워싱턴 내 메시지를 독점한 나머지 이제 정책결정자들이 그들의 말을 복음처럼 떠받들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지는 말한다. "그 자리를 통해 저는 정말 큰 깨달음을 얻었어요. 이런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나서 '사실 현실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 이 말이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얘기였다. 내가 오랫동안 여러 편의 AI 책 리뷰를 올리고, 주변 사람들에 AI 이야기를 떠들고 다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현실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꺾고 세상이 인공지능으로 떠들썩 할 때, 현직 프로그래머였던 나는 속으로 혼자 의문을 품었었다. '알파고가 진짜 인공지능이 맞는건가? 일반 컴퓨터 프로그램과 뭐가 다른 거지?' 먹고 살기 바쁜 처지에서 그 의문을 금방 잊었지만, 사법부의 행태에 실망한 많은 사람들이 'AI 판사'를 외치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 의문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볼 때 바둑과 재판은 전혀 달랐다. 경우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집 수가 많으면 이긴다는 한 가지 규칙을 가진 바둑과 법규를 원용하고 사회를 반영하여 사람의 삶과 생명을 판가름하는 재판은 결코 같을 수가 없었다. 재판은 게임이 아니었다. 생명을 다루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인공지능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미디어에서 인공지능에 대해 떠드는 이야기들은 찬양 일변도의 미래 세계 이야기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개연성 떨어지는 엉성한 SF 소설 같은 이야기들 일색이었다. 나는 인공지능의 원리를 알고 싶었다. AI는 정말 인공지능일까?


'비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는 AI 지식', '인공지능과 딥 러닝', '기계는 어떻게 생각하고 학습하는가' 등 나는 AI의 원리를 쉽게 설명한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책들을 찾아 읽을 수록 나는 인공지능이 지능이 아니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거칠게 말하면, AI는 데이터 패턴 분석이었다.


그런 생각이 강해지면서 나는 이른바 학자, 전문가와 언론인이라는 사람들에게 많은 회의와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들이 미디어로 쏟아내는 말과 글은, 이런저런 현란한 어휘와 인문학적 사유로 포장했지만, 결국에는 빅테크 기업들의 홍보 문구의 변주일 뿐이었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있는 걸까? 저들은 나만큼의 의혹도 품지 않고, 천편일률 똑같은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화려한 세상, 찬란한 미래.


그럴수록 나는 더 많은 책을 찾아 읽었다. 그러다가 만난 책 'AI 지도책'은 인공지능에 관한 나의 생각을 확장시켜 주었다. 이전까지 AI가 지능이 아니라는 생각에만 꽂혀있던 나는 AI 판타지 뒤에 그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인공지능 학자 케이트 크로퍼드가 지은 AI 지도책은 지능이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에서 시작하여, 지구적 차원의 자원 추출, 인공지능을 떠받치는 인간 노동과 착취, 무분별한 데이터 유출과 감시 자본주의, 편견과 차별의 확대, 부정확한 지식의 확산, 국가 권력의 도구화, 무책임성 등 AI 산업이 갖고 있는 여러 문제를 지적한 뒤 묻는다. AI는 누구의 이익에 봉사하는가?


이 책을 접한 이후로 나는 AI를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살펴보게 되었다. 그 후로도 'AI는 인간을 먹고 자란다', '데이터 그랩', '박태웅의 AI강의', '천개의 뇌' 같은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이 책, 'AI 제국:권력, 자본, 노동'을 읽으면서 AI 뿐만 아니라 이 테크놀로지 세상이 안고 있는 편견과 위험에 대해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빅테크 기업들과 미디어들이 보여주는 깨끗하고 하얀 무균실의 영화 같은 인공 지능의 모습 뒤에서, 아래에서, 먼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연과 사람의 실제 세상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내 얘기가 진실은 아니다. 세상은 복잡하다. 테크놀로지의 변화는 번개 같다. 누구도 따라잡기 쉽지 않다. AI 산업의 종사자들도 서로 다른 생각과 서로 다른 예측을 하고 있다. 이 AI 세상에서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 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물며 AI 산업과 아무 관련도 없고, 수학 한 줄 모르는 내가 AI에 대해 얼마나 정확히 알겠는가? 내가 하는 얘기는 그저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얘기일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것만은 명확하게 단언할 수 있다. '현실은 저들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그리고 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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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싱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8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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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생의 갈림길' 보다 출간은 늦었는데, 내용상으로는 그 이전의 이야기다. 그래서 검색했다. 원서 기준으로 크로싱은 2015년, 회생의 갈림길은 2020년 출간이라고 한다.

이러면 안되지. 이제는 해리 보슈 시리즈와 미키 할러 시리즈가 사실상 통합된 모양인데, 순서를 바꾸면 내용이 이어지지가 않지.

두 시리즈 모두 RKH 코리아라는 동일 출판사에서 순서에 맞게 출간해오던 것인데, 이건 큰 실수라고 본다. 사실상 하나의 시리즈인 내용인데, 출간 순서를 바꾸다니.


그와 상관없이 내용은 꽤 재미있다. 오랫만에 만난 해리 보슈 시리즈 혹은 미리 할러 시리즈. 뭐든 반갑다. 이렇게 길고 오래 탄탄한 시리즈를 선사해주는 마이클 코넬리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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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킹덤 - 15세기 후반에서 현재까지 러시아의 민족 만들기와 제국을 향한 탐색
세르히 플로히 지음, 허승철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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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는가? 그리고 러시아 국민을 이루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것은 러시아의 영원한 질문이다.

1520년대,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 키이우 루시(키예프 루스)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모스크바 공국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통치자에 대한 새로운 가계도를 만들어냈다. 이반 뇌제가 아우구스투스 로마 황제의 후손이라는 주장은 국내에서는 그를 다른 공후급 지배층과 구별 시켜주었고, 국외에서는 그를 서구 통치자들과 같은 반열에 올려주었다. 또한 볼가강 유역 칸국들의 정복은 그의 지정학적 입지를 향상시키고 황제라는 주장에 실체를 제공해주었다.

새로운 모스크바의 정체성은 교회를 통해서도 진행되었다. 예언되었던 1492년의 세계 종말이 오지 않자 러시아 교회는 새로운 위계질서로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비잔티움 정교회 제국이 모스크바 공국으로 대체되었고, 비잔티움 황제는 모스크바 공국의 차르가 대신했다. 콘스탄티노플은 새로운 로마이고, 모스크바는 새로운 콘스탄티노플이었다. 16세기 초가 되면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를 자처한다.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라는 비유는 모스크바 사람들의 세계관에 거대한 변화를 불러왔다. 차르는 비잔티움 몰락 이후 남은 유일한 정교회 황제이고, 모스크바 공국 교회는 다른 어느 정교회보다 우위에 있게 되었다. 제3의 로마로서 모스크바는 대외 정책을 공세적 전략으로 전환했다.

17세기 중반 차르는 소루시(우크라이나)와 백루시(벨라루스)를 대루시(모스크바 공국)에 편입시켰지만 이들은 자신을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소루시와 백루시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이 대루시의 정체성과 구별된다고 생각했고, 모스크바 공국의 엘리트들은 자신들을 민족적 관점에서 생각한 적이 거의 없었다.

이들 집단이 자신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생각하는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1709년 스웨덴과의 전투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에서 서구화 주창자인 키이우신학교 학장 프로코포비치는 차르의 통치 영역 전체를 '러시아'라는 전 민족적 이름으로 불렀다. 프로코포비치는 표토르 대제의 주요 이념가가 되었고, 표토르 대제와 그의 가신들은 이제 민족적 담론을 완전히 습득하여 조국과 민족, 공공선을 강조했다.

모스크바 공국이 러시아 제국으로 탈바꿈하는 18세기 동안 공통의 '전 러시아' 역사 담론과 '전 러시아' 제국 언어가 형성되었다. 이후 러시아의 팽창주의적 정체성 확장이 계속되면서, 전제정치, 정교회, 민족은 러시아 제국을 통합하는 세 가지 중침축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러시아 민족'이라는 우산에 가려진 여러 민족들의 문제는 그 후로도 계속 지속될 터였다.

그로부터 수백 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갈등과 긴장 속에서도 계속 하나로 묶여 지내왔고, 그것은 우크라이나의 의지와는 별로 관련이 없었다. 러시아 제국부터 소비에트에 이르기까지 세계 정세와 전략적 이해에 따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때로는 강하게 장악하기도 하고, 때로는 느슨하게 풀어주기도 하지만, 단 한 번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일부라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었다. 그 생각은 소련이 해체되고, 우크라이나가 독립 국가로 탄생한 이후에도 여전히 지속되었다.

2014년 소치 올림픽 폐막 4일 뒤 푸틴 대통령과 그의 군대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분할하고 크림반도를 합병한다. 이는 우크라이나의 핵무기를 러시아에 이양하는 대가로, 러시아, 미국, 영국으로부터 우크라이나 영토를 보장 받은, 1994년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위였다. 이 침략의 근저에는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이 한 민족이라는 러시아의 민족 정체성이 있었다. 크림 합병에 앞서 수 개월 동안 푸틴은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은 같은 민족이라고 거듭 강변했다. '우리는 한 민족이다.'

그러한 생각은 러시아 혁명 시기 백군 지휘관이었던 안톤 데니킨 장군의 회고록에서 명징하게 드러난다. '반동적이든 민주적이든, 공화정이든 전제정이든, 어떤 러시아도 우크라이나가 떨어져 나가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집착은 현재의 러시아 대통령 푸틴의 '러시아세계' 개념에 그대로 이어진다. '러시아세계는 러시아어와 러시아 문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러시아에 살든 국경 밖에 살든, 단결 시킬 수 있고 단결 시켜야 한다.'

소련 멸망 후 새롭게 탄생한 러시아는 '자유주의적 제국주의' 국가였지만, 2008년 조지아를 침공하면서 러시아는 이미 자유주의적 제국 대신 군사적 제국을 선택하였고, 이제 러시아세계는 푸시킨과 러시아어와 연관되기 보다는 수많은 사상자와 난민을 낳은 영토 약탈과 연결되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은 러시아와 서방의 관계 뿐 아니라 근대 러시아 민족 형성에 있어서도 중요한 분기점이다. 이 갈등이 러시아의 영원한 질문에 내놓은 답은 아주 분명하다. 거대 러시아 민족이라는 제국 시대의 구상은 이제 사라져버렸고, 아무리 많은 피와 돈을 쏟아부어도 그것을 되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러시아 민족의 미래와 이웃들과의 관계는 중세 키이우 국가의 상상적인 동슬라브 단일성이라는 잃어버린 낙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연방의 국경 안에서 근대적 시민 국가를 형성하는 데 있다. 이것이 영국 제국 같은 과거 제국의 중심부나 독일 같은 근대 민족국가가 밟아온 길이다. 두 국가는 자국 밖의 영어권, 독일어권 국가와 고립 지역의 독립을 인정했다. 러시아가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한다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새로운 냉전 혹은 이보다 더 끔찍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자의 불길한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는다. 2022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다시 침공했고, 전쟁과 죽음은 2026년 3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 참혹한 비극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러시아 사회 내부가 자유와 평등을 기반으로 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민주주의 사회로 탈바꿈해야 한다.

그것은 러시아 뿐만 아니라 전 인류에게도 마찬가지다. 나날이 심해져 가는 폭력과 전쟁 속에서 우리를 구해줄 수 있는 것은, 자유와 평등과 박애라는 인간의 존엄성과 보편적 권리에 대한 존중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인간'은 나와 같은 집단, 같은 민족, 같은 국가만의 인간이 아니라, 나와 다른, 내가 싫어하는 사람까지 포함하는, 글자 그대로의 모든 인간종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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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인 블랙니스 - 아프리카, 아프리카인, 근대 세계의 형성, 1471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하워드 프렌치 지음, 최재인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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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은 오랫동안 아프리카에는 전근대 역사가 거의 없거나, 적어도 우리 세계의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필요할 정도로 중요한 역사는 거의 없다고 길들여져 왔다. 헤겔에서부터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사상가와 정치가는 아프리카 사회들이 완전히 역사의 밖에서 늘 옛날과 같은 모습으로 태초부터 최근까지 살아왔다고 주장해왔다. '검은 아프리카'를 고립 상태에서 끌어낸 것은 오직 유럽과의 접촉이었다는 관점이 오랫동안 지배해왔다.

그러나 유럽의 '근대'를 열어 젖힌 것은 아프리카였다. 아시아와 이슬람 세계에 뒤쳐져 있던 유럽 세계는 아프리카의 노예 무역과 아메리카 식민지의 플랜테이션 경작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흑인 노동력에 대한 가혹한 착취로 부와 생산성의 원천지가 만들어졌고, 이는 대서양 경제가 새롭게 부상하고, 유럽 자체가 새 발판을 얻는 데 기여했다.

16세기 이래 유럽은 수백만 평방마일의 아메리카 농토를 유럽의 경제 영역으로 통합시켰고, 엄청난 규모의 아프리카인 노동력을 징발했다. 설탕, 커피, 면화 등의 노예 플랜테이션은 대서양 경제를 움직이는 중심축이 되었다.

뉴잉글랜드를 비롯한 북아메리카 식민지들은 서인도 제도에 식량을 공급하면서 영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독립에 대한 생각을 키울 수 있었다. 영국 직물 산업은 아메리카 노예의 옷을 공급하면서 성장했고, 이른바 '산업 혁명'의 원동력이 되는 부를 키울 수 있었다.

이를 통해서 대서양을 중심으로 지구적 차원의 새로운 자본주의 경제가 등장했고, 지금 우리가 '서구(the West)'라고 부르는 개념이 만들어졌다. 유럽의 부를 쌓아 올린 것은 프로테스탄트의 근면한 윤리 의식도, 유럽인의 모험 정신도 아니었다. 그것은 아메리카 선주민의 학살과 아메리카의 자원 수탈과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착취로 이뤄낸 것이다. '근대'는 살육과 수탈로 시작되었고, 그것은 제국주의자들의 것이었다.

이 책 '본 인 블랙니스'는 잊혀진 아프리카의 역사, 흑인의 역사에 관한 책이다. 그러나 그냥 막연한 흑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른바 '서구'라고 불리는 현대의 풍요로운 백인 문명의 기틀을 마련한 아프리카 흑인들의 죽음과 피와 눈물과 땀에 대한 이야기다. 유럽과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라는 대서양 문명의 기저를 다진, 그러나 잊혀지고 외면 당한 흑인들의 노고에 관한 이야기다.

책은 '서구 중심 교육'을 통해서 민주 시민으로 성장해온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 덮어지고 숨겨지고 감춰졌던 많은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가 아프리카와 흑인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얼마나 강고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 일깨워준다.

백인들에 의해 살해되고 수탈당했던 아메리카에 대한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많은 반면, 마찬가지로 죽어가고 착취 당했던 아프리카에 대한 이야기는 접하기 쉽지 않다. 사실 나는 아프리카 역사에 관한 책을 이미 두 번 정도 손에 잡은 적이 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도 멀리 동떨어져 존재하는 '검은 대륙'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하고는 무관한, 아지랭이처럼 모호하고 애매한 이야기로 느껴져서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꽤 의미심장했다. 우리와 동떨어진 외딴 곳의 아프리카가 아니라, 우리의 문명과 유기적으로 결합된 아프리카의 이야기였기에 그 내용이 남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로 느껴졌다. 흑인의 관점에서 풀어낸 아프리카의 이야기였기에, 그동안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생각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래도 아쉬운 점은 있었다. 저자는 책 전체에 걸쳐서 이른바 '근대'라는, 현대 서구 문명의 수립에 기여한 흑인들의 기여도를 강조하는데, 그 강조하는 방식이 좀 씁쓸할 때가 있다.

나는 세계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백인들이 미개하고 야만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중세 이래 유럽은 종교적 광신과 무비판의 맹목과 가혹한 공격성과 끝이 없는 욕망과 야만적인 폭력이 지배한, '악마성'의 사회였다는 생각을 한다. 현대 유럽 사회의 인권과 자유에 대한 높은 감수성과 열린 의식은 잔혹한 식민지 착취로 쌓아 올린 풍성한 부에 기초하는, 더 오랜 의심과 더 많은 검증이 필요한 불안한 진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근데, 이 책의 저자는 근대의 형성에 대한 흑인의 기여도를 강조하다 보니, 어떨 때는 그 악마 같은 백인 제국주의 문명에 착취 당한 역사를 생색내는 듯한 모양새가 될 때가 있다. 아프리카의 능동성과 희생을 강조하느라, 그 억울한 희생을 공로처럼 느껴지게 만들 때가 있다. 물론 저자의 의도는 그게 아닐 테지만.

내 생각에 이건 저자가 현대의 백인 문명을 너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인 것 아닌가 싶다. 현대 자본주의 산업 사회를 그저 긍정하기에, 그 영광의 자리에서 흑인들의 '정당한' 자리를 찾는 것에 너무 몰입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피해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면서도, 가해자를 극복하려고 하기 보다는, 가해자에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보수적인 저자가 모순과 불평등과 불의와 생명 파괴의 파멸로 치닫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에 대한 문제 의식이 부족한 것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렇기에 저자는 이 풍요롭고 화려하고 찬란한, 그러나 파국적인 현대 산업 문명을 극복하기 보다는 그 속의 또 다른 주체로 수용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잊혀지고 지워지고 외면 되었던, 근대를 형성한 아프리카 흑인의 기여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지식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참 좋은 경험을 제공한다. 그렇지만 현재를 넘어서는 상상력의 부재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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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연구 - 비밀에 부쳐진 말들, 삭제된 존재의 배회, 트라우마의 체현
그레이스 M. 조 지음, 성원 옮김, 김은주 해제 / 동녘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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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는 우리의 DNA 안에 부호화되어 있다(...) 우리의 몸은 부모와 조부모들이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물려받는다. 과거는 물질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빚어낸다.'(12쪽)


'양공주'는 미국인과 성적인 관계를 맺는 한국 여성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양공주, 양키 갈보, 미군 색시, 양갈보, 양색시, UN 숙녀, 위안부, 기지촌 매춘부, 군인 신부. 미군 기지 근처의 술집에서 일하는 이 서구화된 여성은 공식적으로는 한국과 미국 정부 모두에게 멸시 당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미군에게 휴식과 오락거리를 제공하고 한국 경제에는 달러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격려받는다.


그들은 미국의 이해관계를 묶어둠으로써 자국을 위해 봉사하는 애국자인 동시에 반미 정치의 화염에 기름을 끼얹는 미 제국주의의 비극적인 피해자다. 이들의 노동은 국가의 외화 소득을 늘려주었지만 막상 이 여성노동자들 스스로는 빛이 눈덩이처럼 불어서 가혹한 환경 아래의 성노동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 여성들은 한국의 예속 상태에 공모한다는 이유로 동포들의 증오를 자아내는 동시에 아메리칸 드림의 손길이 닿는 곳에 있다는 이유로 동포들의 질투를 유발한다. 한반도의 한국인들에게 혐오와 욕망을 자아내는 과잉 가시적인 대상인 동시에 한인 디아스포라의 집단 정서 안에 감춰진 그늘진 인물이다.

전쟁은 미군과 한인 여성이 빈번하게 성적 만남을 가질 조건을 낳았고, 이 가운데 일부는 1945년의 전쟁신부법에 힘입어 결혼과 미국 이민으로 귀결되었다. 이 만남 속에는 미군 지배, 전쟁의 폭력, 자애로운 미국이라는 폭력의 미화가 얽혀 있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국가적인 담론 속에 편입된 전쟁신부는 한국전쟁과 한미 관계의 트라우마에 관한, 그리고 자신의 과거에 관한 비밀을 묻어두어야 한다.

그들은 미군을 상대로 매춘 일을 했던 100만여 한인 여성의, 그리고 미군과 결혼한 10만여 한인 여성의 상징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집단 트라우마와 판타지에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 모든 것이 삭제된 유령 같은 인물이다. 그들에게는 뒤에 남겨진 모든 양공주들과 죽음을 통해 기지촌을 탈출한 이들 뿐만 아니라, 감춰진 그 자신의 과거가 유령처럼 들러붙는다.

미국 신부로서 양공주가 자기 몸 안에 있는 양갈보로서의 양공주를 억압할 때, 그는 자기 과거의 유령에 의해 배회당하고, 이 유령들은 여러 세대를 거쳐.대물림되어 가족사에 관한 앎의 틈새라는 형태로 자녀들을 배회한다. 그들이 그 자신에 관해, 그리고 자신이 상징하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관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은 디아스포라 전체에 무의식적으로 전파된다.

이 책 '유령 연구'는 '양공주라는 상실과 창조성을 상징하는 인물이 어떻게 트라우마의 효과로부터 그 생명력을 얻게 되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그레이스 M. 조. 저자 자신이 미군 상선의 선원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주한 양공주의 딸이다. 절은 시절 이 사실을 알게된 저자는 큰 충격에 빠졌다.

저자는 정체성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고, 그런 경험은 저자를 정신적, 지적으로 재구성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 이후로 저자의 목표는 '가족에 관한, 그리고 내가 태어난 나라와 나를 받아준 나라, 그리고 나의 관계에 관한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 그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저자의 대학원 박사 논문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저자는 양공주 이야기의 진입점을 3곳으로 본다. 미군이 한반도에 발을 들인 1945년, 끝나지 않았으나 잊혀진 한국 전쟁이 시작된 1950년, 그리고 어쩌면 그보다 더 일찍, 일본군 위안부 징발과 함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이들 진입점 자체가 양공주라는 영적 힘을 가진 인물이 어떻게 트라우마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그 자신의 삭제를 통해 한인 디아스포라의 무의식에 어떻게 침투하게 되었는지, 개인적 트라우마가 제국주의와 국가주의에 의한 역사적, 공동체적 트라우마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암시한다. 그리고 이 책은 그 트라우마의 해체와 극복을 위한 노력이다.

저자는 이 책을 꽤 고통스럽게 썼다고 한다. '이 책을 쓰는 과정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한국 내 미군 점령지에 물리적으로 가까이 가는 게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 뒤에 나는 고통과 친구가 되었고 이후 작업을 하는 동안 그 고통을 길잡이 삼아 수차례 한국을 방문해서 내 정신과 DNA 속에 살아있는 역사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책은 오래 전에 지어진 책이다. 미국에서 책이 출간된 후 15년이 지나서 2025년 말에 한국어판이 나왔다.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에 의하면 2022년 대법원은 한국 정부가 미군의 포주 역할을 하며 '치료 시설'에서 여성들을 가두고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했다고 주장한 전직 기지촌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2024년 여름, 활동가들은 한국에 마지막으로 남은 몽키 하우스(치료를 받은 여성들이 원숭이처럼 늘어졌기 때문에 붙은 별명)를 한미 동맹이라는 미명하에 학대 당한 여성들을 기리는 기념물로 보존하기 위해 동두천에서 천막 농성을 시작했다. 그리고 저자가 서문을 쓰는 시점까지 343일째 최전선에서 몸을 던지고 있다. 기억은 잊혀졌지만 삭제당하지 않는다. 유령은 대한민국에서도 배회하고 있다.

저자 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이 책을 제법 힘들게 읽었다. 내용의 역사성이 나를 아프게 만들기도 했지만, 저자의 글쓰기 방식도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책의 말미에 달린 해제는 '책을 구성하는 다섯 장은 일관되지 않은 서술에 따라 각기 다른 목소리와 서사들이 겹치고 서로 다른 장르적 형식이 뒤섞이면서 다층적이며 다중적인 글들의 겹을 만들어낸다.'고 표현한다.

그리하여 심층적이고 다층적이고 예리하고 역사적이고 해체적인 이야기가, 어휘는 학문적이고, 문장은 현학적이고, 서술은 연극적이고, 인용은 넘쳐나고, 동어는 반복되고, 은유는 과하고, 수사는 장황하다. 무식한 나에게는 그렇다.

어쩌면 그것은 다층적이면서 상충되는 여러 겹의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파편과 반복으로 엮어내는 실험적 글쓰기 방식'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덕분에 나는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의 고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매 문장마다, 매 단락마다, 매 챕터마다 달라지는 파편 같은 생각을.

책을 끝까지 읽었지만 여전히 많은 것들이 미진하게 느껴진다. 나는 저자가 말하는 많은 것들을 알아듣지 못한 채, 이해하지 못한 채, 비껴가고 넘어갔다. 대신에 저자가 말하는 것들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직관적으로 느꼈다.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볼까 생각했지만, 지금 다시 읽어봤자 여전히 힘들고 애매할 거라는 것을 안다.

이 책을 다시 읽는 건, 내가 더 유식해진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언제 이 책을 다시 읽을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이대로 잊어버리기에는 아까운 책이다. 이 파편적이고 반복적인 이야기는 무지한, 아니면 무관심한 나를 자꾸만 밀어붙인다. 생각하라고. 그것이 이 책이 나에게 가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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