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지구를 먹어치우는가 - 초가공식품과 식품산업이 만들어낸 게걸스러운 인류의 탄생
헨리 딤블비.제미마 루이스 지음, 김선영 옮김 / 어크로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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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람은 나쁜 시스템을 절대 이기지 못한다."

1950년 영국 인구 중 임상적으로 비만인 사람은 1퍼센트 미만이었다. 요즘은 그 수치가 28퍼센트에 이른다. 그 사이에 영국 대중의 의지력이 완전히 사라지기라도 한 것일까 물론 아니다. 변한 것은 대중이 아니라 식량 시스템이다.

식량 시스템은 이제 지상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혁신적이며 파괴적인 산업 중 하나가 되었다. 1만 2000년 전, 홀로세가 시작되었을 때 지구의 인구는 250만 명으로 수많은 야생동물에 비해 턱없이 적었다. 오늘날 야생동물은 85퍼센트나 줄어들었다. 요즘 우리가 기르는 반려동물은 지구상의 전체 야생동물과 무게가 비슷하다.


수많은 종을 부양하던 땅은 이제 오로지 인간을 위해 경작된다. 식용으로 기르는 동물의 총 무게는 현재 인류 전체 무게의 2배이고, 야생 척추동물과 조류의 무게를 합친 것보다 20배가 넘는다. 식량 시스템은 연료 산업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온실가스 배출원이자 산림 파괴, 가뭄, 단수 오염, 수생 생물 고갈의 주요 원인이다. 그리고 이중 많은 부분을 식용 가축 산업이 차지한다. 영국의 경우 농업 온실가스 배출량의 3분의 2가 소나 양 같은 반추동물의 트림과 배설물에서 나온다.

환경 파괴, 특히 기후 변화는 현재 식량 시스템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요인이다. 그런데 우리의 식량 시스템은 환경을 파괴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전 세계적으로 식량 시스템은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최대 3분의 1을 차지한다. 식량 시스템은 지구의 물, 질소, 탄소의 순환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위협한다.

현대 식량 시스템에서 가장 싸고 풍부한 재료는 설탕 같은 단순당, 밀가루 같은 정제 탄수화물, 그리고 지방이다. 이는 생물학적으로 인간이 갈망하도록 프로그램된 재료들이다. 현대 가공식품 중 80퍼센트 이상이 건강에 해롭다. 이는 식품 제조업체가 사악해서가 아니라, 해로운 식품이 더 잘 팔리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영국인의 28퍼센트는 주로 육체노동을 하는 제조업에, 11퍼센트는 농업에 종사했다. 20세기 말에 이르러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영국인의 비율은 10명 2명으로 줄어들었다. 1970년대 중반 영국인이 연평균 410킬로미터를 걸은 반면, 2010년에는 288킬로미터로 줄어들었다. 근데 그렇게 삶의 방식이 달라졌어도 칼로리 소비량은 변하지 않았다.

신체 활동이 매우 활발한 집단이나 좌식 생활을 하는 사무직 집단이나 하루 칼로리 소모량은 거의 비슷하다. 수렵 채집을 하는 탄자니아의 하드자 부족이나 도시의 미국인이나 하루 평균 칼로리 소모량은 다르지 않다. 신체 활동이 늘어나면 몸은 이에 대응해 휴식대사에 소모하는 에너지를 줄인다. 운동만으로는 살을 빼기 어려운 이유다.


식량 시스템이 환경 파괴와 비만만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불평등도 만들어 낸다. 영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에 사는 10세 ~ 11세 아이들은 가장 부유한 지역에 사는 또래 아이들보다 더 뚱뚱하고 키도 눈에 띄게 작다. 소득 하위 20퍼센트 가정의 아이들은 소득 상위 20퍼센트 가정의 아이들보다 과일과 채소는 3분의 1, 등 푸른 생선은 4분의 3, 섬유질은 5분의 1 적게 섭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결과 소득 하위 10퍼센트 가정의 아이들은 소득 상위 10퍼센트 가정의 아이들보다 5세 때 충치가 생길 확률이 3배 더 높고, 11세 때 과체중이거나 비만일 될 확률이 2배 가까이 높다. 이 아이들의 부모는 식이성 질환으로 사망할 확률이 거의 2배 더 높다. 또한 이 부모들은 예방 가능한 심혈관 질환으로 사망할 확률이 평균 2.1배 더 높고, 예방 가능한 암으로 사망할 확률도 1.7배 높다.

현재 영국에서 소득 하위 10퍼센트 지역에 사는 여성들의 기대수명은 가장 부유한 지역에 사는 여성들보다 7.7년 짧다. 남성의 경우 두 지역간 기대수명의 차이가 9.5년이다. '건강 기대수명', 즉 건강하게 살아가는 기간은 더욱 큰 차이를 보여 부유층과 빈곤층의 건강수명 격차는 19년이다.


가난할수록 장보기는 어렵다. 영국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은 가장 부유한 지역보다 패스트푸드 매장이 2배 가까이 많다. 영국인 중 330만 명이, 대중교통으로 15분 거리에 신선한 식재료를 파는 매장이 없는 곳에 산다. 최저소득 가구의 40퍼센트는 자동차가 없다. 이들에게 '건강한' 장보기는 추가적인 시간과 에너지, 교통비, 노동을 요구한다.

현재 영국에서는 190만 명이 가스레인지가 없이 살며, 280만 명은 냉동고가, 90만 명은 냉장고 없이 생활한다. 이보다 더 많은 자정이 주방용 가전제품을 갖추고 있지만, 전기요금이 부담돼서 선뜻 활용하지 못한다.

음식을 직접 요리하려면 시간과 지식, 자신감이 필요하다. 예산이 빠듯하면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건강에 해로운 가공식품이 신선식품보다 칼로리당 가격이 더 저렴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여기에 장보기와 요리에 드는 귀중한 시간, 서툰 요리 솜씨로 식재료를 낭비할 위험까지 고려하면, 가공식품은 더욱 경제적으로 느껴진다. 가난할수록 식비 예산이 유연하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는 난방비나 월세보다 식비 예산을 우선 줄이게 된다. 이들에게 학교 급식은 아주 중요하다.

자유주의자는 항상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교육! 운동! 의지력! 다들 알다시피 전혀 효과가 없는 것들이다. 자유시장 옹호자들이 사랑하는 '선택'이라는 구호도 착각일 뿐이다. 소비자에게 실제로 얼마나 많은 선택권이 있을까? 최하위 소득층에게는 제대로 먹기 위한 선택 자체가 몹시 힘겨울 수 있다. 기업들도 그리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 정부가 행동에 나서야 할 때이다. 정부는 담배 소비를 줄이기 위해 성공적으로 개입한 것처럼, 이제 정크푸드 악순환을 끊기 위해 같은 조치를 해야 한다.

그럼에도 식량 시스템은 수정할 수 있다. 우리의 식욕과 행동은 식량 시스템의 작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가 식욕과 행동을 조절하면, 식량 시스템도 조절할 수 있다. 사실 변화는 불가피하다. 현재 우리의 식습관 때문에 국가가 치러야 할 비용은 조만간 감당하기 힘든 수준에 이를 것이다. 위기가 재앙으로 번지기 전에 행동에 나서야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철학을 전공한 요리사다. 그러면서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패스트푸드를 지향하는' 외식업 프랜차이즈 레옹(LEON)의 공동 창립자이며 영국 정부의 훈장을 받은 영국의 식품 정책 전문가이다. 그는 2019년 영국 정부의 요청으로 <국가식량전략>을 세운다.

이 책에는 그 당시의 경험과 연구가 많은 내용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변화를 촉구한다. 우리의 식량 시스템은 우리의 건강을 망치고 있다. 그리고 지구를 먹어 치우고 있다. 우리는 식량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변해야 한다. 초가공식품의 섭취를 줄여야 한다. 육식을 줄여야 한다. 농지를 자연에 돌려주어야 한다. 토지를 활용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지구의 위기 앞에서, 그의 요구는 구체적이고 즉각적이다. 그리고 매우 영국적이다. 그의 관점은 1세계적이고, 그의 진단과 처방은 영국에 대한 내용이다. 그럼에도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매우 공감 가고 설득력이 있다. 우리가 죽이고 있는 것은 한국이나 영국 뿐만 아니라 결국 우리 자신과 지구 전체니까.

우리는 절박하다. 무엇이든 해야 한다, 지금 당장. 그것도 한 가지가 아니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 책에서 요구하는 식량 시스템의 변화는 그 중의 하나이다. 하나의 해법을 실행한들 지구의 위기가 없어지지는 않을 거다. 그러나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동시 다발적으로 여러 가지를 해야 한다. 좋든 싫든, 쉽든 어렵든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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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노예제도
에릭 윌리웜스 지음, 김성균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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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8세기 상업자본주의가 노예제도와 독점무역을 기반으로 성립된 반면에 19세기 산업자본주의는 노예제도와 독점무역을 파괴했다."(38쪽)


17세기 중반 유럽인들이 설탕의 단 맛에 중독되면서 설탕값은 하늘로 치솟지만,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를 대량 재배할 수 있는 중남미에는 인력이 부족했다. 선주민들은 과로와 질병으로 급속히 숫자가 줄어들었고, 백인계약노예만으로는 필요한 노동력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그러자 서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대상으로 노예무역과 노예농장이 폭발적으로 팽창한다.

리버풀에서 총, 탄약, 공산품을 싣고 떠난 잉글랜드 상선이 서아프리카 해안으로 가서 흑인노예를 사들이고, 이를 중남미의 노예농장에 팔아치운 후 그 돈으로 설탕을 사서 잉글랜드로 돌아오는 이른바 대서양 삼각무역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대서양 삼각 무역은 *브리튼 자본주의가 산업혁명을 일으키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자본 축적의 원천이 된다.
*브리튼 :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흑인노예가 노예무역선에 실려서 대서양을 가로질러 항해할 동안 노예 1명당 고작해야 길이 168cm 너비 40cm에 불과한 공간만 할당받았다. 각자의 오른다리는 옆 노예의 왼다리와 함께, 오른손은 왼손과 함께, 쇠사슬에 묶여서, '책장에 빼곡히 꽂힌 책들'처럼 범선에 빼곡히 채워진 노예들 각자에 허용된 공간은 1인용 관보다도 좁았다. 흑인노예들은 꼼짝없이 묶여 수송되는 가축들이나 마찬가지였다.

흑인노예제도를 탄생시킨 것은 인종논리가 아니라 경제논리였다. 흑인노예제도는 흑인들의 피부색 때문이 아니라 저렴한 노동력때문에 생겨났다. 흑인노예의 노동력은 아메리카 선주민이나 백인 노동자의 노동력보다 월등히 우수했다. '하등인간'의 특징으로 널리 주장되던 흑인의 외모들은 식민지들이 값싸고 우수한 흑인 노동력을 원했기 때문에 뒤늦게 동원한 그럴싸한 핑계들에 불과했다.

19세기가 생산의 시대였다면 17세기와 18세기는 무역의 시대였다. 브리튼의 삼각무역은 다른 무역들의 원천이자 토대였고, 브리튼의 산업을 삼중으로 촉진했다. 브리튼에서 모직물, 면직물, 설탕, 럼주, 파코티예(잡화), 금속품 등 공산품 제조업이 발달했고, 잉글랜드에서는 금융업, 중공업, 보험업 등 새로운 산업들이 생겨났고, 식민 농장에서는 열대특산물들을 생산하는 한편 브리튼 산업 생산품의 시장이 되었다. 삼각무역으로 축적된 이익금은 잉글랜드 산업혁명을 촉진시킬 중요한 돈줄이 되었다. 흑인노예들은 식민지들의 근본적인 토대이자 버팀목이었다.

상업주의가 촉진한 산업발전은 훗날 상업주의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과도하게 진행되어 오히려 상업주의를 파괴해버렸다. 북아메리카인들의 밀수를 막기 위해 1764년 제정된 설탕관세법은 미국 독립 전쟁으로 직결되었고, 미국 독립은 상업주의 체제를 파괴하고 낡은 옛 체제에 대한 불신을 조장했다. 미국독립은 그 당시 잉글랜드에게는 국가재난으로 생각되었지만, 실제로는 구시대에 종언을 구하고 신시대의 등장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북마메리카 식민지 13곳의 독립은 브리튼 공산품들이 식민시장을 독점하고, 식민지생산물들이 본국시장을 독점한다는 식민체제의 근간을 무너뜨렸다. 1783년 브리튼은 미국과의 자유무역을 허용했고, 급성장한 국제무역은 상업주의를 깨뜨리고, 산업주의의 팽창을 촉진한다. 이후 브리튼의 기계화된 생산력은 세계전역을 브리튼의 발판으로 만들어갔고, 브리튼은 세계의 은행이 되어갔다.

브리튼의 엄청난 산업팽창 앞에서 서인디아의 무역독점권은 브리튼 자본주의의 골칫덩이로 거센 비난을 받았고, 비난은 서인디아의 기반인 노예무역과 노예제도로 차례로 이어졌다. 브리튼에서 1807년 노예무역이 폐지되었고, 1833년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브리튼 자본가들은 서인디아의 노예제도를 파괴하면서도 브라질, 쿠바 섬, 미국의 노예제도를 번창시키는 데 꾸준히 공헌했다. 저렴한 설탕을 원하는 욕망은 노예제도에 대한 모든 혐오감을 압도했다.

식민체제는 상업주의시대에 상업자본주의의 척수였다. 자유무역시대에 산업자본가들은 식민지들을 아예 원하지 않았다. 산업발전은 자유무역운동의 발전과 함께 나란히 진행되었다. 노예제도 덕분에 성장한 자본가들이 바로 노예제도를 변화시키고 파괴한 장본인들이었다. 노예제도는 상업주의와 흥망을 같이했다. 요컨대, 흑인노예들의 해방을 촉진한 것은 바로 흑인노예노동이 창출한 경제력의 발달이었다.

17, 18세기 브리튼과 프랑스는 산업발전과 자유들을 수반하는 의회민주주의로 대변되는 근대세계를 선도한 국가들이었다. 브리튼 자본주의의 특징은 프랑스 자본주의의 특징이었다. 다른 해외지역들은 부차적이었다. 이 시대 역사를 결정한 힘은 발달하는 경제력이었다. 시대의 정치이념과 도덕관념은 경제발달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브리튼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은 노예제도를 오늘 옹호하다가 내일 비난하고 모레 다시 옹호하는 식으로 돌변했다. 오늘 제국주의자인 그들은. 내일 제국주의반대자들로 돌변하고 또 한 세대가 지나면 제국주의옹호자들로 변할 것이다. 더구나 언제나 맹렬히 변덕을 부린다. 방어나 공격은 언제나 고상한 도덕이나 정치논리를 빌미로 행해진다.

지배세력이 의존하는 통념들은 그 세력들이 파산한 후에도 오랫동안 살아남아서 그 세력들의 해묵은 병폐를 재발시킨다. 그렇게 살아남은 모든 통념은 이제 그것들이 부응하던 지배세력들이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해롭다. 우리는 이런 해묵은 편견들 뿐만 아니라 줄기차게 생겨나는 새로운 편견들도 경계해야 한다. 어떤 시대도 이 의무를 면제받지 못한다.


브리튼 자본주의 발전에 이바지한 노예제도의 역할'을 연구한 이 책은 '트리니다드토바고'의 독립운동가이자 총리였던 '에릭 윌리암스'가 1938년 발표했던 박사 학위 논문을 개정하고 보완하여 1944년에 출판한 책이다.

출간된지 88년이나 된 이 오래된 책은 그만큼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고 한다. 책의 추천사를 쓴 경제학자 홍기빈이나 해설자 서문을 쓴 역사학자 콜린 A. 파머에 의하면 이 책은 출간되어 찬사와 갈채와 함께 심각한 비판을 받아왔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논쟁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노예무역과 노예제도를 산업혁명을 이룬 자본축적의 핵심으로 놓고, 노예제 철폐의 핵심 동기를 인도주의가 아니라 경제구조로 놓은 이 책의 내용을 '수정 없이 그리고 아무런 제한 없이 그대로 말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이 책의 핵심 논지들은 지식적으로 무너지지 않았'고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18,19세기의 오래전 자본주의를 말하는, 이 오래된 책을 굳이 읽는 이유를 묻는 다면 나는 홍기빈이 쓴 추천사를 인용하여 말해주고 싶다. 이 이야기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라고.

"이 대서양 삼각무역을 보라. 그야말로 21세기에 벌어지고 있는 '지구화'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생산에 필요한 자연 원자재의 수탈이 가장 용이한 곳에서 목불 인견의 끔찍한 참극이 벌어지며, 생산 비용을 가장 낮출 수 있는 입지 조건에서 또 살인적인 조건의 노동 착취가 벌어지며, 그렇게 해서 생산된 물건은 구매력이 충분한 지역으로 운반되어 엄청난 규모로 조장되는 소비주의의 총아가 된다."

게다가, "우리는 이런 해묵은 편견들 뿐만 아니라 줄기차게 생겨나는 새로운 편견들도 경계해야 한다."는 저자의 경고는 바로 오늘 이 순간까지도 우리가 되새겨야 할 외침이다. 일베의 차별과 혐오가 청년들의 놀이가 되고, 표현의 자유가 되는, 2026년 7월 6일이라는 부끄러운 오늘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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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의 역사 - 설탕 알갱이 한 알에 담긴 달콤한 ‘야만’을 넘어서
이성규 지음 / 우물이있는집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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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젠틀맨'이라는 말은 '젠트리'라는 계급에서 비롯된 말이다. 젠트리는 귀족보다는 한 단계 낮았지만, 막대한 토지와 경제력을 소유한 상류층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 젠트맨들은 많은 경우 노예 무역상이었다. 영국에서는 인자하고 자선을 베푸는 신사들이 식민지에서는 노예들을 착취하는 대농장의 주인이었다. 이들은 설턍과 노예의 삼각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유럽 선뱍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라는 '화물'을 싣고 브라질이나 아메리카의 설탕 농장으로 향했다. 노예를 팔고 그 돈으로 설탕을 사서 리버풀, 리스본, 런던으로 와서 판매했다. 그리고 나서 의류나 면직물을 싣고 아프리카로 향했다.이들은 매 항해마다 돈을 벌었고, 노예 무역으로 이룬 막대한 부는 산업 혁명의 초석이 되었다.
설탕의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영국인들은 설탕에 중독되었다. 영국인의 1인당 설탕 소비량은 1700년 4 파운드에서 1890년 90 파운드로 증가했다. 그들은 설탕을 듬뿍 넣은 차를 마셨고, '커피하우스'가 생겨났다. 대화와 토론의 장소였던 커피하우스를 통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싹텄다. 또한 커피하우스는 증권거래소의 역할을 하여 로이드 보험사 같은 금융 회사들의 산실이 되었다.

설탕이 영국에서 산업 혁명의 밑거름이었다면,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의 밑거름이었다. 일본이 설탕 생산 기술을 습득하면서 사츠마 번 지역 중심으로 생산이 이루어졌다. 설탕 산업을 통해 막대한 세수를 확보한 사츠마 번은 군사력을 키우고 근대 공업의 기반을 조성할 수 있었다. 결국 사츠마 번이 막부를 쓰러뜨리면서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는 정반대의 현실이 펼쳐졌다. 서부 아프리카 연안의 권력자들은 젊은 남성들을 카리브해나 아메리카의 식민지로 팔아치웠다. 이렇게 팔려간 노예들은 그야말로 참혹한 삶을 살아야 했으며, 그들을 팔아치운 권력자들 역시 결국에는 자신의 모든 부와 권력을 잃고 서구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된다.
흑인 노예들이 탑승했던 노예선은 지옥 그 자체였다. 노예들은 철저한 화물로 여겨졌다. 이들은 수심보다 낮아 춥고 축축한 배의 밑바닥에서 다른 노예들 사이에 끼여있었다. 길이는 1.5m, 폭은 28cm 정도의 공간에서 사슬에 묶여 숨 쉬기도 어려운 상태에서 몇 개월을 지내야 했다. 결국 노예들에게 병이 돌았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들은 설탕 농장의 노예로 투입되었다. 설탕 플랜테이션의 삶은 말 그대로 참혹했고, 이를 견디다 못한 노예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노예들은 사탕수수 원액이 펄펄 끓고 있는 솥으로 뛰어들거나 나무와 문에 목을 매달았다. 이들은 죽으면 영혼이 아프리카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설탕 생산이 가져다 주는 막대한 이익 때문에 카리브해 연안의 식민지들은 오직 사탕수수 생산을 위한 기지로 전락해 버렸다. 이러한 한 가지 작물에만 몰입하는 농업 형태를 '모노컬처'라고 부르는데, 이로 인한 폐해는 식민지 국가에 오래도록 싶은 상처를 남겼고, 이들 국가들은 현재까지 빈곤과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21세기 들어 '젠틀맨'들이 노예무역을 통해 얻은 막대한 부의 정당성에 의문을 표하며 배상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카리브해 연안 15개국으로 구성된 '카리콤'이 노예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등을 대상으로 2014년 손해 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현재까지도 진행중이다. 유대인 홀로코스트에는 손해 배상금이 지급되었지만, 흑인 노예 무역에 대한 배상금은 어느 누구도 지급하지 않았다.

많은 흑인 노예들은 잔혹한 삶을 다양한 방법으로 거부하고 투쟁해왔다. 자메이카에서는 탈출한 노예들이 모여 '마룬' 공동체를 구성하여 서구 제국주의 세력과 싸웠다. 영국은 끝내 마룬 빌리지를 토벌하지 못하고 평화협정을 맺는다.

프랑스 식민지 아이티에서는 흑인 노예들의 독립 혁명이 일어나 독립을 쟁취하고, 최초의 흑인 공화국 아이티가 탄생한다. 그러나 사탕수수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아이티 공화국은 서구 열강들에 봉쇄되어 기아에 시달리다 결국 프랑스에게 1억 5천만 프랑의 '독립배상금'을 약속하고 외교 관계를 복원한다. 노예무역과 강제노역에 시달렸던 아이티가 프랑스에 배상금을 지급 받는 대신, 프랑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게 된 것이다. 아이티는 지금까지도 이 거액의 배상금으로 인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사탕수수가 백인 농장주와 흑인 노예들하고만 연관되는 남의 얘기는 아니다. 사탕수수는 우리 하고도 연결점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의 최초 미국 이민자들이 1902년 제물포항에서 출발한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들이다. 첫 이민을 시작으로 1905년까지 단기간에 7,000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이 하와이로 왔다. 이들 중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한 사람의 숫자는 약 5,000명이었다. 어린 아이들과 환자들을 빼고 나면 거의 모두였다.

이들 사탕수수 노동자들의 삶은 만만치 않았다.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의 참상이 이곳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가혹한 노동조건 때문에 중국, 일본, 한국 순으로 대규모 이민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많은 이민 노동자들이 학대받거나 고문을 당했으며 수족이 절단되거나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에 죽었다. 아프리카 노예들과 마찬가지로 펄펄 끓는 솥에 뛰어들어 자살한 일도 있었다.

대부분 건장한 젊은 남성인 이들이 하와이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이들의 결혼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결국 전문 브로커를 통해 오로지 신랑의 사진 하나만 들고 신부들이 태평양을 건너왔다. 이른바 '사진 신부'들이다.

사진 신부들은 교회를 통해 신식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많았다. 이들은 새로운 나라에 대한 환상을 품고 배를 탔지만, 그들을 불러들인 남편들은 나이가 너무 많았고, 평생 중노동에 시달린 사람들이어서 거칠고 억셌다. 그들의 환상은 참혹하게 깨어졌다. 이혼을 하는 경우도 많았고, 나이 차이 때문에 남자들이 일찍 죽는 경우도 많았다.

한국인 사진 신부들의 삶은 이처럼 각박했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조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하와이의 여성들은 1908년 '신명 부인회'를 시작으로 여러 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1919년 3.1 운동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자 '부인 구제회'를 새롭게 출범시켰다. 이 조직을 통해 모금을 하고, 옷을 만들어 팔아 모은 자금까지 더해서 상해 임시 정부와 만주 독립군을 후원했다. 이들이 하와이에서 만든 독립 선언서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설탕은 생각해보면 매우 특별한 물질이다. 공장에서 정제된 설탕은 순도가 거의 100퍼센트에 가까울 정도로 순수하고, 눈부시게 하얗다. 형태도 균일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달콤'하다.

하지만 이런 매력적인 이미지 뒤편에는 잔혹한 대비가 자리한다. 흑인들은 납치, 강제 이주, 감금, 폭행, 살인을 겪는다. 백인들은 설탕 공예와 커피, 차와 같은 음식 문화를 넘어 민주주의와 산업혁명을 이루고 그 달콤함을 만끽한다. 이보다 더한 대비가 있을까.

설탕의 역사는 우리에게 착취와 폭력 그리고 획일성이 지배해온 '야만의 역사'를 보여주었다. 이제 우리는 설탕 알갱이 한 알에 담김 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착취와 폭력에 기대지 않는 새로운 문명의 시작이 되지 않을까?"


이 책 '설탕의 제국'은 부산 MBC의 PD가 지은 책이다. 자신이 수년을 준비하여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기반으로 펴낸 책이다. 저자는 '설탕'을 매개로 젠틀맨과 노예와 해적을 잇는 대하드라마를 만들고자 했다.

그가 제작한 다큐멘터리는 모르겠지만, 이 책이 그러한 의도를 충분히 살린 것 같지는 않다. 저자는 젠틀맨의 우아한 교양과 친절, 그 이면에서 1천만 명의 노예가 흘린 피땀, 그리고 이 사이에서 저항하는 해적을 그리고 싶어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저항하는 해적'이라는 설정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작가는 '저항하는 해적의 이미지를 '마룬'과 '사략'에 투영한다. 탈출 노예의 공동체인 마룬이 저항을 상징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자유 공동체였던 마룬과 해적의 연관성을 나는 모르겠다.

반면 사략(私掠)은 해적 맞다. 이들은 국가에게 허가 받은 해적이다. 그러나 이들이 저항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이들은 사략선으로 약탈한 재물을 국가와 나누었다. 이들은 저항자라기 보다는 차라리 약탈자 아니었나?

당시 해적은 민주적인 공동체를 이루어 활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설탕이나 아프리카 노예와 연관되어 보여주는 해적의 저항성은 미흡하다.

그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충분히 읽어볼 만 하다. 설탕을 통해 '달콤한 야만'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제국의 풍요롭고 우아하고 멋진 문화와 삶과 철학이 식민지 노예들의 피와 죽음을 밑거름으로 태어난 열매임을 알려준다. 그 풍성하고 찬란한 열매가 그들만의 것이 아님을, 인류의 양심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음을 이 책은 넌지시 알려준다.

게다가 이 책은 가독성이 뛰어나다. 다큐멘터리를 기반으로 만든 책 답게 깊고 복잡하게 얘기를 끌어가지 않는다. 목청을 높이지도 않는다. 세상을 담아낸 카메라의 메모리를 문장으로 풀어낼 뿐이다. 차분하고 담담하게 설탕이 흘러온 길을 흩는다.

게다가 텍스트로 부족하다면 영상이 기다리고 있다. 유튜브에서 '설탕의 제국'을 검색하면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다. 이 얼마나 쉽고 편안한 역사 입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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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만나는 아즈텍 신화 - 국내 최초 나우아틀어 원전 기반 아즈텍 제국의 신화와 전설 드디어 시리즈 9
카밀라 타운센드 지음, 진정성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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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멕시코 중부 지역에 존재했던 '아즈텍 문명'은 인간을 제물로 바쳐서 신을 찬양하고 기렸던 잔혹한 문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일부만 진실이다. 이는 아즈텍을 정복한 스페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다. 스페인 침략자들은 정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메쉬카를 비롯한 원주민 종족을 극도로 야만적이게 묘사했다.

이 책의 저자이며, 아메리카 원주민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인 '카밀라 타운센드'는 아즈텍 원주민들의 언어인 '나우아틀어' 문헌과 기록을 해독하여, 스페인 침략자들의 왜곡된 이야기가 아니라 아즈텍 원주민 자신들이 직접 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 책은 아즈텍이 식민지가 되기 이전에 전해지던 구전의 일부를 옮겨적은 나우아틀어 원전과, 잃어버린 전통에 대한 메쉬카 원주민의 고찰이 담진 자료를 기반으로 쓰여졌다. 이 책에서 지칭하는 '아즈텍'은 멕시코 중부에 거주했던, 나우아틀어를 쓰는 모든 종족을 가리킨다.



아즈텍 사람들은 종족의 주권과 유대를 중시했다. 이들은 작은 종족 단위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고, 작은 공동체가 모여 큰 공동체를 형성했다. 각 종족은 자치권을 누리는 동시에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어 평화롭게 공존했다. 아즈텍인에게 가장 중요한 공동체 단위는 '알테페틀'이었데, 이들은 구성원들의 의향에 따라 더 작게 나눠지기도 하고, 때로는 더 큰 공동체를 구성하는 등 유동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아즈텍인들은 1년의 달력 '시우포우알리'와 요일의 달력 '토날포우알리' 두 가지를 함께 사용했다. 그들에게 오늘의 세상은 이미 네 번 파괴되고 새롭게 탄생한 다섯 번째 태양의 시대이다.



아즈텍인들에게 신은 유한하고 변화무쌍한 존재이다. 그들에게 신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신성은 거대한 자연처럼 서로 뒤섞이고 어울리는 개념이었다. 예측하지 못한 변화와 혼란, 모든 인간이 의존하는 풍요로운 땅,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 주는 창조력이 신의 섭리였다.



다른 문화권의 신화와 전설과 마찬가지로 아즈텍의 신화에서도 신들은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고, 때로는 인간 사회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심지어 신은 영적 존재가 아니라 먼 과거에 실존했던 태초의 인간 중 하나일 뿐이기도 하다.

아즈텍인은 지상에서의 삶이 영원한 우주로부터 '빌려온' 것이기에 귀하고 소중하게 여겼다. 한편 그들은 인간이 동물을 기르고 그 목숨을 취해 고기를 얻는 것처럼, 인간의 생명을 희생해 신에게 그 육신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즈텍 신화속 유명한 신들은 몸소 자기 희생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인간은 신처럼 용감한 존재가 아니었기에 아즈텍인들은 적들과 포로의 생명을 대신 바치는 방식을 택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뒤 적군을 희생시키는 것은 *메소아메리카 전역에 널리 퍼진 관습이었다.
* 메소아메리카 : 멕시코 중남부와 중앙아메리카 북서부 지역의 문명권을 통틀어 일컫는 말.(나무위키)



메소아메리카 여러 부족에게 죽음은 머나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살면서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되는 운명과 같았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피하기보다,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노래를 지어 불렀다. 살아남은 이들은 망자를 기억하며 4년간 기도하고 노래했다. 망자가 죽음의 땅인 믹틀란에 도달하기까지 4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메쉬카족은 아즈텍 제국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가장 중요한 종족이다. 이들은 북쪽에서 내려와 정착하고, 치치메카족과 오랜 시간 동맹 관계를 맺으며 멕시코 분지에 도시국가 '테노츠티틀란'을 세웠다.



아즈텍 신화와 전설을 보면 생존을 위한 싸움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 혼인 동맹과 결혼은 전쟁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아즈텍 제국에서 여성들은 사회적,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며 능동적인 삶을 살았다.


아즈텍 설화는 메쉬카가 12세기 초 테노츠티틀란에 정착하여 16세기 초반 스페인 제국주의에 무너지기까지의 고난과 역경, 영광을 모두 보여준다.


아즈텍 사람들은 신을 받들었지만, 때로는 신에 저항하기도 했다. 영적으로 강력한 사람인 나우알리(마법사), 점성술사를 비롯한 전문가들인 틀라마티니, 티시틀(의사), 토날포우카(점쟁이), 틀라마카스키(제관) 등이 신과 소통하는 직업이었다. 이들은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었다.

아즈텍 제국의 인신 공양 풍습은 처음에는 신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한 제물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이웃 종족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한 책략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잔혹해졌다. 거기에 스페인 정복자들는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신 공양의 규모나 잔혹성을 지나치게 부풀려 악마화하였다.

그러나 아즈텍인들도 오늘날 우리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춤추고 노래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축제를 즐겼다. 희생제의 때면 관중들은 엄숙하게 희생자의 넋을 기리며 장엄한 춤을 추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멕시코에 정착하여 원주민들과 섞여 살기 시작하면서, 멕시코 원주민들은 서로 다른 두 종교, 아즈텍 종교와 유럽 가톨릭이 뒤섞여 공존하는 종교 생활을 시작하였다. * 원주민들이 '에르난 코르테스'를 돌아온 케찰코아 신으로 여겨 숭배했다는 이야기는 유럽의 식민주의적 상상력이 반영된 오류이다. 흰 얼굴의 신은 나우아틀어 원전이나 아즈텍 기록에 있었던 내용이 아니라, 스페인의 아즈텍 정복 이후에 기록된 내용이다. 원주민들이 가톨릭을 받아들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멕시코 중부 원주민들은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면서도 옛 믿음을 굳건히 간직했다. 이들은 가톨릭 교리를 믿으면서도 지상에서의 삶이 소중하며 죽은 이들이 계속 살아 있게 하려면 의미 있는 방식으로 기억해야 한다는 아즈텍 신앙의 중심 사상도 잊지 않았다. 멕시코의 전통 신앙이 잘 드러나는 기념일이 바로 '죽은 자들의 날'이다.

스페인의 지배 이후 수 세기 동안 멕시코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보존하고, 심지어 되살리고자 노력해왔다. 멕시코의 나우아틀어 사용 인구는 현재 150만 명을 웃돌고 있고, 오늘날 메쉬카의 후손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계속해서 문화와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멕시코 학자 에두아르도 델라크루즈는 나우아틀어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연구자이자 운동가, 작가이다. 그는 2016년 나우아틀어를 영어가 아니라 나우아틀어로 풀이하는 사전을 완성했다.

세계 곳곳에서 점점 설 곳을 잃거나 희미해져 가는 소수 민족의 문화를 보존하는 일은 인류 전체의 다양성을 보존하는 동시에, 자국 문화를 더 넓은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모든 문화는 저마다의 독특한 특성과 의미, 지혜를 간직하고 있다. 다른 문화를 배우고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사고방식을 넓히고, 세계관을 확장해준다.

멕시코 선주민들이 침략자 코르테스를 신으로 여겼다는 이야기를 나는 '라틴아메리카의 열린 혈맥'이라는 책에서 접했다. 서구 제국주의의 라틴 아메리카 착취를 통렬히 고발한 이 책은1971년 출간된 책인데,. 국내에서는 '수탈된 대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금서 목록에 올랐다고 한다. '라틴아메리카의 열린 혈맥'이라는 이름은 2025년에 50주년 특별 스페인어 완역본으로 재출간되면서 붙여진 제목이다.

"목테수마는 케찰코아틀 신이 돌아왔다고 믿었다. 그 조금 전에 케찰코아틀 신의 귀환을 알리는 여덟 가지 전조가 있었다. (...) 그 신은 백인이고 수염이 많았다. 잉카의 양성 신인 우이라코차도 백인이고 수염이 많았다. 그리고 동쪽은 마야의 영웅적인 선조들의 출생지였다."(43쪽)

제국주의의 수탈을 고발한 이 책 때문에 우루과이에서 추방까지 당했다는 좌파 지식인 마저 '백인 신 코르테스' 얘기를 믿었던 것을 보면, 당시에는 이 얘기가 정설이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2020년 국내 출판된 '피와 불 속에서 피어난 라틴아메리카'(졸 찰스 채스틴 지음)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난 수 세기에 걸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코르테스는 곧 강림할 것으로 예언되어 있는 백색 피부의 신 케찰코아틀일 것으로 추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에스파냐인들이 도착하고도 몇 십 년이 지나서야 생겨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미 수없이 되풀이되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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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산업 - 홀로코스트를 초대형 돈벌이로 만든 자들은 누구인가?
노르만 핀켈슈타인 지음, 신현승 옮김 / 한겨레출판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인간이나 동물을 대량으로 태워 죽이거나 대학살하는 행위'를 뜻한다. 그러나 오늘날 홀로코스트는 2차 대전 중 나치 독일이 저지른 600만명의 유대인 대학살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통용된다. 그리고 이제 홀로코스트는 산업이다. 그리고 동시에 무기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는 원래 유대인 게토와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전쟁 종결 후 대략 10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2000년 이스라엘 총리부에서는 '살아 있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거의 100만 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생존자가 줄어드는 대신 오히려 크게 늘어난 것은 생존자가 많을 수록 요구할 수 있는 배상 금액이 커지기 때문이다. 1951년 각종 유대인 단체들에 의해 설립된 유대인 보상청구연맹은 독일과 대략 600억 달러의 배상금을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그 돈은 대부분 생존자에게 돌아가기 보다는 보상청구연맹의 관련자들에게 돌아갔다.

실제 강제수용소 생존자였던 저자의 어머니는 3,500 달러를 받았다. 저자의 어머니가 나치 박해에 시달리며 6년간 고생한 대가는 보상청구연맹 사무총장 사울 케이건의 12일치, 홀로코스트시대보험청구국제위원회 로렌스 이글버거 의장의 4일치, 홀로코스트 소송을 중재한 알폰스 다마토 전 뉴욕 주 상원의원의 10시간치 보수에 불과하다.

1990년대 들어 홀로코스트 산업은 노골적인 갈취자로 나서고 있다. 홀로코스트 산업은 홀로코스트 시대의 유럽 전역의 유대인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1998년 7월 집단 소송을 통해 스위스 은행들에게 스위스 은행에 예치된 홀로코스트 휴면계좌에 대한 배상금으로 12억 5천만 달러를 받기로 합의한다.

이들이 이렇게 커다란 돈을 받게 된 것은 미국 대통령과 의회와 언론을 동원한 피해 부풀리기, 얼토당토않은 비방, 경제적 보이콧 위협, 여론 조작 덕분이었다. 그러나 유대인을 위해 스위스 은행에 지속적인 압력을 가해온 미국은 자신들이 저지른 아메리카 선주민 학살이나 아프리카 노예제에 대한 배상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들은 미국 은행이나 이스라엘 은행에 예치된 홀로코스트 휴면계좌에 대해서는 모른 척 한다.

홀로코스트 산업은 스위스와 조정안을 성사시킨 후 독일의 민영 산업에 대해 200억 달러의 배상금을 요구하며 동일한 성공 전략을 전개했다. 결국 독일인들은 막대한 배상금 요구에 굴복했다. 그러나 보상청구연맹은 그 돈을 희생자가 아니라 다양한 특별 프로젝트에 사용했다. 스위스와 독일에서 성공한 보상청구연맹은 미국의 경제 제재라는 철권을 배경으로 동유럽과 오스트리아를 향한 갈취를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홀로코스트 배상 운동 시기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임기와 일치한다. 그의 선거자금의 절반은 유대인의 돈이었다. 영향력 있는 미국의 유대인 단체 및 개인들과 보조를 맞추었던 클린턴 행정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재산을 갈취한 것으로 여겨지는 유럽 각국으로부터 수십억 달러를 짜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에게는 쥐꼬리만한 금액을, 그것도 최대한 늦게 지급했다. 홀로코스트 배상 운동은 사실상 유럽 각국과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 대한 '이중의 갈취'였다.

홀로코스트 산업은 1967년 6월의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탄생했다. 이른바 6일 전쟁에서 보여준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무력에 깊은 인상을 받은 미국은 이스라엘을 중동의 대리인으로 격상시킨다. 미국 주류 사회의 편입 만을 노리고 있었던 미국의 유대인 엘리트들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동맹 강화에 전력을 기울이고, 그동안 외면했던 나치 홀로코스트를 기억에서 다시 살려낸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재무장된 홀로코스트는 이스라엘에게도, 미국의 유대인 엘리트들에게도 완벽한 무기가 되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침략 전쟁에 대한 비난도, 유대인 엘리트들의 계급 이익 보호를 위한 보수 정책에 대한 반대도 모두 반유대주의로 몰아세웠고, 이제 홀로코스트는 유대인에 대한 모든 비판을 불법화시키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미국의 상위 집단으로 성장한 유대인들은 나치 홀로코스트를 인류 역사상 견줄 데 없는 유일무이한 사건으로 만들었다. 홀로코스트가 유일한 것은 유대인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존재론적으로 특별하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는 절대적으로 유일무이한 역사적 사건이고, 이는 유대인에 대한 천년에 걸친 이교도의 끊임없는 증오의 결정판이다.

역시 나치가 저지른 50만 명의 집시 대학살과 수백만 명의 폴란드인 대학살은 홀로코스트가 아니다. 최소 수천 만 명 이상이 죽어간 아메리카 선주민 대학살도, 콩고에서 레오폴드 2세에 의해 죽어간 1천만 명의 아프리카인 대학살도,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저질러진 아시아 주민 학살도, 크메르 루즈의 킬링 필드도, 르완다의 제노사이드도 홀로코스트가 아니다.

미국에서 홀로코스트 관련 단체들은 100개를 상회하고, 일곱 개의 대형 홀로코스트 박물관이 있다. 그러나 미국 흑인 노예나 아메리카 선주민의 멸망을 기념하는 박물관은 전무하다. 총 17개 주에서 홀로코스트 프로그램을 교과목으로 지시하거나 추천하고 있으며, 많은 대학교들이 홀로코스트 강좌를 개설하고 있고, <뉴욕 타임스>에는 거의 매주 홀로코스트 관련 기사가 게재되고, 관련 학술 논문은 1만 편 이상이다. 반면 콩고에서 유럽 국가들에 의해 죽어간 1천만 명의 아프리카인에 관련된 학술 논문은 한 권 뿐이다.

미국은 해외에서 드러난 범죄 행위들을 부각시키기 위해 홀로코스트를 환기시킨다. 미국은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즈 대학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코소보에서 세르비아의 인종청소와 같은 적대국의 범죄를 비난하기 위해 홀로코스트를 동원한다. 그러나 미국이 개입된 범죄에는 홀로코소트를 등장시키지 않는다. 미국이 지원하는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대학살은 보도조차 하지 않고, 과레칼라의 마야 원주민 대량학살은 '누명'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홀로코스트 산업의 해부이자 고발장이다. 저자 '노르만 '핀켈슈타인'은 유태인 생존자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도, 그의 아버지도 나치 강제수용소의 생존자다. 그의 부모를 제외하고 양가의 모든 가족들은 나치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는 홀로코스트 산업이 이스라엘과 미국의 범죄 정책 정당화에 사용되는 것에 분노했기 때문에, 홀로코스트 산업이 유대인이 겪은 고통이 아니라 유대인의 부의 증대에만 기여했기 때문에,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인류가 겪은 다른 고통에도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

나치 홀로코스트의 비정상적인 상태는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싸고 성장한 착취적인 산업에서 기이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그것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홀로코스트 산업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사망한 자들을 위한 가장 고결한 태도는 그들의 기억을 간직하고 그들의 고통으로부터 배움을 얻으며, 마지막으로 그들을 편히 잠들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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