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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그랩 - 내 정보를 훔치는 빅테크 기업들
울리세스 알리 메히아스.닉 콜드리 지음, 공경희 옮김 / 영림카디널 / 2024년 6월
평점 :
자본주의는 이윤의 축적을 통해 존재한다. 이를 위해 투입 요소의 가격을 낮추고 공급을 늘려야 한다. 즉, '자연, 노동, 돌봄, 식량, 에너지, 돈, 생명'을 적은 비용으로 최대한 많이 '추출'해야 한다. 그런데 국가 경제의 한계 안에서는 이것이 지속될 수 없다. 이를 위해 자본은 언제나 '외부'를 필요로 하고, 여기서 '식민지'가 들어온다.
식민주의는 자본주의하에서 늘 완벽하게 작동했다. 식민지의 추출과 수탈은 내 땅이 아닌 멀리 떨어진 남의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무관심 속에서 '안전하게' 이루어진다. 대신 원거리 운송 비용 등으로 인한 수익성의 제약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거리의 제약을 받지 않는 새로운 식민지를 발굴했다. 그것은 바로 '규제 없는 데이터 추출'이다. 그리고 그 식민지에서 우리는 데이터 발전소(發電所)다.
식민주의는 다른 시대, 다른 지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시행되었지만, 마지막에는 늘 같은 결과를 낳았다. 토지와 부와 노동력의 강탈. 식민주의는 수 세기에 걸쳐 전개된 과정이며, 그 영향은 계속되고 있다. 식민 지배 국가는 부의 축적으로 혜택을 계속 누리고 있고, 식민지는 빈곤, 폭력, 기회 부족이라는 형태로 그 피해를 계속 안고 있다.
오늘날 식민주의는 데이터라는 새로운 자원에 대해 수탈을 가속하고 있고, 그 자원은 바로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서 추출되고 있다. 데이터 수탈이라는 이 신종 자원 수탈은 식민주의의 특성들을 고스란히 보이고 있다. 빅테크 기업들의 개척과 확장은 데이터화된 삶이라는 가상의 영토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이런 식민지화에서 벗어난 영역이나 활동은 거의 없다. 세계 구석구석 그 기술과 플랫폼이 뻗쳐 있다.
하지만 이 영토 점령은 시작에 불과하다. 일단 식민지가 설립되면, 거기서 지속적인 자원 수탈 시스템이 작동한다. 빅테크는 우리 모두의 삶을 추적한 데이터로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얻는다. 페이스북, 유튜브, 왓츠앱, 인스타그램, 위챗, 틱톡 등에서 추출된 데이터는 빅테크에게 전례없는 부를 창출하고 있다.
역사에서 식민지의 말살은 다양한 형태를 띠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원주민 1억 7천 5백만 명이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미국인들의 손에 죽었다. 인도에서 1억 명이 영국인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아프리카에서 3천 6백만 명이 노예선에 실려 대서양을 건너다가 사망했다. 알제리에서 백만 명이 프랑스인들에게, 인도네시아에서 수십만 명이 네덜란드인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로 집계되지 못한 이들도 수백만 명에 달한다.
하지만 말살은 야만적이고 물리적인 폭력만 있는 게 아니었다. 플랜테이션은 식민지의 자급자족 능력을 말살했고, 강제적인 공산품 공급은 식민지의 산업을 황폐화시켰다. 경제적, 문화적 말살은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지만, 강력한 문명의 전파를 통해 식민지인들의 육체뿐 아니라 마음과 정신도 통제할 수 있게 만든다. 과거에는 기독교와 서구 과학이 문명 전파의 토대였다.
이제는 빅테크가 기술과 사업 목적이 섞인 문명 전파를 시행한다. 삶의 편리성, 인간보다 뛰어난 과학과 인공지능. 선택받은 소수에게 이런 꿈은 현실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유년기 상실, 새로운 노동 착취, 개인 정보의 통제권 상실이라는 악몽이 될 것이다. 문명화라는 선물의 저변에는 새로운 형태의 감시, 프로파일링 기반의 차별, 저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심화되는 착취가 도사린다.
식민주의는 세계 자원을 '그저 거기 있으니' 강탈했다. 오늘날 빅테크들은 그저 거기 있으니, 데이터의 형식으로 인간의 삶을 강탈한다. 그리고 그 수탈은 과거에도, 오늘날에도 국가와 기업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식민주의는 늘 착취하는 특권층과 착취당하는 노동 대중 사이에 극심한 불평등을 일으켰다. 데이터 식민주의는 새로운 불평등을 조장하고,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포함한 오랜 불평등을 재연하고 심화시킨다. 그리고 식민주의는 늘 약탈을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위장하고 포장한다.
'역사적 식민주의'와 '데이터 식민주의'라는 용어는 마치 전자가 끝나고 후자가 시작되는 듯한 오해를 부른다. 그렇지 않다. 식민주의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데이터 식민주의는 역사적 식민주의의 단절이 아니라, 그 연장이고 진화이다.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은 식민주의와 함께 등장했다. 저항은 모든 곳에서, 모든 삶에서 일어날 수 있다. 그 모든 저항은 하나의 공통 분모를 갖는 것이 중요하고, 그 최대의 무기는 바로 상상력이다.
데이터 탈식민주의는 데이터를 수집하는 수탈 모델의 해체를 뜻한다. 삶을 강탈의 영토로 삼아 수익만 추구하는 것을 거부하고, 데이터를 집단의 도구로 전환해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기술뿐 아니라 사회, 정치, 규제, 문화, 과학, 교육에 걸쳐 지금까지와는 다른 해답을 찾아야 한다. 데이터 식민주의 시스템에 대한 저항은 시스템의 안에서, 시스템에 맞서서, 시스템을 넘어서, 동시에 세 수준에서 일어나야 한다.
존재 방식을 다시 규정할 때 첫걸음을 디딜 주체는 식민자가 아닌 피식민자다. 빅테크 기업과 정부가 아닌 우리가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그려야 한다.
그래, 대충은 알고 있었다. 우리의 사생활과 개인 정보가 얼마나 무방비하게, 광범위하게, 무차별적으로 수집 되고 있는지. 내 정보는 공개 정보이고, 나는 데이터 소스라는 것 정도는. 이 재미있고 신기한 AI 세상이 뒤로 감추고 있는 오류와 편견과 왜곡 정도는. 그러나 몰랐다. 그것이 '수탈'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수탈의 능력이 얼마나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지를. 내가 데이터 소스를 넘어서 데이터 발전소로 가동되고 있다는 것은.
그냥 어쩔 수 없는 삶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문명 세계'를 살아가는 비용이라고 생각했다. 지문 날인처럼, CCTV처럼 이 사회를 살아가는 비용이라고 생각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걸쳐진 유니폼 정도로 여기며 적응했다. 그리고 그 편리함에 파묻혔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들은 달랐다. 공저자 중 한 명은 멕시코계 미국인이다. 수 백 년 간 수탈당하고 착취당해온 역사의 DNA 덕분일까? 피식민자의 피 흘린 감수성에 힘입었을까? 저자들은 이 풍요롭고 편리하고 효율적인 세상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여전히 계속되는 식민주의를 읽는다. 모두가 찬양하는 이 발전된 세상에서 식민주의의 역사성과 구조를 읽는다. 모두가 환호하는 이 창의적인 세상에서 수집되고 수탈당하는 인간을 본다.
그리고 그 시선은 깊고 예리하다. 화려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테크놀로지의 이면을 그들은 본다. 그들의 시선은 단지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다양한 분야의 많은 이름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모두 저자들과 같은 관점을 갖는 것도 아닐 터이고, 저자들과 같은 생각을 갖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저자들의 의견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그들 각각의 시선과 관점은 나름의 독특함과 번뜩임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과 생각은 저자들의 관점에 단초를 마련하고, 일단을 제공하고 있다. 저자들은 그 각각의 지혜를 디딤돌삼아 '데이터 식민주의'라는 프레임을 구축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식민지를 보여준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지속적이고 광범위하고 파괴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철도를 깔고, 도로를 짓고, 항만을 건설했다. 그걸 누군가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라고 이야기한다. 작가 황석영의 표현을 빌면 '도적놈이 남기고 간 사다리'가 우릴 부자로 만들었다는 얘기다.
1945년 미군정은 포고령 1호를 통해 자신들이 일본 제국주의를 대신해 38선 이남을 '점령'한다는 것을 선포했다. 2025년 트럼프는 한국에게 '중국을 견제하고, 미국의 정치·경제·군사적 이익을 보호하는' 주한미군을 위해 매년 13조원을 내라고 강요한다. 어떤 이들은 그 은혜에 감읍하여, 성조기를 흔들며 거리를 누비고 있다.
이제 우리들 한 명 한 명은 데이터 소스이자, 데이터 발전소로 매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에서 추출한 그 데이터를 빅테크 기업들은 우리에게 되팔고 있다. 우리는 이 편리하고 신기한 문명 세상에서 풍요롭고 창의적인 5차 산업 혁명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 얼마나 환희에 빛나는 시대인가?
나는 노래하고 싶다. 남인수가 불렀던 그 노래 '감격 시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