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2020년)라는 제목의 책을 낸 적이있다. 이 책은 그 반대 방향에서 쓰였다. 모든 글쓰기는 대상(영화)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다. 대상에 대해 말하는 사람을 드러내는 행위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여성‘이나 ‘동양‘은 실재하지않는다. 규범일 뿐이다. 여성은 남성이 쓴 것이고, 동양은 서양이 쓴 것이다. 간단히 말해 전자는 가부장제, 후자는 오리엔탈리즘이다. - P10
철학에는 내가 좋아하는 앎의 4단계가 있다. 1.내가 모르는 것을 모르는 단계, 2.내가 모르는 것을 아는 단계, 3.내가 아는 것을 아는 단계, 4.내가 아는 것을 모르는 단계. 재밌는건 '내가 아는 것을 모르는 단계'가 정점이라는 사실이다. 한 철학자는 이것을 '장인'master(통달한 사람)에 비유했다. 장인들이 그들의 기술에 관해 이야기할때 때로 설명을 제대로 못하거나 '그저 하고 있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경우를 말한다고. 마침 본격적으로 독서의 세계에 빠져들면서 이 4단계를 알게되어 더 기억에 남는다. 내게 독서와 영화감상은 '세상공부'인데
사는 동안 이 '공부'를 멈추지 않는다고 가정했을때 과연 나는 어느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궁금했다.
인생에는 무엇을 모르는지 깨닫게 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중략) '모른다'는 사실을 숨 쉬듯 아는 상태를 유지하는 긴장에서 글이 나온다. '나는 누구인가',어느 위치에서 말하고 있는가를 일부러 숨기는 경우보다는 자기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 P.25
최근에 와서 부쩍 느낀다. 이 단계들을 거치기 위해서는 '쓰기'가 필수적이라고. 우리는 많은 것들에 둘러싸여 산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건 역시 자본주의. 생활 필수품은 왜그렇게나 많고 그 안에서 선택의 폭은 또 어찌나 많은지 에너지와 시간을 고루 잡아먹는다. 생존해있기 위해서는 계속 먹어야 하므로 먹거리에 들여야 하는 수고는 말할것도 없다. 그저 생각하는 대로 살수 있으면 좋으련만 생각을 소모시키는 무한한 자본주의 필요들로 이런저런 깨달음과 맥락들은 순간일 뿐이고 쉽게 길을 잃는다. 글 쓰기는 그런 환경 속에서 나의 과정들을 붙잡을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다. 쓰자! 나를 알기 위해서,그리고 세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앎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내가 만들어진 과정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쓰는행위 자체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내가 쓴 것(What I Have Written)>(1995년)이 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영화 제목이 정말 좋다. 제목만으로 여러 가지 글감이 된다. 비윤리, 무지, 권력관계는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에서 출발한다. 글쓰기가 힘들고 두려운 이유는 쓰는 사람이 대상을 창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대상(작품)이 아니다. 글로 쓴 대상을 공부하기 전에 글을 쓴 사람을 추적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모든 재현이 ‘누군가가 쓴것‘임을 인식하고, 그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나를알기 위해 쓴다‘도 중요하지만 ‘나‘는 매 순간 변화하고 움직이는 존재임을 각성하고 있어야 한다. - P12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할 때 오가는 흔한 대화, 이를테면 "그건 영화에서나 나오는 얘기" "넌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비현실적으로 된 거야" "소설 쓰고 있네" 같은 말은 틀렸다. 영화(재현)가 더 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현실과 재현의 경계는 없다. 현실을 모두 볼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지식은 어디(인식자의 위치)에서 어디 (현실의 일부)를 보는가에 관한이야기이다. ‘진정한 객관성‘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곳, 그 주소(address. ‘말하다‘는 뜻도 있다)를 분명히 함으로써 확보된다. 현실 밖에서 말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 P23
언니는 그때도 옳았고 이번에도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