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고 답을 찾다보면 가족과의 연결고리를 빼놓을 수 없다. 오디세우스의 귀소본능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고통의 근원이 되기도하는 가족. 작가 앨리슨 백델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 후 그것이 계획된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의문을 가지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치 신화의 다이달로스처럼 평생 그의 손에의해 완벽하게 가꾸어진 집이라는 외관아래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기며 살았던 아버지. 그는 가업을 물려받아 장의사를 하며 부업으로 고등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쳤다. Fun Home은 가족사업이었던 BECHDEL FUNERAL HOME을 가족들이 줄여부른 말.(묘하게 다의적인 의미가 되었다.) 문학은 부녀를 그나마 긴밀하게 연결해주었던 도구임과 동시에- 예를들면 스콧 피츠제럴드부터 마르셀 프루스트, 오스카 와일드같은- 그런 아버지의 삶과 겹쳐져 그를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어준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Happy families are all alike; every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독단적인 아버지의 기세에 눌려 어머니는 점점 생기를 잃어갔다. 그런 와중에도 세 자녀를 키우며 자신의 학업을 이어가던 백델의 어머니는 결국 박사학위를 따내고(심리학) 얼마 후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서로간에 긴밀한 유대감은 없었지만 각자의 재능과 욕구에 충실한 삶을 살아온 가족. 그렇게 그들은 따로였고, 또 함께였다.
모든 소설은 자전적이라는 말도 있듯이 작가들은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중에 글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보다 직설적으로 자신과 가족(특히 아버지)의 관계를 되짚어 보며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다. 백델의 경우 아버지와는 달리 레즈비언이라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공개했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듯 보인다. 그의 아버지는 딸에 대해 일찍이 그런 부분을 눈치챘음에도 거기에 대해 감정을 공유하는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단지 편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할 뿐) 하지만 노력했더라도 그게 가능하기는 했을까? 그가 살아온 삶의 방식이나 시대적 배경과 그로인한 정치적 고려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특성 때문에 텍스트 뿐만 아니라 그림으로 전반적인 분위기를 읽을 수 있어서 흥미로운 읽기였다. 특히 프루스트와 조이스에 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아버지라니...솔직히 부러운 마음도 들었다. 이 작품은 뮤지컬로도 여러번 공연되었다고 한다.
스스로를 타고난 그대로 드러낼 수 없는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기위한 노력이 오히려 어떤 면에서 그걸 만천하에 전시하고 있었다면? 가족이 어떤 의미이건 간에 그것을 직시하느냐 회피하느냐는 삶의 고달픈 숙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만큼 가족은 수없이 다루어지는 주제다. 도망친다고 완전히 멀어질수도 없고, 애착을 갖는다고 해서 전부를 이해할 수도 없는 묘한 관계. 하지만 가족이란 기질의 유전적 측면이라는 부분에서 그나마 '나'라는 존재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되어주기도 한다.
자기 이야기를 남김없이 다 하는 사람은 없다. 말하기 자체의 어려움도 있지만 언어는 근본적으로 개인과 사회가 만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 소수자의 의미와 배제와 투쟁 같은 민주주의를 둘러싼 의제가 있다. '만들어진다'는 말은 조작한다는 뜻이 아니다. 언어의 갱신은 공동체의 역량에 달려있다. - 정희진,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