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2차 대전에 관해서 가장 알고 싶지 않은 부분은 전범국인 일본의 상황이었다. 35년간 일제치하에서 고통받던 우리민족에대한 감정적 동요가 가장 큰 이유일텐데 물론 전범국,침략국이라고 해서 모두가 한마음 한뜻은 아니었을테고 펼쳐볼 수 없는 그들 개개인의 심연에는 모든 인간이 그렇듯 다양한 입장, 나름의 고통이 존재했을것이다.
'반딧물의 묘'
'바다와 독약'은 그런면에서 일본 지식인의 양심과 혼란 또는 거기에 따른 괴로운 울부짖음으로 느껴졌다. 전쟁이라는 국가적 선택에서 개인의 양심이 어디까지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현재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만 보더라도 전쟁에 반대하는 일부 러시아국민들은 철저하게 분리,감금되고 통제된다. 전시상황에서 언론은 자국의 입장만을 대변할 것이고 왜곡된 정보만을 소비할 수 있는 시민사회는 다른 의견을 내세우기 쉽지 않다. 더구나 연합국들에 의해 거의 매일같이 공습을 당하던 2차대전 당시 일본시민들은 가족을 잃거나 불구가 되고 또 잿더미 속에서 아득한 흔적으로 사라져갔다.
더이상 공습경보도 경계경보도 울리지 않았다. 납빛으로 낮게깔린 구름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쾅쾅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고, 이따금 탁탁 콩이 여물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까스가 불탔느니 야구인 일대가 전소되었느니 하면서 환자나 학생 들이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요즘에는 어디가 불타는 이야기조차 꺼내지 않았다. 누가 죽든 말든 걱정하지도 않았다. 학생들 대부분이 시내 곳곳의 구호소나 공장으로 보내졌다. p.47
의사 스구로는 2차대전 막바지에 당시 큐슈의 k시에 있는 모 의대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결핵 환자들을 돌보던 그는 공습이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병원내에 권력을 두고 암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빠른 동료의사 토다를 통해 알게된다. 그는 공습으로 가족을 잃고 하나 남은 아들을 군대에 보낸 한 무료입원 환자를 살뜰히 챙긴다. 병원에서는 그녀에게 가망이 없다며 이왕 그렇게 된 김에 조교수의 수술케이스로 이용하려한다. 반면 특실에 머물던 젊은 환자는 하시모또 교수의 출세수단으로 수술스케줄이 잡힌다. 출세를 위해 살려야하는 환자와 죽어도 그만인 가난한 말기환자. 그러던 중 당연히 성공할것처럼 보이던 하시모또 교수의 수술이 실패하고 출세길이 막힌 하시모또 교수는 외국인 포로의 생체실험에 나서게 되는데.... 전쟁당시 실제 일본의 모 병원에서 이루어진 생체해부 사건을 바탕으로 한 이 소설은 수술에 참여한 사람들의 삶을 재조명하며 각자의 죄의식과 혼란을 들여다본다.
죽였다, 죽였다, 죽였다, 죽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리듬에 맞춰 귓가에 계속 읊조려댔다. ‘나는 아무 짓도 안했어.‘ 스구로는그 목소리를 필사적으로 지우려 했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니까. 그러나 이러한 암시는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와 마음속에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다가 사라졌다. ‘맞아, 너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아주머니가 죽을 때도, 그리고 이번에도 아무 짓도 하지않았어. 하지만 너는 언제나 거기에 있었지. 거기에 있으면서 아무짓도 하지 않은 거야.‘ - P164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포로를 병원으로 유인해 마취시킨뒤 수많은 환자들의 목숨을 구할 실험이라며 합리화한다. 이 소설은 사람을 살려야하는 의사라는 직업을 통해 오히려 생명경시의 공포와 명분없는 전쟁을 선명한 피와 해부의 이미지로 그려낸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어떤 식으로든 무뎌진다. 엔도 슈사쿠는 거기에 진정한 공포가 있음을 시사한다. 승자없는 전쟁의 포화속에 잊혀지는 존재들, 이름들. 독이 마음에 퍼지듯 죄의식과 고통에 무뎌지면서 타인에 대한 파괴는 또 다시 가능한 일이 되어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검붉은 피로 탁해진 액체에 담긴 이 암갈색 덩어리.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게 아니라, 자신이 죽인 인간의 신체 일부를 보고도 거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괴로움도 없는 이 섬뜩한 마음이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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