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일을 다닐때 회식에서 엄청난 양의 소주를 마신적이 있다. 내가 일하는 종로점과 강남점이 같이 하는 회식이었는데 강남으로 파견근무를 나갔을 때 하루정도 같이 일한 사람을 이 날 다시 만나 가볍게 서로 눈을 마주치며 목례를 했다. 그는 눈에 띄게 잘 생긴 편이었는데 말을 섞어보진 않았었다. 술이 들어가자 나는 나름 꽐라가 되었고 필름이 종종 끊겼는데 파견근무 때 단 하루 소심한 나의 가면에 속았?던 그 사람은 어느새 내 근처로 와 있었고 자리가 파하자 마자 나에게 반했다면서 갑자기 고백을 했다. 나는 내가 꽐라상태인것까지는 인지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최대한 멀쩡한 척 하면서 나중에 다시 잘 생각해보라고 지금 취하신것 같다고 얼버무렸다. 그는 절대 취하지 않았다며 자기 마음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했던것 같다. 이때부터는 필름이 아주 많이 늘어지고 손상되었다. 그때 나랑 같이 일하던 동료가 우리로부터 멀찌기 취해 앉아 있었는데 이 사람은 느닷없이 내가 자기랑 사귀지 않으면 그 동료를 때리겠다고 위협했다. 아마도 그 친구랑 나랑 썸을 탄다고 생각했던것도 같다. 나는 당황했고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분명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냥 얼버무렸던 것 같다. 이 사람은 어느새 달려가더니 그 친구를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도망쳤다.
그 사람이 왜 그렇게 까지 했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겁이 많지만 때로는 느닷없이 겁이 없어지기도 하는데 그날은 겁이 나는 상태였다. 관심을 이상한 쪽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있구나 하고 느꼈고 많이 무서웠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마음의 파수꾼>을 읽으며 그 별종같은 사람의 일이 생각났다.
헐리웃에서 잠시 배우로 활동하다가 이제는 시나리오 작가로 꽤 잘나가는 주인공 도로시는 자신과 진지한 관계로 발전되길 원하는 폴과 함께 드라이브를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허수아비같이 마르고 기다란 젊은 남자가 차에 뛰어들고 가까스로 충돌을 피하지만 차량은 전복이 되어 불타오른다. 몸을 피한 두 사람은 차에 뛰어든 청년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나는 그의 심장에 손을 얹어보지도 못하고 그가 살아 있는지 확인하지도 못한 채 한동안 그의 앞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가 살았는지 아니면 죽었는지의 여부는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건 두말할 필요 없이 기묘한 느낌이었고, 나중에 나는 그 느낌을 쓰라리게 후회하게 된다. p.17
다행히 그는 죽지 않았고 거동이 불편했기에 도로시는 자신의 집에 데려와 얼마간 보살핀다. 청년의 이름은 루이스였다. 40대의 도로시에 비해 20대 초반의 루이스는 많이 젊은 편이었지만 남자친구인 폴은 약물을 하고 차에 뛰어든 그 정신나간 남자를 조심하라며 불안함 속에 사랑을 고백한다. 도로시는 이 의문의 남자 루이스와 한 집에 살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점점 가까워진다.
내가 이 녀석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을까? 이 녀석은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했던 걸까? 사람들은 그런 사랑을 광기라고 부르지만, 내게는 언제나 그것이 사랑의 유일한 분멸 있는 형태로 여겨졌다. 이 녀석을 재규어 자동차의 바퀴 아래로 떠민 것은 우연이었을까? p.30
도로시는 루이스에게 실패한 두 번의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자신을 떠난 첫 남편을. 그리고 얼 마 후 그 전 남편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된다. 이어 도로시에게서 남편을 빼앗은 여자도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도로시가 아주 싫어하는 '인간 말종'같은 자가 영화계에 있었는데 그도 역시 사고로 갑작스럽게 죽는다. 루이스는 도로시에게 고백한다. 자신은 다소 험난한 인생을 살았고 아무도 그저 선의로만 도와주지 않았었다고. 하지만 도로시가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조건없이,바라는 것 없이 그에게 선의를 보여줬다고. 그는 그래서 도로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유일하게 중요한 사람이므로 그녀를 위해 이 사람들을 차례차례 죽인것이다.
갑자기 끔찍이도 외롭고 무섭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는 비밀이, 치명적인 비밀이 있었다. 나는 성격상 절대 비밀 같은 것을 몰래 간직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나는 새벽까지 그렇게 깨어 있었다.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감상적인 내 살인자가 자신의 조그만 침대에서 꽃과 새들의 꿈을 꾸면서 평화롭게 잠을 자고 있을 동안.p.129
도로시 시모어가 그를 네 번이나 살인으로 몰아넣었다. 당황스러운 사실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불편한 감정 없이는 파리 새끼 한 마리 죽여 본 적이 없는 데다가 길 잃은 개, 고양이, 사람들을 기꺼이 내 집에 받아들였는데 말이다. p.159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에는 천진난만한 방랑자가 꼭 한명씩 나오는 것 같다. 이번에는 천진난만한 살인자라고 해야 할 듯하다. 나는 천진난만이라는 단어도 좋아하고 방랑자라는 단어도 사랑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어 단어는 불어를 어원으로 했을 듯한 ingenue다. (천진난만한 소녀란 뜻) 이니셜을 박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길때 내 이름 이니셜 대신 이 단어를 즐겨넣는다.
물론 사랑을 위해 살인을 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천진난만함과 수려한 외모로도 용서할 수 없는 범죄다. 그런 다소 비현실적인 면이 읽는동안 묘한 즐거움을 주었다. 끔찍한 동시에 로멘틱한 아이러니가 공존한달까? 소설 속에서 도로시의 난처한 상황은 다소 유쾌하게 진행된다. 읽는 동안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 모르겠다. 사강 특유의 발랄한 철학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약간의 스릴까지 가미된 달콤 살벌 살인자와의 로멘스가 궁금하신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작품 속에서 차체가 높은 롤스로이스가 자주 등장해 함께 올려본다.
(출:블로그 럭셔리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