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느 지점을 이제 지나온 것 같아. 다시는 돌아갈 수 없어." (영화 ‘델마와 루이스‘)
아, 그녀는 이제 그녀로서 자리한다. 갇히고 억압받는 그녀가 아니고, 온전히 그녀가 되었다.- P155
이런저런 생각을 불러내주고 그런 마음을 글로 쓰고싶게 만드는 글이 있다. 이 에세이는 그런 힘이 있다.
알라딘서점에서 만든 북플이란 공간을 알게 되어 점점 본격적으로 이곳을 즐겨찾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다락방님의 글을 좋아하게됐다. 그녀의 글을 읽고 있으면 글이 아닌 목소리를 듣는 기분이 든다. 그녀만의 목소리로 듣는 (문체) 소설이나 영화에 대한 감상과 거기 곁들어진 삶의 이야기는 독특한 향과 색깔이 있다. 유쾌하게 빠져들다가도 세상을 보는 날카로운 관점에 놀라 덩달아 '여성주의 책읽기'도 1년째 함께하고 있다. 더구나 책을 두권이나 낸 작가였다니 안읽어볼 수가 없었다. 이 책은 그 중 하나인데 역시 책과 영화를 보며 다락방님이 때마다 느낀 감상과 깨달음 ,인생 이야기, 그리고 인간미 넘치는 다독임이 담겨있다.
나는 무언가 어떤 것을, 저기 저곳에 닿아야 할 것으로 정해두고, 묵묵히 그것에 혹은 그곳에 닿기 위해 뚜벅뚜벅 걷는 사람이 좋다. 그리고 그들은, 그게 뭐가 됐든 결국은 행할 것이며 닿을 것이라 믿는다. 항상 원하는, 늘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사람은 그것에닿기 위해 그쪽으로 신경을 쓰고 선택을 하고 방향을 틀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원하던 일을 결국 이루는 사람을 좋아하고, 원하던 일에 결국 닿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P77
지난번 이 책을 읽다가 올린 내 경험을 담은 글을 보고 용기있다며 응원해주신 분들이 많았다. 진짜 용기있는 사람은 내게 그런 글을 쓰도록 이끈 이 책의 저자 다락방님이다. 자신의 책에 진솔하게 자기 상처를 드러내는것은 결코 쉽지않은 선택이고 진정한 용기다. 그래서 나는 종이와 글자로 전해진 그 진심과 용기에 힘을 얻어 내 속에 담긴 이야기를 끄집어 내 써볼 수 있었다. 역시 글의 힘은 무섭고 전파력이 강하다. 그리고 거기 댓글에 달린 사연들을 읽으며 얼마나 많은 고통들이 촘촘히 이 무심한 세계에 무겁게 쌓여있는지를 다시 실감했다.
나도 결코 처음부터 그런 행동을 하게된건 아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때 동네 수영장에서 일하던 오빠가 길에서 마주친 내게 부탁이 있다며 화장실로 데려갔다. 왜그런지 내가 작은일을 볼 동안 밖에 서 있고 싶다고 했고 이상했지만 나는 별 생각없이 볼일을 봤다. 도중에 문을 열고 들어오면 어쩌나 전전긍긍했던 것 같다. 그 오빠는 곧이어 고맙다고 말하고 그곳에서 사라졌다. 나는 뭐가 뭔지 이상하기만 한 그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그 오빠를 다시 볼까봐 얼마간 걱정했지만 수영장에서도 그를 더는 마주치지 않았다. 그렇게 잊은줄 알았다. 옳고 그름조차 판단할 수 없던 어린 나이여서 그랬을까? 그냥 이상한 기억으로 마음 한켠에 까만색으로 자리하게 두었던것 같다.
"만약 당신이 칠흑같은 어둠속에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눈이 어둠에 완전히 적응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것 뿐이다." ㅡ p.170
수년이 지나 뉴스에서 물탱크에서 죽은채 발견된 초등학생 소녀에 대해 보도했다. 그야말로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한참동안 그 일은 뉴스에서 반복되어 나왔다. 내게도 그 일은 믿어지지가 않았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자라났다. 물이라는 공통분모로 나는 그 수영장 오빠를 떠올렸다. 만일 그 때 그 오빠가 어른이되어 저런짓을 한거라면? 만일 내가 그 오빠의 부탁을 들어주고 이후에도 엄마나 아빠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아 그 오빠가 더 이상해지고 더 변태가 되어 사악해져서 이번에는 소녀를 죽인거라면?
분노한 사람들 때문인지 뉴스에서 결국 그 사람의 얼굴까지 공개가 되었다. 나는 그 사람이 예전에 그 오빠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그 오빠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지만 이젠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걸 깨달았다. 내가 불의를 보고 아무일도 하지 않으면 그렇게 눈을 감아버리면 어쩌면 그 일이 나의 두려움과 외면을 먹고 자라 눈덩이 처럼 불어나 누군가가 죽게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다. 그리고 이후에 또 다른 일들이 덧붙여져 나는 슈퍼맨처럼 세상을 구할수는 없어도 나를 스치는 불의에 눈감지 않기로 결심했다. 모두가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할 수 있는 사람은 해야만한다고 느꼈다 그게 대단하지 않은 미약한 행동일지라도. 여자들이 움츠리거나 얼어버려 어두운 기억을 하나 더 추가하고 그로인해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울고 후회하고 슬퍼하는게 아니라 그들이 움츠리고 두려움에 떨고 울며 후회했으면한다.
마침 다락방님의 책과 더불어 '어제 그거 봤어?'라는 에세이를 함께 읽었다. 두 책 모두 호락호락하지 않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사는 여성들의 어려움을 글 곳곳에 담았다. 앞으로는 소설도 영화도 TV방송도 무력하게 당하는 여성 역할말고 당당하게 맞서는 캐릭터가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현실은 아직도 무력하고 답답한 일 투성이지만 소설과 영화, 방송에서라도 그런 강인한 여성을 좀 더 많이 보여준다면 누군가는 그 글을 읽고 또는 영화를 본 뒤 용기를 낼 것이고 누군가는 그런 당찬 행동에 힘을 얻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낼 것이므로. 그렇게 점점 무력한 여성을 탐하던 나쁜 남자들도 결코 모두가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알게 되길 바란다.
내가 울고 웃고 행복해하고 절망하는 모든 순간에는 위로가 있었고, 기다림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닐까? -잘 지내나요? ,이유경. 머릿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