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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는가
강상중.현무암 지음, 이목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강상중, 현무암 두 분의 공저인 이 책은 일본 고단샤(講談社)에서 출간한 〈흥망의 세계사〉 시리즈의 하나인 <대일본·만주제국의
유산(2010)>의 완역본이다. 저자분들은 1932년~ 1945년까지 15년 동안 존재했던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을 통해 한일 양국의
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쇼와의 요괴' 기시 노부스케와 '독재자' 박정희를 다룬다. 이분들은 기시와 박정희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제국의
귀태(鬼胎)’라고 정의내린다. 하지만 두 인물의 비판으로만 연속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만주란 공간과 만주국의 역사, 만주국 인맥까지 조망하여
한일현대사와 한일 관계사까지 설명해 주는 책이다.
기시 노부스케는 1936년 만주 산업부 차관으로서 만주국의 산업진흥을 주도했고 1941년부터는 도조 내각에서 상공대신을 역임했다. 그가
만주국 시절에 이룬 경제개발정책이나 각종 국가 통제 시스템은 일본에서는 그의 후예 보수 정치인들에 의해서, 한국에서는 만주국 군인이었던 다카키
마사오, 즉 박정희와 그 주변 만주 인맥에 의해서 계승된다. 일본 패망과 종전 뒤에 그는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으나 한국전쟁과 냉전시기를
거치면서 미국의 필요에 의해 극적으로 풀려난다. 부활한 그는 1957년 일본 총리대신이 되어 일본의 고도 성장과 보수정치연합, 미일안보조약개정을
이끌었다. 또한 박정희와의 만주국 인연으로 한일 회담의 물밑작업을 도맡았다.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때에는 일본측 특사가 되어 당시 다나카
수상에게 박정희 정부 측의 뒷돈을 건네는 것을 성사시켜 일본의 대한 경제원조를 유지하기도 했다. 1987년 여름 91세로 사망.
다카키 마사오, 즉 박정희는 혈서를 써 바쳐 1940년 4월에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즉 신경(新京) 2기로 입학하여 황국 군인의 꿈을
이룬다. 만주란 공간은 가난하고 나라 잃은 백성들이 살 곳을 찾아서 마지못해 혹은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서만 향하던 곳은 아니다. 다카키
마사오처럼 야심과 출세욕에 찬 식민지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간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만난 만주 인맥으로 박정희는 만주군 소위로 만주에서
항일세력 토벌하는 황군에 복무했던 과거를 지우고 해방 후 대한민국 소위가 된다. 또한 여순항쟁 때 남로당원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살아남는 행운을 누린다. 6.25로 군에 복귀한 그는 5.16 쿠데타로 집권하여 대통령이 되고 장기독재집권 끝에 1979년 살해된다. 집권 당시
그는 1930년대에서 패망까지 실시되었던 일본 군국주의 파시즘의 이데올로기와 행동법칙에 따라 대한민국을 통치했다. 한마디로 다양한 전시 국가주의
동원정책과 교육정책을 사용하여 한국의 경제성장과 총력안보체제를 이끌어 간 것이다. 박정희가 실시했던 수많은 정책과 기구는 대부분 만주국에서 기시
노부스케가 시행한 것들의 카피본이었다. 1961년 기시 노부스케를 만난 박정희는 유창한 일본어로 내가 군사반란을 일으킨 것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떠올리며 구국의 일념에 불탔기 때문이라는 요지의 말을 한다. 메이지 유신을 이끈 조슈 세력의 후예이자 만주국의 관료였던 기시 노부스케는
이후 박정희와 더불어 한일관계를 이끌어 가게 된다. 둘 다 만주국의 귀태였기 때문이었다.
머리말과 제1,3장, 맺음말은 강선생님이, 2,4장은 현선생님이 맡아 집필하시고 전체적으로 강선생님께서 다시 손 보신 책이다.
'귀태'가든가 사망을 '사거'로 표현하는 등 일본식 한자어를 그대로 살린 번역이 조금 생경스럽기는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찬찬히 읽어볼 만한
책이었다. 나같이 뒤끝 긴 독자들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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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는 일본의 전 외무대신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 총리이자
아시아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가 그의 작은 할아버지(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이며, 참의원 의원인 기시
노부오(岸信夫)가 그의 친동생이고 부인은 모리나가유업(森永乳業)의 창업자 모리나가 타이헤이(森永太平) 외손녀이다. (여기에서 같은 집안인데 성이
다른 이유는 일본 특유의 데릴사위, 양자 제도 때문임. 양자도 친가뿐 아니라 외가로도 감. 이런 이유로 일본 극우 정치인들, 성이 달라 다른
집안 사람들 같지만 알고보면 다 친척인 경우가 많음). 여기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듯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래 2차대전까지의 특권층이 현재도
정, 재계를 장악하고 있다. 이들 전범 세력 역시 종전 후 전범으로 처단되지 않고 우리나라의 친일파처럼 미군정에 의해 화려하게 부활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이들은 자신의 과거를 정당화하기위해 극우 발언을 일삼아 대중적 인기와 기득권 유지, 권력획득을 꾀한다. 어떤가, 일제시대 친일 세력이
미국에 의해 구원받아 다시금 기득권층이 된 후에 자신들의 구린 과거를 가리기위해 반공과 안보, 경제성장을 강조하며 불리하면 빨갱이 종북세력
발언을 일삼는 우리네 극보수 세력과 똑같지 않은가. A급 전범의 외손자와 다카키 마사오의 딸이 정권을 잡은 한일 양국의 마래는 어떠할 것
같은가?
내게는 미래를 내다볼 혜안이 없다. 단지 이 현상에 대해 존경하고 사랑하는 나의 강상중 선생님은 이렇게 명쾌히 말씀하셨다는 것을 밝힌다.
이렇듯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에게는 애증이 공존하는 평가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그들은 마치 발 달린 망령처럼 되살아나
'독재자'와 '요괴'의 자식들을 움직이고 있다. 두 사람의 관(棺)에 제대로 못질을 안 한 탓일까.
- 본문 10 ~ 11 쪽에서 인용.
* ‘귀태(鬼胎)’라는 표현은 관동군의 독주에서 패전에 이르는 시기를 일본역사의 “비연속적 시대”라고 규정했던 일본의 역사소설작가 시바
료타로가 만든 말이다. 의학적으로는 자궁내 융모막 조직이 포도송이 모양으로 이상증식(異常增殖) 하는 ‘포상기태’를 뜻하지만, 이 책에서는 태아가
아닌 존재로 태어나서는 안 될, 불길한 존재를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