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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 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주디스 허먼 지음, 최현정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는 제1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들, 나치
강제수용소의 생존자들을 위해 고안된 피해자 연구를 활용하여 여성과 아이들에 대한 폭력(가정 폭력과 성폭력 합쳐서)을 해부한다. 전쟁이나 인종학살
생존자나 아동학대 성폭력 생존자나 성매매 여성들. 그들이 겪는 정신적 외상은 똑같다. 그러나 열받게도, 남성인 참전용사들의 트라우마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기 이전에는 트라우마는 여성의 히스테리 정도로 치부되어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 그러기에 이 책은 심리학은 물론, 페미니즘 쪽으로도 기념비적인 저작이다.
보편적인 인간의 심리문제로서의 정신적 외상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여성과 아이들에 대한 폭력 문제까지 다루어, 사람들의 인식 전환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구태의연한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이런 책은커녕, 이런 책 리뷰도 읽지 않는다. 갈 길이
멀다. )
아직도 심리학 하면 남성위주 왜곡된 프로이트 시절
이야기만 아시는 분이 많은데, 트라우마 연구 역사를 서술하는 이 책의 도입부는 정신분석을 창설한 프로이트 시기, 심리학 이론은 여성의 현실에
대한 부정을 기반으로 세워졌다는 것을 명확히 밝혀준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성 문제를 수면으로 드러내기는 했지만 당시 이중적 윤리관을 지닌 빈
분위기상, 여성들이 겪는 히스테리의 근본 문제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여성과 아이들이 성폭력에 대해 거짓말을 잘 하고 환상에 빠져 이야기를 꾸며
낸다는 식으로 결론 내린다. 성적 관계가 실제로 발생하는 사회 맥락은 완전히 감춘 것이다. (솔직히, 이 내용이 있는 책의 앞 부분만 읽어도
속이 후련하다. 프로이트 심리학은 당시 보수적인 빈 사회와 가부장적 유대문화를 반영하고 있는데, 이것도 모르고 프로이트 이론을 기반으로 여성
혐오적 발언을 하고 글을 쓰는 유명 남성들 보면 얼마나 역겨운지!) 이에 저자는 전쟁 참전자들이 겪는 문제들을 통해 트라우마는 한 여성이나
아동의 개개인 기질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힘으로 저항할 수 없는 엄청나게 우세한 힘에 부딪쳐 자신과 세상에 대한 원초적 신뢰를 잃었을
때 생겨남을 밝힌다. 그렇다, 성폭력 생존자들이 겪는 트라우마도 불가항력이다. 의지나 노오력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의 성격적 결함 따위 차원도
아닌 것은 당연.
외상 사건은 기본적인 인간관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가족,
우정,
사랑,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애착이 깨진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형성되고 유지되는 자기 구성이 산산이 부서진다.
인간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신념
체계의 토대가 침식당한다.
자연과
신성의 질서에 대한 피해자의 믿음이 배반당하고,
피해자는
존재의 위기 상태로 내던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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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쪽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은 위험이 지나간 뒤에도 계속 그 사건을 새롭게 체험하고 고통에 시달린다.
소극적으로 변하고 냉담해지고 우울해지며 삶을 포기하게 된다. 물론, 참전 용사의 경우 이렇게 변해도 사회에서 이해해준다. 그러나 성폭력과
가정폭력 생존여성이라면? 저서에 의하면, 학대받은 여성 중 47%는 자살을 시도했고 정신과병동에 입원한 여성 세 명 중 두 병은 성폭력
생존자였다. 문제는 고문을 받아 트라우마가 생긴 사람은 고문실에서 살지 않지만, 가정폭력을 당한 여성은 그 가정-고문실에서 평생 살기를
강요당한다는 것. 여성 생존자들의 피해는 계속된다. 일상 생활로, 이전의 자신으로 복귀하기가 힘들다. 아픈 것을 아프다고 말하면 더
불리해진다.
간혹 생존자가 분노를 폭발시키기라도
한다면 다른 이들로부터 더욱 소외받게 되고,
이는
관계의 회복을 방해한다.
따라서
생존자는 분노를 통제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다른 사람을 더욱더 피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생존자의 고립은 영속된다.
결국
생존자는 분노와 혐오의 화살을 스스로에게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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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쪽
더군다나, 여성 피해자를 비난하는 2차 가해, 피해 여성이나 아동의 의지를 배반한 가족 내 연장자
남성의 가해자와의 합의, 온전히 이뤄지지 않는 가해자 처벌 역시 문제다. 이들은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더 깊게 만든다. 이글을 읽는 분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도, 현재 우리나라 여성들이 일상 생활에서 겪는 고통은 너무도 크고, 흔하다. 트라우마를 겪는 여성들은 흔하다. 현재 우리나라에
만연한 각종 성폭력 문제, 공공장소의 도촬(몰카보다 이 용어가 정확하다고 생각함) 카메라, 성폭력적 인터넷 댓글, <그것이 알고 싶다 -
소라넷편> 등등의 뉴스를 접해보면 아시리라 믿는다.
생존자가 지닌 뿌리 깊은 죄책감과
수치심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생존자는
도덕적인 온전함을 상실했음을 애도하고,
돌이킬
수 없는 일에 속죄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회복은 절대로 가해자를 면죄시키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
이 순간에 도덕성을 선택한
생존자를 긍정한다.
- 320
~ 321쪽
또한 이 책을 읽으면 집단 트라우마 쪽으로도 생각해보게 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많은 어르신들의
정치적 성향과 심리적 문제에서, 일제 강점, 전쟁과 가난 트라우마가 보이기 때문이다. 아래 인용부분은 '10억엔 받고 위안부 소녀상 철거 합의'
뉴스가 전해진 2015년 12월 말 대한민국 이 시점에서도 의미있다.
회복 단계는
개인적인
회복 과정뿐만 아니라,
외상을
경험한 공동체의 회복에서도 발견된다.
(중략)
남아 있는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개별 가해자들에게 범죄의 책임을 묻는 조직화된 노력이 요구된다. 최소한,
가장
큰 잔학 행위에 책임이 있는 자는 법정에 세워져야 할 것이다.
정의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피해자 집단의 무력한
분노는 곪아 터져 시간의 흐름조차 이를 누그러뜨리지 못할
것이다.
선동적인
정치 지도자들은 이러한 분노의 힘을 잘 이해하고 있으나,
이렇게 고통받은 이들에게 집단적인 복수를
약속하면서 이
분노를 착취할 뿐이다.
외상을
경험한 개인들과
마찬가지로,
외상을
경험한 국가 또한 외상을 재경험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를 기억하고,
애도하며,
속죄해야
한다.
- 396 ~
397쪽
전체적으로 이 책은 거의 고전이다. 심리학과 페미니즘 쪽
독학하시는 분께 필독서로 권해드리고 싶다. 원 내용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원서의 의미를 잘 살린 번역도 좋다. 이론서들이 국내 번역될
때는 문화적 차이나 통상 쓰이는 예를 고려해서 다른 용어로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강간 피해자가 아니라 '강간 생존자로, 구강 성교가
아니라 '구강강간'으로, 성적장애가 아니라 '성적장해'로 번역했다.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