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이야기와 어린이책 - 잃어버린 옛사람들의 목소리를 찾아서
김환희 지음 / 창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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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의 발견>을 매우 의미깊게 읽었기에 이번 책도 믿고 읽었다.

 

 

이 책은 우리 옛이야기와 서양 옛이야기가 원래 구전되던 형태에서 변형된 현실을 각각

의 그림책을 통해 살핀다. 저자는 각 이야기 화소가 구비전승되던 상황, 이본, 현대에 변

형된 이유 등등을 꼼꼼히 살피며 우리 아이들에게 권할만한 좋은 그림책을 고르는 눈을

키워준다.

 

1부 우리 옛이야기로는 <콩쥐 팥쥐><해와 달이 된 오누이> <바리 공주><선녀와 나무꾼

><구렁덩덩 신선비><흥부전><심청전><까막나라에서 온 삽사리>를, 서양 옛이야기로는

그림 동화와 안데르센 동화, <백설공주><신데렐라><인어공주><빨간 모자><아기 돼지 삼

형제><헨젤과 그레텔>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옛이야기는 아니지만 옛이야기의 미덕을

반영한 그림책으로 앤서니 브라운의 <터널>을 소개한다.

 

전체적으로 저자는 교육적 목적으로 구전민담의 원래 형태를 지나치게 변형하는 것을 경

계한다. 너무 비현실적이거나 잔인하다고 하여 글 작가 마음대로 구전설화에 기반한 옛

야기를 변형, 로 쓰는 예가 많은 현실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전래동화 본의 결말에서 주인공이 자신을 죽이려 한 사람을 쉽사리 용서하고 사악한 성

품의 들은 갑자기 착해지는데, 이러한 비현실적인 결말이 고전소설이나 구전민담의 권

선징악적인 끝맺음보다 교육적으로 더 낫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이들에게 옛이야기를 개

작하면서까지 부자연스럽고 어설픈 용서를 가르치는 것보다는 악행은 반드시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는 옛 사람들의 믿음을 그대로 전해주는 것이 교육적으로 더 나을 수 있기 때문이다.

- 36쪽

   

저자는 구전되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변형할 경우, 이야기마다 주석을 달아 독자에게 어

떤 구전 설화와 문헌 설화로부터 화소를 끌어와서 이야기를 재구성 했는지,  옛글과 새글

차이를 알려주고 원전 출처 밝히는 것이 옛이야기의 전통과 가치를 보존하는 길이라고 말

한다. 또 저자는 여러 지방의 러 화소를 두루 살펴서 지금 이 시점에 계승할만한 가치를

반영하지 않은채 흥미위주나 일제강점기에 왜곡된 형태를 저본으로 삼아 이야기를 재구

성하는 것도 경계한다. 예를 들어 <콩쥐 팥쥐>의 경우, 콩쥐의 결혼으로 끝나게 동화책을

구성하면  데렐라 흉내내느라 이야기의 반만 한 것이며 올바른 주제를 전달하지도 못

하는 것이라고. 이는 <선녀와 나무꾼>도 마찬가지다.

 

글작가가 다른 각편도 두루 살펴보고 조금 더 보편적이고 진취적인 화소를 끌어다 이야

기를 재구성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 118 ~ 119쪽에서 인용

 

옛이야기 원전은 너무 황당하고 비현실적이며 때로 잔인해서 아이들에게 읽히지 않는다

는 부모도 다. 하지만 저자는 옛이야기에 담긴 초자연적, 비현실적, 엽기적 장면보다 현

대 버전 동화책에 긴 가부장적 가치관, 군국주의, 성차별주의, 인종주의, 오리엔탈즘,

외모지상주의, 배금주의 등등이 교육적으로 더 문제라고 지적한다. 특히, 이른바 서구

작 동화가 들어오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보급되면서 위에 예로 든 잘못된 이데올로기가

급격히 우리 전통 옛이야기까지 오염시킨 점을 저자는 심각하게 지적한다. 이는 그냥 그

림책 읽고 애니메이션 한 번 보는 정도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현재 아이들은  영어

부의 한 방법으로 영어로 녹음된 디즈니판 동화를 듣고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다. 그런

국어 공부란 무조건 반복학습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의 아이들은 영어 문장을 반복해서 외우려

가 그만 정서와 사고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디즈니식 미국식 그릇된 가치관

과 사고방식에 세뇌당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책이 보이는 여성주의 시각도 좋다. 서양 명작동화들의 여성 주인공들은 거의 다 나약

하며 '백마 탄 왕자'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어서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저자는 그건 오해라고 말한다.<해의 동쪽과 달의 서> <헨젤과 그레텔><백조 왕자>처럼

여성 주인공이  모험을 떠나 오빠나 남편 등 남성을 구하는 이야기도 많지만 단지 널리 알

려지지 않았을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생각 외로 원전을 읽어보면 그리 가부장적 가치

관을 강요하고 있지 않다. 물론 가부장적 현실에 고통받고 있기는 하지만, 여성들의 연대

로 이겨나가는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엣이야기 속 여성들이 백마 탄 왕자의 구원을 기다리는 수동적이고 나약한 존재처럼 느

껴지는 것은 모험심을 지닌 강인한 소녀가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그림책으로 꾸며져 널리

읽히지 않았기 때 문이다.

- 326

 

비단 그림책 볼 연령대의 아이를 두고 있지 않더라도 이 분야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구전

설화 공부 입문용으로 읽기 좋은 책이다. 베텔하임이라든가 자이프스 등 서구 이론가 소개

며 국내 구비 전승 각편 소재 서적과 논문 소개가 알차다. 책 말미에 주석과 참고 문헌목록

만 봐도 다음 단계 공부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여튼, 구비설화와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내

게, 여러면으로 유용한  책이었다. 어릴적 읽고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마음에 깊이 남아

인생의 고비고비 마다 떠오르던 이야기, 저자의 해석을 읽고 이제야 깨닫고 여러번 가슴

뭉클했다. 좋은 책을 써 주신 저자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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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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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스플레인(Mansplain)’이라는 단어를 유행시킨 첫 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포함한 9편의 에세이가 담긴 책이다. 책 제목이 내용의 전부가 아니다. 즉, '남자'인 맨(Man)과 ‘설명하다’라는 뜻의 익스플레인(Explain)을 조합한 이 단어 자체의 사전적 의미만 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책 내용의 전부가 아니다. 책의 첫 글은  파티에 간 저자가  저자자신이 쓴 책에 대해 읽지도 않고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책의 저자인 자신- 그러니까 파티에서 만난 낯선 여성 - 을 가르치며 남성다움을 뽐내려 드는 남성을 만난 웃긴 경험담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저자는 젠더, 인종, 경제, 식민지배 등등 전 지구적 차별, 억압과 지배의 문제를 고발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강간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진다. 강간에 대해 새로운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은 중요하다. 강간은 단지 남성이 여성에게 원치않는 성관계를 하는 문제가 아니라 폭력과 권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간은 남성과 여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녀의 이름은 여러 개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약자'인 것이다.

 

폭력은 무엇보다도 일단 권위주의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폭력은 내게 상대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 45쪽

 

조사에 따르면, 많은 경우 강간의 동기는 남자가 여자의 욕망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그녀와 섹스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마음이었다. 한마디로 남자의 권리가 여자의 권리에 앞선다는 생각, 혹은 여자에게는 권리가 없다는 생각이다.

- 193쪽

 

그녀의 이름은 아프리카였다. 그의 이름은 프랑스였다. (중략)

그녀의 이름은 아시아였다. 그의 이름은 유럽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침묵이었다. 그의 이름은 권력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가난이었다. 그의 이름은 풍요였다.

- 67 ~ 68쪽

 

 

통계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6.2분마다 한 건의 강간이 발생하고, 여성 다섯 명 중 한 명은 인생에 한 번 이상 강간을 당하며, 매일 약 세 명의 여자가 배우자나 옛 배우자에게 살해당한다고 한다. 우리 나라는 3일에 한 명 꼴로 여성들이 남편이나 애인 등에게 살해당하고 있다. 강제 성기결합까지는 아닌 수위의 성폭력이나 성추행, 성희롱성 발언은 너무나도 빈번하게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피해 여성이 경찰에 신고하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일은 힘들다. 주위 사람들에게 고통을 호소하고 위로받기도 힘들다. 오히려 2차 가해를 받기 일쑤다. 여성인 피해자의 증언과 고통은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저자가 외치는 '맨스플레인'의 의미가 이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강간 등 여성/약자에 대한 여성/피해자의 경험과 증언이 무시되는 현상, 그래서 피해자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저항의 싹을 자르고, 그로인해 가해자가 속한 성, 인종, 계급, 국가가 이익을 보는 전체적인 현상이 '맨스플레인'인 것이다. 이는 일부 남성들만의 잘못된 예도 아니다. 남성은 아무 나쁜 짓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이미 그 혜택을 누리고 있기에.  

 

 

남자들은 자꾸 나를, 그리고 다른 여자들을 가르치려 든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든 모르든. 어떤 남자들은 그렇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어느 분야에서든 종종 괴로움을 겪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나서서 말하기를 주저하고, 용감하게 나서서 말하더라도 경청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길거리 성희롱과 마찬가지로 젊은 여자들에게 이 세상은 당신들의 것이 아님을 넌지시 암시함으로써 여자들을 침묵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자기불신과 자기절제를 익히게 되는 데 비해 남자들은 근거 없는 과잉확신을 키운다.

- 15쪽

 

결국 '맨스플레인'은 남자들이 여자들 앞에서 가오잡고 잘난척 조금 해서 짜증나는 것 정도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여성들의 삶의 경험과 발언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실천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차별과 폭력을 당한 경험을 이야기해도 여성의 증언이므로 무시하거나 피해를 축소하거나 성폭력 사건을 접할 때 피해자 탓으로 돌리거나 꽃뱀인가부터 의심하는 사례는, 생활 속에서 남성 입장에서의 반응부터 먼저하고 여성을 계도하려고 하는 소소한 '맨스플레인'과 일맥상통한다. ,,, 그래서 나는 '맨스플레인? 말도 안돼. 여자들도 얼마나 남자들을 가르치려 드는데?'라는 반응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 책의 제목만을 그대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엄마나 할머니, 아내의 지겨운 잔소리, 정도에 대응하는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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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박정애 옮김 / 큰나(시와시학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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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흑인 페미니스트 사상가인 벨 훅스의 페미니즘 입문서.

 

이상하게도,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왜곡된 인식이 많다. 페미니즘은 反남성주의가 아닌데도 말이다. 책 한 권 안 읽고 개그 프로그램이나 일베로만 페미니즘을 배우는지 원. 여기에 대해서는,,, 쓰려면 끝이 없다. 일단, 벨 훅스가 정의하는 페미니즘은 이렇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성차별적 지배와 억압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운동이며 젠더 차별을 종식시키고 평등을 창출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들을 끌어안는 투쟁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급진적인 운동이다.

 - 245쪽

 

이 책은 원제인 <Feminism is for Everybody : Passionate Politics>가 말해주듯 모든 경우 - 일상에서 사회에서, 타고난 생물학적 성이나 성적 취향이 어떻든, 가정에서 자녀 입장이든 부모 입장이든 - 모든 사람들이 보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타인을 억압하지 않고 자신도 억압당하지 않으며 살 수 있는 페미니즘을 말한다. 기존 페미니즘 전개과정을 정리해주면서 벨 훅스 자신, 즉 흑인 여성 페미니스트로서의 생각을 밝히는 내용이다. 

 

특히 이 책에서는 과거 기존 서구 여성들의 페미니즘 운동이 간과한 부분을 지적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저자는 비판한다. 기존 백인 여성들은 백인 사회 질서 안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 내자, 자신들의 계급 상승 가능성에 매혹되어 체제 자체를 변혁하기 위한 운동에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면이 있었다고. 한편 저자는 남성 지배에 대한 반동으로 여성들에게는 돌봄의 정서가 강하고 여성들이 더욱 윤리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의 허구성도 밝힌다. 여성들이 계급이나 인종 등, 자신보다  힘없는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행동하는 양상으로 보아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여성들 역시 남성들처럼 자신의 준거집단이나 현실적 이익에 따라 차별적으로 감정이입을 하거나 동질감을 느끼고 연대하고 있기에. 그리고 특권을 가진 여성들은 노동 계급 빈민 여성들에 대한 이 사회의 지속적인 착취와 억압에 동참하고 있다고.

 

읽다보면, 현대 페미니즘은 여성 권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과 인종은 물론 비정규직문제나 아동, 노인, 난민, 동물 등이 겪는 모든 불평등과 차별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남성들은 배부른 소리 말라고 하며, 성평등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얼마나 많은데,,,, 하면서 계급이나 인종차별 등등 이미 페미니즘에서 충분히 논의하고 실천하고 있는 문제들을 뒷북치며 말한다. 제발 책 좀 읽어보고 아는 척 했으면 좋겠다. ) 

 

 

저자인 벨 훅스는 <나는 여자가 아닙니까 ; 흑인 여성과 페미니즘>로 유명해졌지만 사실 '나는 여자가 아닙니까'라는 문제제기는 미국 남북전쟁시기 도망노예였던 소재너 트루스가 원조다. 소재너는 자신의 구술자서전(1878년 출판됨)에서 '레이디 퍼스트'라든가 '기사도 정신'같은, 알량하고 기만적인 여성 우대조차도 흑인 여성, 하층 계급 여성은 받을 수 없었음을 고발했다. 벨 훅스의 문제제기는 소재너의 연장선에 있다.

 

 

우리는 여자들이 타자를 지배하지 않으면서 자기 실현과 성공을 이룰 수 있는 현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성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사고 체계와 실천방식을 지속적으로 알려 나갈 것이다.

- 51쪽

 

미래지향적 페미니즘의 근본 목표는 모든 여성들의 운명을 변화시켜 그들의 개인적인 힘을 최대한 고양시킬 수 있는 전략을 창출하는 일이다.

- 241쪽

 

저자의 집필의도는 얇은 분량의 입문서인 것 같은데, 사실 내용은 꽤 집약적이다. 쥬스로 말하자면 반 컵 분량이지만 물 타지 않은 농축 원액이다. 이쪽 책 처음 읽는 독자라면 좀 낯선 용어와 맥락에 어려운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저자의 성장기와 경험, 페미니즘 관련 고민 과정을 담은 <사랑은 사치일까>를 먼저 읽고나서 읽는 것이 더 좋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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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 작가의 죽음 철학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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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뭐라고>를 구입했더니, 인터넷 서점에 기록이 남았나보다. 이 책 발간 알림 문자를 받았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주문해서 공식 발간일 이전에 배송 받아 읽어치웠다.

 

그런데 읽다보니 '낚였다'란 생각이 든다. 내용이 너무 부실하다. 그냥 이런저런 넊두리를 메모장에 적어 놓은 것을 모아 억지로 책으로 묶어 놓은 것 같다. 후반부 호스피스 병동 입원 기록 쪽으로 가니 좀 에세이같은 느낌을 주는 글이 있고 감동적인 부분도 있다만. 물론 저자의 투병과 사망 때문에 아무래도 부실한 글 모음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이해한다. 저자도 출판사에도 책임은 없는 것인데도 아쉽다. 그래서, 이 저자의 신랄하면서 번뜩이는 어두운 유머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초반부에는 좀 분노했다. 문고본 두께에 글도 일반 단행본의 반밖에 없으면서 책 가격은 일반 단행본 수준인 것도 좀 마뜩찮다. 다른 문학 출판사들이 소설에만 치중할 때 일찌감치 국내외 에세이 저자를 발굴, 소개하던 이 출판사에 신뢰를 갖고는 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다.

 

여튼 이번 책 역시 <사는 게 뭐라고>처럼 죽음을 앞둔 저자가 암투병하면서 기록한 일기같은 글을 모아 놓았다. 이 저자를 좋아하며 이 저자의 에세이는 <나의 엄마 시즈코 상>까지 세 권 읽었지만 이 책이 가장 질이 떨어지는 편인 것은 솔직히 사실이다. 그래도 여러 군데, 가슴을 울리는 문장이 있긴하다. 아래 인용하며 리뷰를 마친다.

 

내가 아는 건 그녀에게  그런 인생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고, 그녀가 보낸 53년도 스스로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고통은 수술한 상처나 암세포에서뿐만 아니라, 53년간 얻은 마음의 상처에서도 뿜어져 나오는 것일지 모른다.

그래도 그녀는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일생을 살아내었다. 위대한 업적이 아닌가.

별안간 나는 이 세상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 또한 원망과 분노의 개흙에 전신이 갈가리 찢겨 있었다. 
나도 내일 죽을지 10년 뒤에 죽을지 모른다. 내가 죽더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잡초가 자라고 작은 꽃이 피며 비가 오고 태양이 빛날 것이다. 갓난아기가 태어나고 양로원에서 아흔넷의 미라 같은 노인이 죽는 매일매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죽고 싶다. 똥에 진흙을 섞은 듯 거무죽죽하고 독충 같은 내가 그런 생각을 한다.
- 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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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낭의 그리스 신화 - 우주.신.인간의 기원에 관하여
장 피에르 베르낭 지음, 문신원 옮김 / 도서출판성우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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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신, 인간의 기원에 관하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독특한 그리스신화  해설이다. 신화학자인 저자는 카오스에서 시작되는 우주의 탄생부터 가이아에서 비롯된 신들의 탄생과 아버지와 아들 세대간의 전쟁,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가 속고 속이는 가운데 탄생한 최초의 여인 판도라, 오디세우스와 페르세우스의 모험, 트로이 전쟁, 오이디푸스 이야기의 의미를 밝힌다. 각각 사건과 인물들에 대해 다양한 판본의 이야기를 다 인용하며, 늘 듣던 해석이 아닌 이면의 이야기, 뒷날의 사건과 얽히는 또다른 의미를 들려 주어 읽기 즐겁다. 말하자면, 저자는 시종일관 아래에 인용한 자세로 시간과 공간과 신들과 영웅의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듯.

 

그러니 모든 것이 단순히 흑과 백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우주는 언제나 상반된 것들의 혼합에서 비롯한다.

- 80쪽

 

그래서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가 서로 속고 속이는 이야기는 모두 겉과 안의 대비, 겉모양과 실제 속 내용물의 차이를 갖고 벌어지는 유희다.  프로메테우스에게 속아서 내장으로 감싼 살코기 대신에 지방으로 감싼 뼈를 고르는 제우스, 그러나 뼈는 불멸, 고기는 곧 썩을 죽은 짐승, 속은 듯한 제우스가 옳은 선택을 했다. 프로메테우스가 속이 빈 회향목 안에 불씨를 훔쳐 오는 것도 마찬가지 겉과 안의 대비. 이에 보복하는 제우스 역시 속에 불을 숨기고 있는 선물을 인간에게 보내나니, 바로 판도라!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불을 훔치는 계략을 꾸몄다면, 제우스는 남자들을 괴롭히기 위해 훔친 불과도 같은 여성을 창조해 응수했다. 실제로 여성이자 아내는 남편을 허구한 날 불살라 말라 비틀어지게 하고 실제 나이보다 늙게 만드는 불이었다. 판도라는 제우스가 인간들의 집에 들여보내 굳이 불꽃을 피우지 않고도 인간들을 불사르는 불이다. 훔친 불과 쌍을 이루는 훔치는 불이다. 그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112쪽

 

판도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부분은 '여성은 인간의 음탕함과 신적인 부분을 결합시킨다. 여성은 신들과 짐승들 사이를 오가고, 이는 인간의 속성이다.'라는 본문 서술처럼 1910년대에 태어난 저자의 여성관을 살짝 반영하는 듯, 참으로 기묘한 문장이 곳곳에 있다. 하지만  앞뒤 맥락이 있고 책 한권 전체에 일관되게 서술된 방식이 있기에 그리 여성혐오로 불쾌하게 읽히지는 않는다.

 

 

'펜테우스의 자화상이자 분신인 디오니소스' 그리고 '그러니까 스핑크스가 말했던 그 괴물, 동시에 두 발과 세 발 그리고 네 발을 갖는 괴물은 바로 오이디푸스인 것이다.'이런 대목 역시 그랬다. 상반된 것, 감춰진 속성, 자신과 타자, 신성과 마성, 질서와 혼돈,,, 저자는 모든 세상 만물의 대립된 신화를 하나로 합친다. 그래서 매혹당하면서도 슬프다. 나같은 무식한 독자는 읽다보면 다시 태초의 카오스 상태로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런 상태를 아마 전문 용어로 '멘붕'이라고 한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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