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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 우리 시대 여성을 만든 에멀린 팽크허스트 자서전
에멀린 팽크허스트 지음, 김진아.권승혁 옮김 / 현실문화 / 2016년 3월
평점 :
이 책은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 단체인 여성사회정치연맹(WSPU), 일명 '서프러제트'의
지도자인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자서전이다. 원제는 <My Own Story>. 저자는 1858년 맨체스터의 급진주의자 가정에서 태어나 노예제 폐지 운동 등 시민, 인권 운동에
일찌감치 눈떴다. 여성 참정권 운동을 지지하는 변호사 리처드 팽크허스트와 결혼해 세 딸과 함께 참정권 운동에 투신했다. 1903년에
여성사회정치연맹(WSPU)을 설립해 여성참정권을 의회에 주장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당시 여성들에게는 정당에 가입해서 남성 정치인을 지지하는
활동이나 자원봉사를 할 권리만 있었다. 여성들의 권리를 대변해줄 정치인은 없었다.
1908년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수상의 자유당 내각이 들어선 후, 여성사회정치연맹은 온건한
방식을 포기하고 지난 역사의 전례대로, 혁명가 남성들이 하던 방식을 택한다. 즉, 폭력을 사용한 투쟁. 의회 습격과 게릴라식 의사 표현, 국가
기관과 공공 장소, 상점 등 건물 유리창 깨기, 불 지르기,,, 등등 빅토리아 시대 '가정의 천사'로 여겨지던 여성의 틀을 깬 과격한 '전투파'
투쟁을 한 것이다. 이를 당시 언론에서는 기존의 온건한 여성참정권주의자인 서프러지스트(suffragist)와 구별해 '작은 것'이란
어미인 '-ette'를 붙여 ‘서프러제트’(suffragette)'라고 불렀다.
기존의 시위와 가두 연설, 의회 방문, 수상
면접과 국왕 알현 요구 방식도 계속했지만, 효과가 빠른 것은 재산 파괴방식이었다. 시민들이 자신들이 피해입을까봐 정부와 정치인들에게 서프레제트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 입장에서는 온건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게 구타당하고 체포당하는
것보다, 관공서 창문을 깨고 체포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더 이득이었다. 저자는 폭력적 방법을 선책한 이유를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돌을 던지는 것이 더 효과적인데, 왜 여성들이 의회 광장에서 매를 맞고 욕을 먹어야
합니까? 우리는 수년 동안 계속된 모욕과 공격을 인내심을 갖고 견뎠습니다. 우리 여성들의 건강은 손상되었고,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중략)
우리 몸을 다치면서 싸울 때보다 유리창을 깨면서 싸울 때 더 많은 진보를 이뤄냈습니다. 결국, 여성의 삶이나 여성의 건강이나 여성의 몸뚱이가
유리창보다 더 귀중하지 않은가요?"
- 274 ~ 275쪽에서 인용
투쟁이 재산에 피해를 입히는 형태를 띤 이래로, 국내외의 일반 대중은 창문을 깨뜨리거나
우체통에 방화하는 행동이 투표와 어떤 논리적인 관계를 갖는지에 대해 호기심을 보였다. 그런 호기심은 그들이 역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인간의 정치적 진보는 언제나 폭력과 재산 파괴 행위와 더불어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대개 진보는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
전쟁은 영광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진보는 종종 폭동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는데, 이 폭동은 전쟁보다는 덜 영광스럽다고 여겨졌지만 최소한
효율적이라고는 여겨졌다.
- 276 쪽에서 인용
시위하던 여성들은 기마경찰에게 폭력적으로 맞고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벌였으나 코에
관을 삽입하는 강제 급식을 당했다. 많은 여성들이 건강을 잃었다. 그러나 서프레제트 여성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1913년 6월 4일, 전투파 회원인 에밀리 와일딩 데이비슨이 여성참정권을 국왕 앞에서 요구하기 위해 엡섬
더비 경마장에서 달리는 국왕의 경주마 앞에 스스로 뛰어들어 목숨을 잃는 일도 있었다. 저자의 여동생도 투쟁 중 건강을 해쳐서 사망했다. 이 책은 제 1차 세계대전 발발로 일단 정부에 대한 투쟁을 멈추는
시점에서 끝난다. 그러나 이후 1918년, 30세 이상의 영국 여성이 투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928년 영국 정부는 투표권을 남성과 똑같이 21세 이상의 모든 여성에게 확대했다. 에멀린 팽크허스트 사망 직후였다.
여기까지, 내용 요약이다. 지금부터는 내 거친 독후감을 덧붙인다. 역사, 특히 여성사에
관심이 많은지라, 대강 큰 내용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읽으면서 당시 남성들이 여성 참정권 운동을 탄압한 디테일을 읽자니, 절망스러웠다. 최근
한국 사회에 일어나는 일들과 거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접하며 책을 읽다보니, 이게 100년전 일을 기록한 것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여성들이 너무도 당연한 기본 인권 이야기를 하는데도 조롱당하고 무시당하고 심지어 맞는다. 아일랜드 독립 투쟁 등 다른 남성이 이끄는 단체에서
하는 과격한 시위나 무력 투쟁보다 여성들이 하는 시위와 연설, 휴일 밤 사람이 아무도 없어 다칠 일 없는 공공건물 유리창에 돌 던지기는
무시무시한 폭력으로 간주당해 당장 체포된다. 단지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권리 주장이기에 더 사악하고 위험하게 간주당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괘씸죄다. 아놔,,, 100년 후 지금과 너무도 똑 같잖아. 이때 남자들이 단체로 대한민국에 환생했나? 여성을 죽이거나 강간하지 말라는 당연한
인권 주장을 하는데 주장에 동감하기는 커녕 말꼬리나 잡아서 남성혐오니 말투가 과격하니 메갈이니 하는 헛소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이야기하면
또 뭘 그리 진화심리학이니 통계니 역사니 왜곡하며 논리적 증거랍시고 들이대는지,,, 본질적으로는 여성을 같은 인간으로 인정하기 싫으며 기득권을
내려놓기 싫다는 소리일뿐인데 말이다.
여튼, 역사 왜곡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정확히 두 가지를 알려준다. 일단, 서구 여성들이
참정권을 획득한 것은, 여성들이 세계대전에 참여해서 의무를 이행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이들이 목숨 걸고 싸웠기 때문이라는 것. 페미니즘 말만
하면 군대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이거 좀 똑똑히 알아야한다. 두번째로 역사상,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은 온건한 방법으로는 먹히지 않았다는 것.
그러니 제발 부드럽게 친절하게 웃는 얼굴로 자신을 설득해보라는 말을 숨 넘어갈듯 괴로운 사람들 앞에서 요구하지 좀 말았으면. 이렇게 미친년 취급
받으며 맞으며 싸워온 언니들 덕분에 우리가 지금 그나마 이 정도라도 살게 된 것이니. 도대체 천부인권을 가진 인간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 뭐가 이상하고 세상에 위협적인가?
여성들이 마침내 깨어난 것이다. 그들은 여성들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일,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싸움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성들은 그동안 남성을 위해서 싸웠고, 아이들을 위해 싸웠다. 이제 그들은 자신의 인간적
권리를 위해서 싸울 준비가 된 것이다.
- 87쪽에서 인용
이 책은 페미니즘 쪽 외에 19세기 중반 영국 구빈원에 대한 사료적 가치 측면에서도 읽을 만
하다. 앞부분에 빈민구제의원으로 일하던 저자가 여성 빈민 입장에서 구빈원 운영 방식의 문제점을 논한 부분, 참 좋다. 자료
찾다보면, 빈민이나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자료는 여성 저자가 쓴 책에 디테일이 잘 서술된 경우가 많은데, 이 책 역시 그랬다.
페미니즘이란 여성의 권리만이 아닌, 모든 약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관심 있는 분은 한번 읽어 보시길. 이 책 표지로 삼은 <서프레제트>영화가 곧 개봉하니 영화라도 보시길. 메릴 스트립이 이 책의 저자인 에멀린
역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