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명랑하라, 아저씨! - 사십대 가장과 세 여자 이야기
박균호 지음 / 바이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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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의 글은 독특하다. 얼핏 읽기에는 늘 실수하고, 아내와 딸에게 당하고 체면 깎이고, 먹는 것으로 다투고, 가장의 권위를 내세우다가 찌질하게 굴복하고,,,, 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읽다보면 엄숙해진다. 뭐랄까, 삶의 모진 고비를 다 돌아봤기에 그 쓴 맛을 다 알기에 일상의 작은 기쁨을 더 크게 느끼고 달게 받아들이는, 고수의 자세가 보인다. 작가의 말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아래에 인용한다.

 

내가 이렇게 책으로까지 일상을 엮은 이유는 우리 가족의 역사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내가 기록함으로써 특별한 역사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상의 힘을, 기록의 힘을 그렇게 믿는다.

- 본문 5쪽, '작가의 말'에서 인용

 

책에는 사십대 가장과 세 여자, 즉 어머니와 아내와 딸과 함께 혹은 따로 보내는 일상이 담겨 있다. 여기서 따로, 라고 표현한 이유는 어머님은 요양원에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엄마 때문에 고민이 많은 나로서는 어머니 이야기 부분이 가장 가슴에 와 닿았다. 어떤 효 강요도 지나친 회한이나 자책감 서술도 없이 저자는 그저 어머니와 함께 했던 '특별한 역사'와 지금 따로 살면서 주말마다 방문하는 역시 '특별한 역사'를 담담하게 서술한다. 그 점이 읽으면서 눈물나게 좋았다. 아래는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밤을 사서 요양원에 방문하는 대목의 마지막 문단이다.

 

어머니는 겨우 하나를 먹고서 손사래를 쳤다. 몇 개 남지 않은 노모의 치아를 보는 일은 참 고통스럽다.

아니, 사실은 그래도 좋다. 볕 좋은 가을날, 어머니와 함께 앉아 삶은 밤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삶은 이렇게나 좋은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명랑하라, 아저씨여.

- 본문 283쪽에서 인용.

 

남에게 웃음을 주는 방식은 크게 두 갈래다. 상황을 비틀거나 남을 낮추는 방식, 다른 갈래는 자신의 실수담을 이야기하거나 자신을 낮추는 방식. 이 저자분은 자기를 낮춰서 웃음을 주는 스타일이시다. 글의 구성을 보면 단계적으로 차곡차곡 자신을 궁지로 몰아간다. 그 과정의 묘사는 참으로 치밀하다. 막판에 반전도 항상 준비해 놓고 계신다. 이런 필력이라면 보다 자신을 멋지게 부각시키거나 포장하거나 독자의 감동을 짜아내는 글도 충분히 쓰실 수 있다. 예컨대 어머니 관련 글 같은 경우. 그런데 저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는 부분도 "이청준의 <눈길>을 연상케 하는 눈이 펄펄 내리는 어느 겨울날, 어머니는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겼다.(본문 208쪽)"라고만 담담히 서술하신다. 슬프다던가 눈물이 났다던가 속으로 나는 불효자요라며 가슴을 쳤다던가 ,,, 그런 군더더기는 전혀 쓰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독자에게 휙 던져버리는 문장이 오히려 내 가슴에 깊이깊이 남았다. 이런 점이 이 저자의 매력이 아닐까싶다.

 

정리하자면, 자신의 일상을 담은 이 책에서,  저자는 희극은 자세히 서술하고 비극은 간략히 서술하여, 독자에게 여운을 남긴다. 매력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이런 문체의 매력을 알아차리는 독자, 독서 이력이 있어서 이 분이 언뜻 던져주는 짧은 표현의 의미를 아는 독자(예를 들어 이청준의 <눈길>의 그 대목을 읽어서 아는 독자)에게나 이 방식이 통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혹시나 이분의 숨은 내공을 못 알아차리고 겉 이야기만 대강 읽어버리는 독자에게는 찌질한 아저씨 취급당하지나 않으실지 모르겠다. 역시, 이 저자분은 나 같은 고급 독자를 만나야한다. 이런 나의 근자감은 이 책을 통독하면서 무럭무럭 자라났음을 다시 한번 강조해서 밝힌다.

 

대형 출판사에서 온/오프 대형 서점에 막대한 광고비를 지불하고 매대를 사서 광고하는 유명 저자의 에세이만 베스트셀러가 되는 요즈음, 그런 책 리뷰만 인터넷 서점 리뷰 블로그에 많이 올라오는 요즈음, 이런 숨은 내공을 가진 저자의 책을 읽게 되어 반갑다. 덕분에 근 한달여 슬럼프에서 벗어나 다시 일상으로 명랑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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