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감각을 못 견디는 나는 번번이 수영강습에서 낙오되었고 낚싯배 타서도 선실에 콕 박혀 있었다. 겁쟁이다. [노인과 바다]에서 산티아고 노인은 용감하다. 조각배 하나에 의지해 먼바다로 나가, 배 보다 더 큰 물고기와 사투를 벌인다. 가난한 그는 빈 손이다. 망망대해에서 고독을 달래줄 라디오는커녕 물고기에 뿌릴 소금조차 없다. 원양어업에서 으레 동원할 든든한 장비도 없다. 달랑 몸뚱어리뿐이다. 그나마 노화하여 말도 제대로 안 듣는 몸. 그런데 몸이야 말로 일당백이다. 예를 들어 노인의 목소리는 망망대해에서 외로움을 달래줄, 건전지 안 먹는 독백 라디오가 된다. 노인의 억센 손과 강건한 어깨는 물고기와 맞서게 해줄 무기다. '아! 몸 그 자체가 도구, 존재 자체가 어부이구나!' 여기에 생각에 미치자 그제야 왜 소년이 산티아고 노인을 "최고의 어부"라며 존경하는지 알 것 같았다.


물론 물고기 잘 잡는 어부들이야 많겠죠. 훌륭한 어부도 더러는 있고요. 하지만 진짜 어부는 할아버지뿐이에요.



세상은 노인이 84일째 물고기를 잡지 못하자 측은지심을 넘어 무시한다. 소년의 부모님은 노인에게 불운이 붙었다며 아예 노인의 배에 타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도 소년은 노인에게서 "최고의 어부"를 본다. 소년은 "최고"에 걸맞은 예우를 할뿐더러 "최고"에게서 배우고 싶어 한다. 노인은 남들 눈에 덕지덕지 녹이 낀 작살 같을 자신의 존재를 유일하게 인정해 주는 소년이 고마워서라도 거대한 물고기와 끝까지 싸웠다. 노인 역시 '내가 죽느냐, 물고기 네가 죽느냐'의 상황에서 물고기를 인정해준다. 심지어 '형제자매'라고 부른다.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을 때마다 헤밍웨이가 숨겨 놓은 문장의 빙하 밑으로 파내려가게 된다. 곱씹는다. 왜 소년에게 노인은 '최고의 어부'인지, 소년의 눈에만 '최고'인지, 만약 그렇다면 노인은 그런 한평생에 만족하고 세상을 뜰 수 있을지? "최고의 어부"란 무엇인지? 나는 "최고"인 노인에게서 무엇을 배웠는지?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믿어주고 전폭 지지해주는 것만큼 잠재력을 끌어올리게 하는 당근이 있는지...[노인과 바다]는 얇은 철학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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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5-30 22: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헤밍웨이의 깔끔한 문장도 좋고, 말씀하신대로 숨겨놓은 문장을 발견하게 되는 탁월함도 있어, 저도 좋아해요.
그의 생과는 별개로^^;;;;

얄라알라 2024-05-31 07:45   좋아요 1 | URL
우연히 검색하다 본 어떤 전기에서는 헤밍웨이가 총 들고 있느 사진을 표지에 썼더라고요...고작 저는 인터뷰집 1권 읽었는데 좀 더 알아보고 싶어지네요^^;

햇살과함께 2024-05-3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10대 때는 알지 못했는데 다시 읽으며 저 문장들이, 노인이 물고기를 대하는 자세에 대한 문장들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사랑이 훅! 창비아동문고 295
진형민 지음, 최민호 그림 / 창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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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 6학년 때 고백한 번 못하고 끙끙 가슴에 품었던 첫사랑 기억 꺼내어 쓴 소설이라 20년전 느낌도 있어요^^ 농구 좋아하고 땀 번들거리는 종수 캐릭터가 혹시 작가님 첫사랑 닮은 사람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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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동안 [노인과 바다]를 세 가지 버전(각각 백정욱, 이정서, 박상은 번역가 버전)으로 접했다. 내친김에 [헤밍웨이의 말: 은둔 시절의 마지막 인터뷰]까지 읽었고 박균호 작가의 [세계문학 필독서 50]을 펼쳐서 작품해설도 살펴봤다. 한 마디로 엄청난 재발견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대표작이라고 어른들이 하도 권하시길래 10대 때 읽었다. 대학 입시 영어 시험도 대비할 겸 원서까지 동원했다. 하지만 철부지 나는 줄거리만 따라가며 '이렇게 밍밍한 책이 도대체 왜 유명하지?,' 책 추천해준 어른들에게 속은 느낌이었다.


아둔함은 독이다. 교만함은 독자의 눈을 가린다. 청소년기 나는 빨대 꽂아 음료 마시듯 [노인과 바다] 줄거리만 쪽쪽 빨고는 진짜 중요한 양분은 싹 내 버린 셈이다. 단순한 줄거리 이면에는 헤아리기 벅찬 인생의 지혜와 생각거리가 담겨 있었는데도 말이다. 어렸던 나의 경솔과 오만을 속죄하듯 이번에는 [노인과 바다]를 경이로운 마음으로 읽었다.




"빙산 원칙"에 따라 작품을 쓴다는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의 단순한 줄거리라는 빙산 아래, 자신이 경험한 인생의 폭과 밀도를 꾹꾹 눌러 감춰두었다. 80여일 동안 빈 배로 돌아오던 노인이 사투를 벌여서 인생 최고의 물고기를 낚는다. 몸길이가 5.5미터에 이르는 물고기(청새치로 추정)를 실을 공간이 없어 쪽배에 매단다. 그 와중에 프리라이더 상어 떼에게 물고기 살점을 다 뜯겨 뭍에 닿았을 즈음, 물고기는 뼈대와 꼬리, 머리통만 남아 한때 정녕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노인은 물고기와 목숨을 걸고 했던 사투로 기력을 다 써서 깊은 잠에 빠진다. 사자 꿈을 꾸면서......



Jackiemora01, CC BY-SA 3.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via Wikimedia Commons


나는 엉뚱하게도 노인의 소박한 식사법과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 감동을 받았다. 일단 노인은 배고프지 않으면 먹지 않고, 음식이 제 몸으로 들어간 후 어떻게 작용할지를 상상하고 외부의 생명과 자신의 연결성을 이해하며 먹이를 음미한다. 노인의 식사법에는 과도함,즉 과식과 낭비가 없다. 반면 오늘날 대부분의 현대인은 혀끝의 자극과 쾌락, 소비를 통한 과시, 습관적 먹기를 하며 음식을 사유하지 못한다. 

노인은 자신이 잡은 5.5미터짜리(자신의 배보다 몇 뼘 더 큰) 청새치라면 어른 한 명이 겨우내내 식량 삼을 수 있다 가늠하면서도 이걸 먹을 자격 갖춘 인간이 흔히 없다는 것도 안다. 비록 둘(물고기 혹은 노인)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싸움인지라 물고기에게 작살을 꽂았지만 노인은 물고기를 형제의 마음으로 대하고 존중한다. 자연에서 음식을 취하며 생존하고 자신을 살게 해주는 그 존재에 감사하는 노인이야말로 어부이자 철학자가 아닌가, 나는 감탄했다.


그 외에도 뼛 속까지 어부인 노인이 바다를 여성형 명사라면서 바다 및 바다 생물체에 보이는 태도, 몸 속 장기가 밖으로 녹아 나올 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하는 의지, 라디오 하나 없이 가난한 어부로서 망망대해에서 혼잣말하는 노인의 외로움, 피붙이도 아닌데 망망대해 위에서 의리와 신뢰 관계로 다져진 노인과 소년의 우정, 노쇠해가는 몸을 살살 달래고 어르며 노화를 수용하는 노인의 태도 등에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읽을수록 좋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작가로서 출세하지 못했더라면 어부로서 이름을 날렸을 거라는 농담 아닌 농담도 믿게 되었다. 



Look Magazine, Photographer (1953)/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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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과함께 2024-05-18 0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밀키트와 보양탕 ㅋㅋㅋ 적절한 표현입니다 해마다 다시 먹어줘야죠~

얄라알라 2024-05-18 02:37   좋아요 1 | URL
ㅎ네네^^ 그리고 이왕이면 몇 글자라도 보양탕 몸보신 기록을 해주는 게 좋은데
저는 자꾸만 적는 걸 귀찮아하네요.

2024-05-16 0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5-18 0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헤밍웨이의 말 - 은둔 시절의 마지막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권진아 옮김 / 마음산책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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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하기 싫어하는 작가를 기습방문하거나 질리도록 졸라서 억지로 한 인터뷰들을 엮은 책인지라, 부제를 수정하면 좋을 듯 하다. [은둔 시절 작가를 쥐어짜서 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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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구는 이웃들이 궁금하다 책이 좋아 3단계 24
이선주 지음, 국민지 그림 / 주니어RHK(주니어랜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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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가 컸고, 잘 읽었다. 김선정 작가의 해제도 작품만큼 인상적이다. 주인공이 학원 안 다니고 멍 때릴 여유 많았기에 동네사람 관찰할 수 있었다고 지적하는 부분에 공감한다. 다만 된장국 냄새로 후각화된 노인 고독사가 초등학생 동화에 현실적 소재로 등장할 정도로 사회가 변했다는 사실이 씁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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