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한 책 덕후도, 그저 "표지 디자인이 예뻐서" 책을 고를 수 있다. 영롱한 홀로그램이 대놓고 유혹적인 [잔류 인구 Ramnant Population]를 읽은 이유였다. 바로 알아봤다. 엘리자베스 문 Elizabeth Moon(1945~)이 멋진 분임을. 그래서 2021년 12월, 작가의 대표작[어둠의 속도 The Speed of Dark]까지 읽었다.



당시 "앞으로 (Elizabeth Moon을) 더 많이 좋아할" 것이라고 썼던데, 그랬다. 17개월 만에 다시 읽으니 작가가 더 좋아졌다. 나도 모르게 주인공 오필리어 Ofelia 할머니를 작가의 분신으로 상상하며 읽었다. 정작 엘리자베스 문은 50대 초반에 이 작품을 썼다. 하지만, 관절이 찔리듯 아프고, 건조해진 피부와 체구는 쪼그라들고, 사회의 시선에서는 '별 존재감 없는, 그냥 노인'으로 보이는 80대 고령의 경험과 정서를 생생하게 살려 냈다.


오필리어는 제목인 "잔류 인구"를 대변한다. '인구 population'라고는 하지만, 1인 '단독자'로 행성에 남는다. 갑작스러운 이주 명령에 따르다가 극저온 냉동수면 과정에서 죽느니, 40년 동안 일궈온 행성에서 내 맘대로 사는 걸 선택했기 때문이다. 오필리어는 행성 이주 프로젝트에서 노쇠한 자신은 이송비용만 많이 드는 폐기화물과 다름없음을 간파하고 존엄한 삶을 결단한다. 많은 고민이 따르지 않았다. 그냥 "떠나지 않을 거야."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올라왔다. 행성에 잔존해야 할 당위나 거창한 이유 목록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랬다. (떠나기 싫어서 남았다. So Cool!!!)

오필리어는 인간이 지워진 행성에서 나체와 맨발의 자유를 만끽한다. 칙칙한 작업복을 벗어던져 부끄러워했던 늙은 피부를 드러낸다. 화려한 비즈 장식을 만들어 달고, 알록달록 풍성한 색감의 옷을 입는다. 햇살에 기미가 짙어지건 말건, 모자도 없이 땡볕에서 밭일을 하고, 이웃이었던 사람들의 냉장고를 열어 음식도 챙긴다. 평생 돌보고 일구며 살아온 할머니는 자신의 몸과 집, 이웃의 집, 심지어는 행성에 남은 양과 소까지 챙긴다. 그러다가, "종족" 즉 행성의 원거주생명체를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가 급물살을 타고 전개된다.

통념이라는 사회적 잣대로 보았을 때, 할머니는 결핍투성이다. 힘 부족, 학력 부족... 하지만, [잔류 인구]에서 엘리자베스 문이 입체적으로 살려낸 오필리어는, 매 순간 삶의 에너지로 충만하고 자신과 주변을 채워주는 사람이다. 외람되지만, 귀여우시기까지 한 할머니. 어슐러 K. 르 귄 역시 오필리어 할머니를 두고 "Ofelia—tough, kind, wise and unwise, fond of food, tired of foolish people—is one of the most probable heroines science fiction has ever known.”라고 찬사를 보냈다.


[잔류인구]는 [로빈슨 크루소]나 [파리대왕]처럼 젊은 남성(들)의 생존기가 아닌, 고령의 단독자 할머니의 생존기라는 면에서도 독특하다. 또한, 역사와 인류학을 공부했던 저자가 독자에게 인간존재와 사회에 대해 풍성한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도 귀한 작품이다. "다른 존재, 다름"에 대한 폭력적 상상과 타자화, 언어를 넘어선 비언어적 소통과 교감의 아름다움, 현대 산업 사회 제도화된 '배움'의 경직성에 대한 반성, 개체의 생명뿐 아니라 공동체의 가치를 '우등/열등'의 판단 아래 차등화해온 인간의 역사가 우주확장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재연되는 데 대한 인간으로서의 부끄러움, 돌봄의 가치와 돌봄능력에 대한 젠더화된 상상. 등등.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한 권의 소설에 욱여넣을 수 있다니, 엘리자베스 문 할머니는 정말 부지런하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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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3-06-09 1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둠의 속도]와 [잔류 인구] 담아갑니다.

할머니가 주인공인 이야기는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얄라알라님이 아래쪽에 남겨주신 말씀들에 하나하나 다 공감합니다.

얄라알라 2023-06-10 08:56   좋아요 0 | URL
오! 감은빛님 혹시라도 이 책들 읽으신다면
같이 채팅으로라도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집니다!

새벽엔 BING AI로 엘리자베스 문에 대해 여러 질문을 하며 놀았어요. 그 정도로 저는 이 텍사스 출신 할머니 작가님께 호기심이 생긴답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3-06-10 15: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이나 표지 디자인이 좋은 책은 구매하는데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일단 눈에 잘 들어오니까요.
얄라알라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얄라알라 2023-06-11 10:13   좋아요 1 | URL
돌풍 우박 주의보는 봤지만, 현재로서는 날씨가 너무 좋아서 놀러가고 싶네요

서니데이님께서도 해피 선데이 보내시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