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셰퍼드, 죽은 자들의 의사 - 헝거포드 대학살에서 다이애나 비 사망사건과 9.11까지, 영국 최고의 법의학자가 말하는 삶과 죽음
리처드 셰퍼드 지음, 한진영 옮김 / 갈라파고스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29, 30, 31일. 단식 3일차. 

물 단식에서 슬그머니 쥬스 단식으로 바꾸었으니 엄밀한 의미로는 '음식을 끊지' 않았다. 사과당근 쥬스에 이어 독특한 색상의 액체도 마셨는데, 톳과 다시마 추출액에 시금치가 더해졌으니, 성분표를 보고 짐작했던 맛보다 더 다시마스럽다. 출시 전에 테스팅을 숱하게 거쳤을 텐데, 소수의 마니아를 겨냥했을까? 나는 그 소수가 분명 아니다.  


   

29, 30, 31일. 


의외로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위장이 얌전하다. 작년 생일 무렵 3일 단식은 심심해져서 그만두었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고 음식에 대한 욕구도 별로 없다. 심심함은 조바심의 다른 표출이었을텐데, 2020년 코로나 집콕 책수련을 통해서 차분해졌는가? 더 깊은 포기 상태로 내려가 초연해진 걸까? 2020년 내내 집 밖으로 책과 물건들을 몰아내며 딱 필요한 것들만 남겼듯, 음식과도 그런 관계를 맺고 싶었다. 거기서 출발했지만, 막상 대면해보니 더 복잡한 마음이다. 



 

도움 받을까 싶어, [음식을 끊다. 단식, 자신을 찾는 여행]을 읽었다. 단식 중에는 산책 이상의 격한 움직임이 좋지 않다는 저자 스티븐 헤로드 뷰너의 충고를 착실히 받아들여 아예 산책조차 안 했다. 책만 종일 읽었다. 늦은 오후부터 읽기 시작한 책은 [닥터 셰퍼드, 죽은 자들의 의사]인데, 예상 밖의 내용이라서 오래 기억할 듯 하다. 미드 Criminal Minds, CSI, 한니발 시리즈까지 샅샅이 훑고 국내외 법의학자들의 저서를 꽤나 탐독해왔기에 읽기 전부터 책 내용을 짐작했다. 35년도 넘는 경력의 전문가가 쓴 책을 두고 감히 "짐작"했으니, 교만이 하늘을 찔렀다. 


총 34장 구성의 [닥터 셰퍼드, 죽은 자들의 의사]는 좀 묘하게 시작된다. 경비행기 운전 취미가 있는 저자가 하늘을 날다가 비현실적 지각을 하는 장면으로. 9살 때 겪은 어머니의 죽음, 13살 때 법의학자 되기로 결심한 계기, 결혼 생활, 아버지로서의 노력과 아내와의 갈등, 커리어 상의 위기 등등 저자의 사적인 이야기가 마치 고백체 일기처럼 배치되다가 마지막 장에 와서야 그런 배치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Dr. 리처드 셰퍼드는 글을 쓰면서 치유하는 중이었다. 30년 동안 2만 3천여 구의 시신을 마주하면서 PTSD를 겪게 된 것이다. 프로페서널한 엄밀함으로 공정하게 검시를 하면서 꾹꾹 눌러두었던 감정적 정서적 파동이 그의 내면을 집어삼켰던 지라, 1장을 위험한 비행 경험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Dr. 리처드 셰퍼드 (홈 페이지: https://drrichardshepherd.com/portfolio/books ) 는 여러 면에서 Criminal Minds의 애런 하치를 떠올리게 한다. 표정 없고, 거의 화내는 일 없이 감정적으로 요동하지 않으나 내면은 따스하고 고독한....영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전문가이지만, 안주하지 않고 사회를 위해 자신의 (법의학) 전문성을 어떻게 활용할지 어떤 제도가 필요할지를 고민한다. PTSD로 어쩌면 진작에 무너졌을 그가, 다시 재기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은 바로 그 소신이다.  법의학자로서 세상을 위해 선한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 육아서에 간혹 "감정의 쓰레받이, 쓰레기통"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분이 대신 받아낸 고통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다. 닥터 셰퍼드의 표현을 그대로 빌어와 본다. 


"  어느 뜨거운 여름날 아침 나는 토막 나서 썩어가는 시신들의 영상에 쫓기고 있었다. 창자가 있었다. 스펀지 같은 간도 있었다. 뛰지 않는 심장도 있었다. 결혼반지가 끼워진 손도 있었다. 나는 그 반지를 빼야 했다...(중략)....독자들은 이미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라는 진단을 내렸으리라. 나만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 증상은 내가 부검한 2만 3천 구의 시신 중 어느 특정 시신에 의해 발병한 것이 아니다. 그 모든 시신에 의해 발병한 것도 아니다. 내가 개입했던 특정 재난에 의해 발병한 것도 아니고 그 모든 재난에 의해 벌어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행한 비인간성을 다른 구성원들(법원, 가족, 일반 대중, 사회) 대신 처음으로 목격한 평생의 경험에 의해 발병한 것이다

  이 진단을 받고 나는 2016년 여름 동안 휴직을 했다. 

  두 가지 치료법은 상담과 약물치료였다. 

  그리고 이 책을 쓰는 것. (4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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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2020-12-31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제목부터 읽고 싶게 만드네요. ^^ 북사랑님 2020 남은 시간 잘 보내시고 새해에도 건강하세요. 여기서 또 만나요~~~^^

scott 2020-12-31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사랑님 이추위에 단식을 4일 넘기면 ,,,,,안되는데

2020-12-31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01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01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