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 종결자 세트 - 전3권
이우혁 지음 / 엘릭시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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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는 역사책인 줄 알았네....... 어찌 되었든 우리나라에 이런 장르를 시도하는 작가가 있다는 것이 참 축복이고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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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즈 러너 2편이 올해 후반기에 개봉한다. 부제는 '스코치 트라이얼', 혹독한 시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과연 그게 '혹독'할까?

 플라톤의 『국가』을 보자. 감독이 이 책을 봤다면, 적어도 첫째 조건은 만족한 셈이다. '공포의 대상'을 제시했으니, 그 다음은 환락인가? 그건 올해 말에 확인해야겠지.

 

  그래서 내가 말했네. "그렇다면 우리는 셋째 유형의 호리는 시험도 해 보면서 지켜보아야만 하네. 마치 사람들이 망아지를 소음과 소란이 있는 곳으로 이끌고 가서 그것들이 겁을 먹는지를 살피듯, 마찬가지로 젊은 시절의 이들을 어떤 공포의 대상들 속으로 몰고 가는가 하면, 다음 번에는 환락 속으로 옮겨 놓고서는, 황금을 불 속에서 시험해 보는 것보다도 더 많이 시험해 보아야 하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어떤 경우에나 좀처럼 흘리지 않고 의젓하며, 자기 자신과 자기가 배운 시가의 훌륭한 수호자인 걸로 보인다면, 그래서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자신을 단정하고 조화로운 사람으로 드러내 보인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 가장 유용한 사람일 걸세. 그리고 아이들 사이에서나 청년들 사이에서 그리고 어른들 사이에서 언제나 그런 시험을 거쳐 더렵혀지지 않은 것으로 판명된 사람을 우리는 나라의 통치자 및 수호자로 임명해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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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군화 잭 런던 걸작선 3
잭 런던 지음, 곽영미 옮김 / 궁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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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0년 동안 세상은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발전해 왔다. 특히, 기술의 발전은 현대인의 생활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100년 전 사람들 중 어느 누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친척과 얼굴을 맞대며 이야기하고, 대륙을 몇 시간 만에 건너가는 것을 상상했겠는가? 이러한 기술의 발전이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해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해서 우리가 놓친 것이 있다. 바로 과거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다. 물질문명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가 애써 무시하려고 하는 질문, “1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악습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희생시켜 이러한 발전을 이루었는가?”, 이것은 이전까지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는 질문이다. 대답하기를 거부하면 예전과 같은 삶을 살 것이고, 대답하면 혁명가가 될 것이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어니스트가 나의 삶에 뛰어들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강인한 몸만큼 굳건한 영혼을 가진 남자였다. 그 자는 나에게 허공 위에서 내려와 땅을 밟으라고 말했다. 나는 그 동안 세상을 몰랐다. 『강철군화』를 그저 사회주의 소설로만 여기고, 100년 전에 이미 가치를 잃은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잭 런던이 어니스트의 입을 통해 보여준 세상의 모습은 놀랍게도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의 모습이었다. 그가 나를 땅으로 인도한 순간, 앞이 보였다. 나는 더 이상 눈먼 자가 아니었다.

 

 나는 내 옷을 보았다. 내 옷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어니스트에게 이 피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나를 위해 돈과 시간을 바친 이들의 피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피를 씻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에게 은혜를 갚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나는 나 때문에 부모님이 울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또 이 옷을 만들기 위해 저임금으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내 발목에 묶여있는 족쇄를 보았다. 내가 묻기도 전에 어니스트는 내가 기계의 족쇄에 매여있다고 말했다. 그 기계란 텔레비전, 컴퓨터, 휴대전화를 뜻했다. 그는 기계 사용을 멈추지 않으면 결코 자유인이 될 수 없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나는 자유의 대가를 치르기에는 너무 어렸고, 또 나약했다. 나는 기계의 노예임을 인정했다. 어니스트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나를 재벌과 정치인들의 모임으로 데리고 갔다. 어니스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권력, 노동자 계급인 우리가 설교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도덕, 정의, 박애를 호소해봤자 당신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쓰디쓴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심장은 가난한 이들의 얼굴을 밟고 지나가는 그 구두 뒤축만큼 딱딱하니까요. () 역사가 시작된 이래 노동이 흙 속에 묻혀 있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당신과 당신의 계급과 그 후손들이 권력을 쥐고 있는 한, 노동이 흙 속에 묻혀 있으리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당신이 한 모든 말에 동의합니다. 언제나 그래왔듯, 권력이 심판자가 될 것입니다. 권력은 곧 계급투쟁입니다.”

 

 왜 그는 나를 모임에 데려갔을까? 정말 이 사람은 나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걸까? 어니스트 에버하드는 나를 교회로 데리고 갔다. 나는 내가 다니는 교회가 세상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았길 바랬다. 하지만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한국 기독교의 현실 앞에 나는 교회의 변질과 타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자본가와 노동자에게 자행하는 만행과 횡포를 묵인하고 그것을 신의 뜻이라고 정당화했다. 목사들은 돈에 무릎을 꿇고 자본가와 손을 잡았다. 그는 나에게 모어하우스 주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분은 존경받는 성인이었지만 교회의 현실에 무지했다. 그는 어니스트에 의해 계몽된 이후, 교회의 현실 참여와 본질의 회복을 부르짖었지만 그 때문에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그는 거기서 탈출한 이후, 자신의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빈민가에 거주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 자신의 재산으로 어린 양을 먹이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회는 그 자기가 가진 모든 걸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놓는 부자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고 정신병원에 수감시켰다. 이야기를 마치고, 어니스트가 나에게 물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나는 가슴이 아파 대답할 수 없었다.

 

 마침내 나는 어니스트의 아내이자 위대한 혁명가인 에이비스 에버하드를 만났다. 그녀가 가장 먼저 들려준 이야기는 언론 이야기였다. 이른바 강철군화라 불리는, 과두지배계층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언론은 그들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어니스트도 한술 떠서, 언론은 자본가 계급에 기대어 살을 찌우는 기생충이라고 직언했다. 언론은 팔이 잘렸다는 이유로 공장에서 쫓겨난 잭슨의 기사나 모어하우스의 설교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고, 강철군화의 업적만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우리나라의 언론을 떠올렸다. 진실을 감추고, 왜곡된 기사만 보도하는 뉴스, 과두지배계층을 찬미하고 혁명가들을 은근히 비웃는 신문 기사, 그리고 억압 받는 예술가들. 100년 전에 일제가 실시한 신문지법은 이미 폐지되었고, 출판과 표현의 자유가 헌법에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언론은 그 기능을 잃은 채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예견한 감시와 조작은 오늘날 발달된 기술을 바탕으로 교묘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에이비스는 그녀의 아버지의 책을 예로 들었다. 그의 책은 출판되자마자 평단의 혹평을 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의 책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서점에도 없고, 출판사도 출판을 중지했다. 과연 이 일이 100년 전 미국에서만 일어나고 있을까? 그녀가 물었다.

 

 나는 어니스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강철군화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모든 악습과 모순을 해결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요? 그는 나를 중산계층의 모임에 데리고 갔다. 그들은 대기업의 독점을 막기 위해 기계를 파괴하고 원시 상태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경제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유치하기 그지없는 주장이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이기적인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고 피해자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어니스트는 지적했다. 이미 문턱은 사라졌습니다. 여러분은 자본가 계급에 빌붙을지, 아니면 프롤레타이아의 편에 서서 싸울지 선택해야 합니다. 법은 여러분의 편이 아닙니다. 법은 지배계층의 이익을 위해 악용되고 있습니다. ,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이윽고 그는 진화의 물결에 따라 자본주의가 몰락하고 사회주의가 올 것임을 예언했다.

 

 그 때, 내가 말했다. 사회주의는 실패했습니다. 역사가 증명했어요. 어니스트는 내 말을 듣고 이렇게 대답했다. 역사가 무엇을 증명할지 봐. 이건 모두의 역사가 될 거야. 최저임금으로 묶여 사는 노예들이 생길 거야. 자본가의 이익을 위한 전쟁이 일어날 거야. 물론 그 군인은 각국의 노동자들이겠지. 또한, 노동자들 내에서 노동귀족이라는 특권층이 생길 거야. 그들은 지위를 세습하며 자신들의 부를 유지하고, 다른 노동자들을 짓밟을 거야. 나는 그 예언이 이미 성취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나는 이 혁명가들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투쟁은 있다. 단지 목적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나는 혁명가 부부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무엇을 위해 싸웁니까?

 

 에이비스 에버하드는 먼저 남편을 언급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나의 독수리라고 불렀다. 그녀는 그가 없었다면 자신이 거짓과 가식으로 둘러싸인 가짜 세상에서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어니스트를 통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이후, 그의 아내가 되어 그의 위로와 힘이 되어주었다. 한 마디로, 어니스트는 에이비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자신과 같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혹시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인생이 전환되고 있다고 대답했다. 당신이 어니스트를 처음부터 좋아하지 않았듯이, 내 인생의 전환점은 죽음처럼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영화, , 음악, 사색으로부터 시작된 어떤 작은 생각이 나의 삶의 방향을 정하고, 행동 양식을 바꾼다. 그리고 그 과정은 아주 천천히 이루어져서 내가 변하는 것도 느끼지 못한다. 마치 사랑처럼, 사람은 변한다.

 

 나의 대답을 들은 두 사람은 자신이 목숨을 바치며 강철군화에 맞서는 까닭이 정의라고 말했다. 어니스트는 정의가 인류 역사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주장했다. 역사의 모든 지배체제의 힘은 자신들이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에서 나왔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반동 세력 역시 같은 목표, 즉 정의를 향해 싸우고 있었다.

 

 “그 문제에 있어서는, 혁명의 힘 역시 이 무시무시한 20년 내내 다름 아닌 정의감에서 나왔다. 그것 말고는 우리의 희생

과 순교를 설명할 수 없다. 바로 그 이유로 루돌프 맨델홀이 사회주의를 위해 영혼을 불태우다 생의 마지막 밤을 자신의 멋진 백조 노래와 함께 마감했다. 바로 그 이유로 헐버트가 마지막까지 동지들을 배신하기를 거부하다 고문에 못 이겨 죽어갔다. 바로 그 이유로 안나 로일스턴이 모성의 축복을 거부했다. 바로 그 이유로 존 칼슨이 글렌엘런 은신처에서 무보수로 충직하게 일했다. 남녀노소, 지위고하, 천재 바보 막론하고 어떤 인간을 혁명 동지들 속으로 밀어넣는 원동력은 정의를 향한 위대하고 지조 있는 갈망에서 나온다.”

 

 어니스트는 나에게 내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선택권은 많았다. 평등, 자유, 행복, 사랑 같은 다른 대답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의를 택했다. 왜냐하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야말로 강철군화의 시대이며 정의가 필요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언제부터 한국의 역사에서 정의의 혼이 끊겼는지 알 수가 없다. 분명 지금, 정의는 죽었다. 정의를 찾지도 않고, 불의에 저항하지 않는 나의 모습이 바로 그 증거이다. 그리고 나는 혁명가가 아니다. 고등학생인 내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좋은 대학에 나와, 좋은 직장을 다니며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지, 저 거대하고 차가운 벽에 투쟁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렇다고 좀비처럼 학살당하는 밑바닥 사람들도 아니다. 나는 소시민이고, 나약한 지식인이다. 지금처럼 삶이 지속되기를, 일상이 파괴되지 않기를, 바라지 않으면서도 바라는 모순 덩어리이다. 나는 이렇게 고백하며 어니스트를 비판했다. 왜 당신은 혁명가의 길을 강요하느냐. 왜 노동자의 힘을 찬양하면서 노동자의 죽음을 내버려두는가. 왜 노동자라는 이름의, 모든 억눌린 자들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 하는가?

 

 어니스트는 기뻐했다. 내가 드디어 땅에 내려왔다고 축하했다. 그는 내가 드디어 현실을 보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하며 시험에 통과했다고 말했다. 이로써 나의 삶은 변화되었다. 어느 나라를 가도 모든 역사의 주인공은 이름 없는 자들이었다. 혁명의 주체는 어니스트와 같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레미제라블이다. 역사를 바꾸는 자는 과두지배의 통치자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난쟁이이다. 나는 『강철군화』를 통해 이 진실을 알게 되었으며, 앞으로 내가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나를 비롯한, 나를 위해 피를 흘린 사람들, 꿈을 가졌지만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다. 내가 만약 그들 중 한 명의 삶이라도, 에이비스가 어니스트를 만난 듯, 변화시킬 수 있다면 나는 이미 혁명가로서의 임무를 완수한 것이며, 정의의 사람들의 일원이다.

 

 모든 만남이 끝나고 작별인사를 하기 전에, 에이비스 에버하드는 나의 인생에 닥칠 시련을 이야기해주며, 앞을 가로막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알려주었다.

 “진실을, 모든 진실을, 그리고 진실만을 말해야 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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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멘터리 동과 서 - 서로 다른 생각의 기원
EBS 동과서 제작팀 외 지음 / 지식채널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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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과 서양의 세계관 차이는 낯선 소재가 아니다. 나는 EBS 다큐멘터리가 나오기 전에도, 또 나온 이후에도 이 두 세계의 세상을 보는 상반된 관점에 관한 글을 많이 보았다. 대표적인 예가, 고대 그리스인과 중국인의 사고관 차이이다. 고대 중국인은 사회적 관계를 중시한 반면, 고대 그리스인은 사물 자체를 중시한다는 지문을 문제집에서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윤리 시간에 배우는 동양과 서양의 자연관에서도 차이는 뚜렷이 나타난다. 서양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반면, 동양은 자연과 인간을 조화하려 한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다. 이렇게 동서양이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과 서』는 다양한 실험과 인터뷰를 통해 그 이유를 찾으려 했다.

 

 동서양의 비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익히 보았던 내용이고, 예상할 수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이 차이에 대한 태도이다. 이 차이를 허용할 것인가, 아니면 좁히려 노력할 것인가? 차이를 내버려 두면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는 요즘, 큰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고, 좁히려 노력하는 일은 구체적인 방법이 없다. 언어, 인종, 문화가 모두 다른데 어떻게 그 차이를 좁힐 수 있단 말인가? 불가능에 가깝다. 대표적인 예가 책에 소개되어 있다.

 

지난 2007년 미국 버지니아공과대학에서 발생한 총기 살인사건의 범인은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이에 대해 일부 한국인들이 보여준 반응은 서양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들은 이 사건이 한국인들 모두의 책임이라 여기고 국가적 차원에서 미국에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한 미국 대사관 앞에서는 애도와 사과의 의미를 담은 촛불집회가 열렸다. 인터넷에서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게시판이 만들어졌고 한국의 대통령은 세 차례에 걸쳐 유감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지는 정신적 문제가 있는 한 개인의 잘못일뿐 한국인들이 나서서 사과할 문제가 아니니 더 이상 사과하지 말아달라는 사설을 게재했다. 이처럼 동양에서는 개인과 집단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p.226)

  이것은 최근에 일어난 마크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에서는 한 개인의 범죄로 그 사건을 해석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하여 공연을 하며 사과하지 않았던가. 적어도 『동과 서』의 관점을 따르자면, 그 행동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우리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그들의 처지를 생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해프닝에 가깝다(물론 피격 사건은 범죄지만).

 

  결국은 관용의 태도가 필요하다. 내가 너의 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너도 나의 문화를 소중히 여겨달라. 이것이 동서양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 그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너와 나는 달라. 하지만 우린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이런 열린 마음이 동서양이 상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여기까지가, 『동과 서』의 저자 김명진의 입장이었다. 물론 관용의 태도는 내가 다른 곳에서 빌려온 개념이었다. 잠시 나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미 저자가 오해의 여지가 있을 거라고 우려했고, 또 책의 의도가 그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음을 알지만, 나는 세상을 동 아니면 서로 나누는 이분법을 비판한다. 이분법은 위험하다.

 이분법을 통해 지배자와 피지배자, 동과 서, 너 아니면 나. 세상을 편리하게 볼 수 있겠지만, 결국 편협한 시선이다. 언제나 이분법의 함정에서 벗어난 공간, 문턱 위에서 생각하라. 동과 서의 문턱은 위치적 개념이 아니다. 여기서 문턱이란 관용을 말한다. 인종, 피부, 언어, 직업, 국적, 성별이 모두 다른 사람들을 모아놓고 함께 살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이 각자 생활하게 내버려둘까, 아니면 하나의 기준을 정해서 거기에 맞출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를까? 내 주장은, 선택에 맡기라는 것이다. 책임 역시 그들의 것이다. 문턱은 선택의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역시 선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동과 서', '선과 악' 같은 이분법에서 벗어나려면, 분명 노력이 필요하다. 당신은 동쪽인가, 서쪽인가? 아니면 서쪽이면서 동쪽인가? 동쪽이면서 서쪽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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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즈 러너'를 처음 본 건 영화관에서였다. 친구들과 함께 시내 영화관으로 무슨 영화를 볼지 고르다가, 이 영화가 재미있어서 보여서 무턱대고 보게 되었다. 예고편도 보지 않고, '미로를 달리는 사람들'이라는 제목만으로 내용을 추론했다.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 아이들은 어떤 게임에 참여해서, 한 명씩 한 명씩 미로 속의 난관 속에 죽어가고, 주인공을 비롯한 일부 사람들만 살아남아 목표를 이루는 영화구나." 한 마디로, '메이즈 러너'는 단순한 할리우드 오락영화로 본 것이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내 예상과 다르게 영화가 진행되었다. 할리우드 영화가 어쩔 수 없이 가지는 '진부한 요소(이른바 클리셰)'가 종종 보였지만, 결코 평범한 오락영화로 보이지 않았다. 미로는 게임이 아니라 시험이었다. 한 명씩 한 명씩 죽는 게 아니라 무리를 지어 움직인다. 남아 있으려 하는 무리, 떠나려는 무리. 글레이드, 미로, 그리버 등이 주는 함축적 의미는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매력적인 배우들 때문에, 그들이 죽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고, 적어도 1편에서는 그랬다. 또 볼 수 있다는 것, 그들이 이 재앙을 끝낸다는 희망 때문에 2, 3편은 꼭 볼 것이다........

 

 그러고 나서, 최근에 『메이즈 러너』를 구매해서 읽어본 결과, 영화와 책 모두 대만족이었다. 각자 매력을 담고 있었다. 책에서만 담을 수 있는 내용을, 영화가 적절히 편집하고 창조해서 어느 매체로 읽든 이 매력적인 스토리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다음 페이지가 기대되는 소설을 만났다.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지만, 영화와 책 모두 '토머스'를 중심으로 그를 따라가는 시점을 사용해서 스릴이 넘쳤다. 생각해 보라. 토머스 없이 진행되는 장면은 책에서 단 하나도 없었다(에필로그 제외). 영화도 거의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연들은 하나같이 빛이 났다. 또, 죽는 이들도 똑같이 죽어서 다음 편에도 비슷한 현상을 겪을 것 같다.

 사실 『메이즈 러너』는 영상화하기 아주 좋은 소재를 지니고 있다. 괴수(그리버), 미로, 재앙, 글레이드(책에서는 공터라고 부른다)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웨스 볼은 그것을 스크린에 멋지게 구현해내었다. 영화와 책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바로 '탈출구'인데, 개인적으로 책이 더 마음에 든다. 책에 묘사된 '절벽'은 내가 예전에 즐겨했던 게임, '마인크래프트'의 베드락 아래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절벽의 묘사를 표현하면, 대략 이 정도?) 출처: 구글 이미지

 

 결론은, 책이든 영화든 어느 것을 보든 큰 즐거움을 맛볼 것이고, 나아가 이 이야기를 하나의 상징으로 본다면 많은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다음 편을 정말 읽고 싶지만, 영화를 위해 나도 참는다.

 

 (메이즈 러너처럼 책이 기대되는 작품은 '에메랄드 아틀라스' 시리즈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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