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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ㅣ 복복서가 x 김영하 소설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0년 8월
평점 :
V: 어땠어?
O: 뭐가?
V: 김영하가 쓴 『살인자의 기억법』. 한 시간 만에 읽었다며.
O: 모르겠어. 정리가 안 돼. 나는 당연히 박주태가 위험한 인물이고, 은희가 연쇄살인마의 딸이라고 생각했어. 지금 생각해 보면 곳곳에 이상한 점들이 있었는데, 왜 그걸 우습게 여겼을까?
V: 그럼 너는 박주태와 경찰들이 하는 말을 믿어?
O: 적어도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인이 하는 말보다는 믿을 만해. 게다가 이 사람은 자기가 쓴 것도 기억하지 못하잖아. 이 소설은 김병수가 쓴 기록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어. 중간에 자기가 죽었을 때 은희가 보게 될 거라는 서술도 나오잖아. 독자를 가정하고 적은 거지.
V: 아무 것도 모르는 노인한테 죄를 덮어 씌우는 거라면? 어쩌면 김병수는 시 강의 시간에 상상의 날개를 펼쳤는지도 몰라. 대나무숲에서 시체들이 발견되었지만, 살인의 명확한 증거도 없고 말이야.
O: 그럼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게 뭔데? 작가가 말하고 싶은 건 뭐야?
V: 적어도 “무서운 건 악이 아니라 시간이다”라거나 “죄책감은 본질적으로 약한 감정이다” 따위의 따분한 말을 전달하려는 건 아닐 테지. 애초에 첫 문장에 사람을 죽였다는 문장도 독자들의 시선을 끄는 동시에 감정이입을 막으려는 장치였으니까.
O: 변함없이 경찰은 무능하다고 비웃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그를 주시하고 있었구나. 그럼 최근에 일어난 연쇄살인과 박주태의 차에 묻은 피, 그리고 은희의 ‘아빠’라는 호칭은 어떻게 설명하지? 은희는 어쩌다 살해당한 거야?
V: 우습지. 가장 핵심적인 기록은 누락되었다는 게. 결국 김병수는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해. 아니, 이 사람한테는 기록이 곧 기억이니까, 자신한테 필요한 과거만 적어놓는 셈이지. 나머지는 모두 혼돈, 또는 공으로 흘러갈 뿐이고.
O: 뭐야, 그럼 우리한테는 알 권리가 없는 거야?
V: 김영하가 후기에 그렇게 썼잖아. 자기는 어떤 세계를 방문한 여행자에 불과하다고. 작가한테 허용된 기록의 영역에는 한계가 있어. 어차피 그 세계에도 우리 세계와 비슷한 원칙이 적용되니까 나머지는 독자의 몫이야.
O: 어떤 원칙?
V: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특히, 미지의 영역에 대해.
O: 동의하기 어려운데. 사람은 모르는 것에 당혹감을 표현하거나 도망치잖아.
V: 너는 논란이 되는 주제를 좋아하니?
O: 뭐, 열린 결말이나 음모론 같은 것들?
V: 그렇지. 의견이 갈려서 타협되지 않는 주제들.
O: 딱히. 너는?
V: 나는 기꺼이 한쪽 입장을 택해. 동시에 다른 입장도 존중하지. 사람은 미지의 영역에 공포를 느끼는 동시에 맹목적인 확신을 품거든. 그곳에서는 인간의 믿음이 곧 근거가 돼. 사람이 가진 가장 약한 믿음은, 자신의 믿음이 확실하지 않다는 거야. 진실을 말해줘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아. 김병수가 마침내 혼돈에게 주시당하는 순간이 이 소설의 결말을 장식하는 것처럼.
O: 나는 연쇄살인마의 생각과 대부분 달랐어. 특히 시간에 대한 인식은 정반대였지.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가상의 접점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했잖아. 나는 오히려 인간은 현재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 과거와 미래는 현재에 잠시 개입하지만, 결국 인간은 현재로 돌아오지.
V: 어쩌면 치매 환자뿐만 아니라 사람은 언제나 적절하지 못한 곳을 떠다니는 존재라는 생각도 들어. 그래도 김병수의 통찰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는 순간도 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이거거든. “인간을 틀 몇 개로 재단하면서 평생을 사는 바보들이 있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좀 위험하다.” 자기 눈 안에 있는 대들보를 못 보고 남들을 평가하는 행동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 어떤 면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기도 하고.
O: 어찌 됐든 김병수가 연쇄살인마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살인자의 기억법』은 그럴 듯한 가르침을 전해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자주 했던 일, 또는 몰입했던 일로 형성된다는 걸. 처음에 아버지를 죽였을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필요에 의해 정당화되지만, 그다음 살인부터는 순수한 몰입감이었잖아. 이제 김병수에게 삶의 고민이란 사람을 죽이거나 살리거나, 둘 중 하나뿐이었어.
V: 초반부에 재미 있는 에피소드가 있었잖아. 「신부」라는 시를 첫날밤에 신부를 살해하고 도주한 신랑 이야기로 읽었다면서 “그걸 어떻게 달리 읽겠는가?”라고 따지듯이 쓴 장면. 누가 누구한테 이해를 바라는 거지? 연쇄살인마 주제에 독자한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어.
O: 이해도 안 되고, 용서도 안 돼.
V: 김병수의 시각을 떼어놓고 이 소설을 보면 조금 다른 점도 발견돼. 연쇄살인마 자리에 주어가 없으면 우리는 미지의 존재에 공포를 느끼지. 하지만 그 존재가 주변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치매 환자임을 아는 순간, 공포가 아닌 다른 감정이 그 자리를 채워. 사람에 대한 감정은 꽉 찬 그릇과도 같은 거야. 내용물이 대체될 수는 있어도, 비워질 수는 없어.
O: 박주태의 시각으로는 치밀한 수사물이고, 은희 입장에서는 비극이겠지.
V: 개의 입장에서는?
O: 그것까지 알아야 하나?
V: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데, 무시할 수는 없지.
O: 혼란, 무수한 혼란.
N: 그래서 김병수는 마음의 안식을 얻었나?
V: 감옥에 갇혔다면, 그랬겠지.
N: 내가 보기에 그한테는 공에 이르는 것이 진정한 휴식인 것 같은데.
V: 죽음 말인가?
N: 죽음이 또 다른 구속인지, 자유의 시작인지 어떻게 알고?
V: 그한테는 남아 있는 삶이 죽음보다 가혹했으니.
N: 연쇄살인마한테 삶을 선고하는 것이 더 잔인하다니, 이해가 안 가.
V: “아버지가 대답했다. 우린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니.” 다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앎을 택할까, 무지를 택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