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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를 추억하며
마크 트웨인 지음, 마음속 샛별 옮김 / 황금비둘기 / 2024년 5월
평점 :
잔 다르크라는 영웅은 우리와 거리가 꽤 있어 보인다. 중세 시대의 프랑스에서 자란 시골 소녀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지만 그녀의 업적과 죽음이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막대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백년 전쟁을 종결짓는 데 결정적으로 일조했고, 마녀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으나 명예가 회복된 이후 세계사에 전무후무한 영웅으로 기록되고 있으니까. 마크 트웨인을 비롯한 수많은 작가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영웅 서사에서 빠지지 않은 기원이 되었다. 재능을 알지 못한 채 평범하게 자라났으나, 신의 계시를 받아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영웅의 등장은 예언으로 예고되었으며, 장본인은 평화를 사랑하고 무력이 아닌 지혜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포로가 된 이후에도 온갖 핍박과 불리한 조건을 이겨내며 숭고한 정신을 유지했으나, 속임수에 넘어가 죽음을 맞이한다. 이보다 완벽하고, 동시에 인간적인 영웅 서사가 어디 있을까? 작가가 인간이 낳은 가장 비범한 사람이라고 평가한 이유가 충분히 느껴진다.
물론 작가의 다소 과장된 평가나 허구를 제하고 보면, 잔 다르크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 아무리 많은 이들의 증언이 있었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약점은 미화되고, 중요성은 확대되기 마련이니까. 그녀를 둘러싼 여러 가지 신비한 일들에도 불구하고 잔 다르크가 성자처럼 숭배되어야 할까, 라고 물어본다면 고개를 젓고 싶다. 잔 다르크 역시 연약한 한 명의 사람일 뿐이었고, 그녀가 영웅으로 서기까지는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비롯한 수많은 조력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니까. 마크 트웨인 역시 그 사실을 잊지 않고 그녀의 친구들을 등장시키고, 그들을 화자로 만든다. 이들의 목소리는 작품을 다소 감상적으로 만들기는 하지만, 보다 생생하게 그녀의 업적을 드러낸다.
그녀의 천부적인 재능에도 불구하고, "잔 다르크와 같은 사람이 또 나타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받는다면, 누구나 잔 다르크가 될 수 있다고 대답하고 싶다. 작가는 그녀에게 주어진 환경의 제약(교육을 받지 못한 시골 소녀라는 점 등)을 언급하지만, 적절한 교육과 좋은 환경이 보장된다면 얼마든지 그녀와 같은 지략을 갖출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 열아홉의 소녀에게는 누구도 쉽게 가지지 못하는 강한 정신력이 있었다. 손발이 묶인 채 몇 달, 거의 몇 년을 감옥에 갇혀 피폐해진 환경 속에서도 굳센 정신과 선량한 마음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은 진정 초인적이고 영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아니 눈앞의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짓을 고할 수도 있었지만, 잔 다르크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열악한 상황에서 오히려 강해지는 그녀의 모습은,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진술이 진실이든 아니든 그녀가 성스럽게 묘사되는 이유일 것이다.
무엇보다 잔 다르크는 그녀가 받은 엄청난 재능과 명예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출발한 곳을 잊지 않았다. 프랑스를 구출해 냈을 때, 그녀가 소원으로 삼은 것은 단 하나, 고향 동래미에 영원히 세금을 면제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약속은 결국 깨졌지만, 자신의 부와 명예가 아닌 고향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참 귀중하다. 보통 짧은 기간 내에 많은 것을 이루어 내는 사람들은 승리감에 젖은 나머지 자신이 어디서 시작했는지 잊곤 한다. 그리고 더 높은 곳을 나아가기 위해서 타인을 짓밟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납득한다. 하지만 잔 다르크가 원한 것은 이 전쟁이 승리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결코 되찾을 수 없던 친구들과의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잔 다르크의 죽음이 안타까운 것은, 그녀가 참전한 이후로 한 번도 그런 평화를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누구나 잔 다르크가 될 수 있지만, 누구도 될 수 없다. 그러한 위기 속에서 그러한 지혜와 명철을 보이면서도, 그러한 선량한 마음과 굳건한 정신을 간직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마크 트웨인이 에디슨의 사례를 언급했던 것처럼, 주변의 도움과 적절한 상황이 갖추어질 때 영웅이 탄생하는 법이다. 가장 이상적인 시대는 영웅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지만, 영웅을 요구하지 않는 시대는 한 번도 없었고, 시대의 부름에 응하는 영웅이 등장한 적은 더욱 적었다. 그 좁고 험한 길을 누구도 걸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을 희생하여 타인을 살리는 것은 영화나 매체에서나 등장하는 일이지, 역사 속에서 찾기란 참으로 어렵다. 마크 트웨인이 잔 다르크의 이야기에 매료되었던 까닭은, 위대한 영웅이 나타나기를 동경했기 때문이 아닐는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