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에서 영성으로 - 2017 신판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설거지는 재밌고 유익한 일이다. 그래서 "설거지는 가사노동 중 가장 불명예스러운 일로, 그것은 소비와 부패에 관련되는 일입니다. 설거지에는 아주 작은 비전이나 상상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라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명예 따위는 관심도 없다. 설거지를 하는 과정 속에는 널브러진 그릇과 식기를 씻는 자신만의 체계가 있고 미리 세운 계획대로 진행될 때, 더러운 것들이 씻겨나갈 때의 기쁨이 서려 있다. 나는 매사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집안일에 대한 생각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매번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는 설거지에 대해 고통의 상징 내지는 절망의 노동이라고 이름 붙일 필요는 없다. 일상은 문학의 소재가 될 뿐, 실현되는 공간이 아니다.


 2. 영어영문학과 전공 수업을 들으면, 반드시 접하게 되는 구절이 있다. "Carpe diem(Seize the day). Memento mori(Remember to die)." 호라티우스의 시구에서 가져온 이 라틴어 구절들은 르네상스 이후의 사조에 종종 등장하는 주제이다. 죽음은 언제나 인간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르기에 모든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동일한 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은 또 천차만별이다. 저자는 신과 죽음에 대해 알지 못했던 여섯 살의 시절부터 이어진 '메멘토 모리'를 한민족의 차원으로 확장한다. 이때는 왜 한국인의 특성을 그토록 강조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3. 한참 뒤에야 한국인의 특성을 강조한 이유를 이해했다. 가족주의의 온정과 효를 지선의 가치로 삼아온 한국인들은 가족이 중심이라는 시각으로 성경을 해석하곤 한다. 그래서 자기 자식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하는 구약의 인물들이나 자신의 어머니께 "여자여"라고 하는 예수님의 언행에 반발한다. 하지만 그것은 중립적인 호칭이며, 마리아를 한 사람의 어머니가 아니라 모두의 어머니로 만드는 선언이었다. 혈육으로 맺어진 가족은 물론 소중하지만, 기독교인은 그 이상의 도전이 필요하다. 문득 자기 가족이 아니면 무섭도록 무관심하다는 <인터스텔라>의 한 대사가 떠오른다. 요지는 "너의 가족만 사랑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나의 원수나 약한 사람들까지 품을 수 있느냐는 그 물음에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4. 보들레르의 짧은 시구를 보며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고 생각했다. 용서는 가장 강력한 형태의 사랑이라고 했는데, 나는 스스로를 사랑하기 어려운 상태일까? 사실은 그렇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기도로 용서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수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존재로 기억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기에, 내가 그런 존재로 다른 이에게 인식되는 것이 여전히 두렵다. 그렇게 될 때 나 자신을 용서할 자신이 없으니까. 그러므로 나는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야 한다. 언제나 우리를 향해 다가오지만, 매번 우리는 돌이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돌아온다. 기적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기적으로, 가슴이 굳은 자들에게는 사랑으로, 마음만 앞서는 자들에게는 말씀으로. 


 5. 그래서 나는 though보다는 therefore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이어령 씨는 오랫동안 글을 써 왔지만, "작가가 글을 쓰는 심정도 대개는 다 그럴 것입니다"라는 말로 타인을 쉽게 오해했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절망을 기록하거나 저항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작업이 즐거워서, 그 안에 자유롭게 내 생각을 담아내고 싶어서였다. 나의 삶을 고백하기보다 더 큰 상상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다루는 내용이 꽤 달라졌지만, 글쓰는 과정 속에서 내 생각을 털어놓고 마음을 비우는 경험은 다른 어떤 활동보다 유익하고 소중하다. 현재의 목표는 나를 지금 이 자리에 이끌어주었던 소중한 사람들의 삶과 마음을 소설에 기록하는 것이다. 어렵지만, 차근차근 해보려고 한다.


 6. 신기하게도 나 역시 '문턱'이라는 소재에 오래 전부터 매료되었다. 이어령 씨는 문지방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하지만 두 개념은 비슷한 듯 다르다. 저자의 표현은 전환점의 또 다른 말이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넘어가는 문지방에는 두 가지 선택지뿐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문턱은, 이분법의 갈래가 아닌 또 다른 방안에 대한 은유다. 문턱에 서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거나, 왔던 길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있다. 이때 문턱에 머무르는 것은 우유부단함이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논리가 아닌 새로운 관점에서 답안을 모색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도 문턱 위에 서 있다. 이를 테면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분명한 이원론에 대한 솔직한 생각이다. 나는 내가 천국에 가든 지옥에 가든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두려워하기보다는 지금 주어진 소명에 충실하고 싶다. 


 7. 지인의 선물로 받은 책이다. 『지성에서 영성으로』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고 언젠가 읽어 보아야지, 라는 마음을 품었다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선물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있지만, 똑같은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어령 씨의 시 쓰는 방식이 나에게 거부감을 준 탓일까? 그의 진솔한 고백이 설거지에 대한 편협한 생각으로 왜곡되었기 때문일까? 어쩔 수 없는 생각의 차이가 거리감을 줄이지 못한 이유일까? 뭐가 됐든 몇몇 생각이 맞닿은 것은 반갑다. 하지만 이 책을 다시 꺼내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2-05-10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arover 2022-05-11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 될 것이다
정영욱 지음 / 부크럼 / 202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배틀그라운드를 같이 플레이하는 학교 후배가 생일이라고 이 책을 선물해줬다. 생일 이틀 전, 우리는 경쟁전에서 치킨을 먹었기 때문에 (1등을 했다는 뜻이다) "엊그제 치킨 먹은 우리에게 어울린다"는 말과 함께 받은 이 책의 의미는 더욱 선명해졌다. 우리는 배틀그라운드를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 될 것이다"라니, 이것보다 든든한 격려가 어디 있을까? 4인으로 경쟁전에 들어가면 순위 방어까지 하지만, 대부분 작은 실수 또는 결정적인 실수로 팀원이 죽거나 전멸하여 치킨을 놓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서로에게 철저하게 피드백을 해 가며 운영과 실력을 보완해 왔다. 그리하여 후배가 선물한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 될 것이다』는 배틀그라운드를 할 때마다 되뇌이는 주문이 되었다. 


 나에게 배틀그라운드란, 쉽게 말해서 '인생 게임'이다. 2017년에 출시되었을 때는 군 복무 중이라 즐길 기회가 없었다. 2018년에 휴가를 나와서 친구들과 함께 처음 배틀그라운드를 접했을 때의 신선함과 즐거움이란! 그때는 운영도, 조준 실력도 형편없었지만, 그래서 내가 왜 죽는지도 모르고 상황 판단이 매우 느렸지만, 가상의 세계 속에 동료들과 소통하고 교전에서 승리할 때의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얼마 후, 나는 실력을 쌓기 위해 솔로 모드를 돌렸고 수많은 실패 속에서 스스로를 보완했다. 특히, 사람이 얼마 남지 않는 후반전에서 느끼는 긴장감과 집중력에서 오는 감정은 다른 어떤 게임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솔로 모드에서도 치킨을 먹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치킨을 먹으면서 배틀그라운드에 대한 이해도는 계속 높아졌다. 


 시간이 흘러 2022년, 여전히 실력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게임을 보는 눈은 어느 정도 생겼다. 적어도 남의 도움에 의존하는 운영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플레이를 만드려고 한다. 물론 그것이 욕심이 되어 팀 전체를 전멸시킬 때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과감한 결단이 좋은 결과를 낳은 적이 더 많았다. 고작 30분 남짓의 시간 동안 실시간으로 전략을 수정한다는 점에서, 이 게임은 FPS보다는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RTS와 비슷하다는(배틀그라운드 이전의 인생 게임이 바로 스타크래프트였다) 생각을 종종 한다. 2018년에 느꼈던 소중한 기억들, 예컨대 길리 슈트를 입은 적을 찾지 못해 유리한 상황에서 치킨을 놓쳤다거나 구급상자 먹는 법을 몰라서 경밖사(자기장에 불타 죽는다)하는, 서투르지만 그것조차 즐거웠던 추억들은 이제 재현될 수 없음을 안다. 그리고 게임도 늙어서 고인물(오래된 유저)과 핵(불법 프로그램)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유저들의 수도 초창기 같지 않다. 무엇보다 주변에서 배틀그라운드를 즐기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 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치킨에 대한 갈망은 남아 있다. 이 게임은 생존이 목적이다. 적을 많이 죽인다고, 좋은 아이템을 보유한다고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점수를 많이 획득하거나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질 뿐이다. 때로는 적을 죽이지 않아도 승리를 획득하기도 한다. 스쿼드 모드에서는 전투 능력이 탁월한 팀원을 보조하기만 해도 1인분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전장에 투입되는 100명의 인원은 모두 한 가지의 목표로 참여한다. 바로 '치킨'이다. 한 명, 또는 한 팀이 우승하기 위해 다른 모든 이들은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치킨을 먹지 못하면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아예 초반에 교전을 하다가 죽으면 미련없이 다음 판으로 가겠지만, TOP10(생존자 10명) 이하에서는 작은 실수나 판단 오류가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 때문에 자책을 하기 쉽다. 그럴 때마다 다시 한 번, 이 책의 제목을 주문처럼 되새겨야 한다. 너는 배틀그라운드를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 될 것이다. 치킨을 먹지 못하더라도, 과거에 느꼈던 감정들을 기억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점검하며 팀원과 함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서평은 안 하고 왜 게임 이야기만 하냐고? 이 책은 말하자면, 랜덤 스쿼드와 같은 것이다. 우연히 만난 유익한 동료다. 하지만 매치가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았든, 아무렴 관심이 없다. 만나게 된 이상 치킨을 향해 정진하고 실패하든 성공하든 헤어질 인연이다. 그러니 나는 무미건조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랜덤 스쿼드의 본질이 그런 것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랑켄슈타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4
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메리 셸리의 기념비적인 소설 『프랑켄슈타인』이 주는 의미는 참으로 다양하다. 역자가 해설에서 밝혔듯이, 소설에 등장하는 가공의 괴물은 과학기술과 문명에 대한 경고이자 메리 셸리의 파란만장한 삶을 비추는 역할을 수행한다. 처음에 내가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존재가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의 여부였다. 만약 인간으로 볼 수 있다면, 인간을 정의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인간이 아니라면, 감정과 사고를 지닌 기이한 존재를 만든 빅토르는 왜 칭송받지 못하고 비극을 맞이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괴물의 이름을 창조자의 이름으로 착각하는 것은 단순히 괴물의 이름을 작가가 설정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복수심에 불타 자신의 삶을 파멸로 몰아넣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누가 괴물인지 구별이 잘 가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라는 괴물"이라는 소재는 문학에서 자주 애용되는 소재이다. 오이디푸스 왕이 스핑크스라는 괴물을 물리칠 때, 괴물이 제시한 정답이 인간이라는 점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인간이야말로 쉽게 괴물이 될 수 있는 존재이며 종종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이 그렇게 된다. 괴물은 자신의 비극을 합리화하며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정당하다고 여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파괴로 몰아넣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그래서 빅토르가 만든 괴물이 인간인지 아닌지는 작품의 말미에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씩 죽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창조자는 생명체와 자신 중 반드시 한 쪽이 파멸해야 하는 시합을 열었기 때문이다. 괴물이 증언하듯이, 그의 광기는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했다. 괴물은 옆에서 발명가의 행보를 항상 지켜보았고 그(여자 괴물을 원했기에)의 눈에 프랑켄슈타인은 겉모습을 제외하면 자신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프랑켄슈타인』이 가진 명성에 비해 상당히 늦게 이 소설을 접했다. 내용이 고전문학에서 쉽게 다루지 않는 것임에도 19세기 영국 소설의 중요한 계보를 담당하고 있는 것은 당대의 풍조에 기꺼이 어긋나기를 택한 천재의 결단에서 비롯되었다.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일종의 새로운 신화를 만드는 작업이었지만, 메리 셸리는 그 안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과 생애를 담았다. 내가 포착하고 싶었던 것은 그러한 사소한 장면들이었다. 괴물이 드 라세의 오두막에서 읽은 고전에 대해 감상을 남기는 부분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시점을 계속 변화해가며 어느 한쪽이 편향된 시선으로 이야기를 해석하는 사태를 예방했다. 프랑켄슈타인의 비극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괴물 역시 사연이 있었으나 결코 옹호될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이 소설의 결론이다. 이 단순한 입장을 밝히기 위해 작가는 주변 인물을 설명하는 데에 많은 힘을 쏟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독자로서, 제3자로서 작가의 입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감정적으로 몰입되는 부분도 있었다. 엘리자베트와 결혼을 약속했으나 밝은 미래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던 빅토르의 심정도 이해가 된다. 그리고 그녀가 괴물에 의해 살해되었을 때 그가 느낀 충격을 상상하니 마음이 참으로 아팠다. 동시에 그를 옹호하는 대신 그녀의 죽음에 그가 일조했다는 냉정한 생각이 한편에 자리잡았다. 가상의 이야기, 또 하나의 세계에 몰입하여 그들의 삶과 생각을 따라가는 일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영역을 상상하고 준비하게 만든다. 문학이 일종의 교육이라면, 그리고 교육이 삶 전체에 걸쳐서 일어나야 하는 일이라면 나는 기꺼이 또 다른 세계를 찾아 헤맬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러브크래프트 전집 2 러브크래프트 전집 2
H. P. 러브크래프트 지음, 정진영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러브크래프트 작품의 정수라고 할 만하다. ‘우주에서 온 색채‘와 ‘광기의 산맥에서‘는 각각 우주적 공포와 미지에 대한 공포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두 작품을 읽으면서 전율을 느꼈다. 러브크래프트 입문을 마쳤다면, 당장 도전할 만한 작품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잭 런던 - 들길을 가는 사내에게 건배 외 24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6
잭 런던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원시와 문명'이라는 주제에 맞춰 여러 작가들을 탐색하다가, 나는 다시 잭 런던을 떠올렸다. 그가 남긴 야생의 기록들은 원시와 문명의 대비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했다. 그의 단편소설들은 대개 거칠고 감각적이다. 그의 문체는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조차 포착하게 만들며 장면들을 생생한 이미지로 남긴다. 그래서 잭 런던의 소설을 읽고 나면 머릿속에 어렴풋하지만 선명한 인상이 하나씩 남는다. 이번에 읽게 된 『잭 런던』 현대문학 단편선은 '클론다이크 이야기'와 이외의 단편들로 나뉘어 있는데, 각 부분마다 뚜렷한 특징이 있다. 

 

 단편들의 공통점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삶을 지키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그의 소설들을 읽었을 때는 '삶을 향한 의지'라고 뭉뚱그려 표현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단편들은 그 이상의 신념을 담고 있다. 언뜻 보면 '클론다이크 이야기' 속 인물들은 삶을 그저 연명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지금의 삶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었다. 더 나은 삶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불사하는 모험을 감행했고, 누군가는 실패했지만, 누군가는 이루었다. 그 의지들이 모여 광기와 모순의 시대를 만들었다. 역자도 인정했듯이, 잭 런던을 이야기할 때 그의 삶을 빼놓을 수 없고, 잭 런던만큼 미국 문학사에서 역동적이면서 모순적인 인물도 드물다. 그것은 그가 시대의 조류에 휩쓸린 것이 아니라, 파도타기를 하며 유유히 누비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잭 런던의 장편들 위주로, 그리고 원시의 세상에 대한 기록들만 살펴서 그런지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의 소재가 무척 새로웠다. 잭 런던과 알래스카의 겨울은 한 몸인 것을 알았지만, 그가 이토록이나 인디언들의 삶과 하와이 원주민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리고 그의 서술은 어떤 면에서 그들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을 옹호하고 있다. 비록 백인 문명이 그들을 살육하는 것을 막지도 못했고, 여전히 그는 백인우월주의를 품고 있었지만 말이다. 굳이 따지자면, 그는 자신의 단편을 통해 이렇게 외치고 있다. "어떤 자들이 더 우월하다고 해서 그들의 악행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어쩌나, 미국이라는 나라가 힘의 논리에 의해 유지되었던 것을. 잭 런던 역시 살아남기 위해 강한 자가 되어야 하지 않았나. 


 각 부분(클론다이크 이야기와 그 외)에서 인상적인 단편을 하나씩 꼽자면, 「불 피우기」와 「스테이크 한 조각」이었다. 전자는 극한의 추위 속에서 불이 가지고 있는 상징을 자연스럽게 부각시키면서, 살아남기 위한 주인공의 처절한 투쟁을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줄거리는 지극히 단순하지만, 그 안에서 긴장감과 의미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탁월했다. 이에 반해, 후자는 줄거리가 꽤 긴 편이다. 과거의 챔피언인 톰 킹이 돈을 벌기 위해 샌델이라는 젊은이와 권투 시합을 벌이는 과정을 담았는데, 톰 킹의 육체와 정신을 번갈아 조명하면서 실제로 시합을 관전하는 듯한 착각을 준다. 이 작가가 다루고 있는 소재가 참 다양하다는 것, 그가 인간에 대한 이야기도 잘 다룬다는 사실을 동시에 느꼈다. 어쩌면 이 책에 담긴 단편들 중 가장 인간적인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단순히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고민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생활의 영역에서 투쟁하는 이들에 대한 소설을 보며, 잭 런던이 말하려 했던 것은 '삶을 지키려는 의지'였음을 확실히 느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삶을 지킨다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한 채 편안함을 추구하는 가치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더 나은 무엇인가를 위해 모험을 감행하고, 끊임없이 싸워서 쟁취하는 것을 진정한 수호라고 여겼다. 때로는 그 싸움의 대상이 잘못되어서 등장인물을 파멸시키기도 하지만, 한겨울에 맨 몸으로 들개와 싸울 용기가 없는 자는 그의 작품에 담긴 정신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삶은 언제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다. 잭 런던이 사회주의자로서 앞장서고, 종군기자로서 조선까지 찾아온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그는 겪어보지 않으면 터득할 수 없다는 격언을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불멸의 영역을 상상하거나 인간이 우주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추론하지도 않았다. 영하 45도는 뼛속을 파고드는 혹한이라 장갑, 귀마개, 따뜻한 모카신, 두꺼운 양말로 막아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에게 영하 45도는 정확히 영하 45도였다.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는 생각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 P243

나는 이 생각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몰라. 나보다 앞선 오랜 옛날의 생각이고, 그러니까 진실이야. 사람은 진실을 만들지 않아. 눈이 멀지 않았다면 진실을 보고 알아차릴 뿐이지. 내가 생각한 이 생각이 꿈일까? - P5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