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런던 - 들길을 가는 사내에게 건배 외 24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6
잭 런던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원시와 문명'이라는 주제에 맞춰 여러 작가들을 탐색하다가, 나는 다시 잭 런던을 떠올렸다. 그가 남긴 야생의 기록들은 원시와 문명의 대비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했다. 그의 단편소설들은 대개 거칠고 감각적이다. 그의 문체는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조차 포착하게 만들며 장면들을 생생한 이미지로 남긴다. 그래서 잭 런던의 소설을 읽고 나면 머릿속에 어렴풋하지만 선명한 인상이 하나씩 남는다. 이번에 읽게 된 『잭 런던』 현대문학 단편선은 '클론다이크 이야기'와 이외의 단편들로 나뉘어 있는데, 각 부분마다 뚜렷한 특징이 있다. 

 

 단편들의 공통점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삶을 지키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그의 소설들을 읽었을 때는 '삶을 향한 의지'라고 뭉뚱그려 표현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단편들은 그 이상의 신념을 담고 있다. 언뜻 보면 '클론다이크 이야기' 속 인물들은 삶을 그저 연명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지금의 삶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었다. 더 나은 삶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불사하는 모험을 감행했고, 누군가는 실패했지만, 누군가는 이루었다. 그 의지들이 모여 광기와 모순의 시대를 만들었다. 역자도 인정했듯이, 잭 런던을 이야기할 때 그의 삶을 빼놓을 수 없고, 잭 런던만큼 미국 문학사에서 역동적이면서 모순적인 인물도 드물다. 그것은 그가 시대의 조류에 휩쓸린 것이 아니라, 파도타기를 하며 유유히 누비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잭 런던의 장편들 위주로, 그리고 원시의 세상에 대한 기록들만 살펴서 그런지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의 소재가 무척 새로웠다. 잭 런던과 알래스카의 겨울은 한 몸인 것을 알았지만, 그가 이토록이나 인디언들의 삶과 하와이 원주민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리고 그의 서술은 어떤 면에서 그들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을 옹호하고 있다. 비록 백인 문명이 그들을 살육하는 것을 막지도 못했고, 여전히 그는 백인우월주의를 품고 있었지만 말이다. 굳이 따지자면, 그는 자신의 단편을 통해 이렇게 외치고 있다. "어떤 자들이 더 우월하다고 해서 그들의 악행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어쩌나, 미국이라는 나라가 힘의 논리에 의해 유지되었던 것을. 잭 런던 역시 살아남기 위해 강한 자가 되어야 하지 않았나. 


 각 부분(클론다이크 이야기와 그 외)에서 인상적인 단편을 하나씩 꼽자면, 「불 피우기」와 「스테이크 한 조각」이었다. 전자는 극한의 추위 속에서 불이 가지고 있는 상징을 자연스럽게 부각시키면서, 살아남기 위한 주인공의 처절한 투쟁을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줄거리는 지극히 단순하지만, 그 안에서 긴장감과 의미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탁월했다. 이에 반해, 후자는 줄거리가 꽤 긴 편이다. 과거의 챔피언인 톰 킹이 돈을 벌기 위해 샌델이라는 젊은이와 권투 시합을 벌이는 과정을 담았는데, 톰 킹의 육체와 정신을 번갈아 조명하면서 실제로 시합을 관전하는 듯한 착각을 준다. 이 작가가 다루고 있는 소재가 참 다양하다는 것, 그가 인간에 대한 이야기도 잘 다룬다는 사실을 동시에 느꼈다. 어쩌면 이 책에 담긴 단편들 중 가장 인간적인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단순히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고민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생활의 영역에서 투쟁하는 이들에 대한 소설을 보며, 잭 런던이 말하려 했던 것은 '삶을 지키려는 의지'였음을 확실히 느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삶을 지킨다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한 채 편안함을 추구하는 가치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더 나은 무엇인가를 위해 모험을 감행하고, 끊임없이 싸워서 쟁취하는 것을 진정한 수호라고 여겼다. 때로는 그 싸움의 대상이 잘못되어서 등장인물을 파멸시키기도 하지만, 한겨울에 맨 몸으로 들개와 싸울 용기가 없는 자는 그의 작품에 담긴 정신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삶은 언제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다. 잭 런던이 사회주의자로서 앞장서고, 종군기자로서 조선까지 찾아온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그는 겪어보지 않으면 터득할 수 없다는 격언을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불멸의 영역을 상상하거나 인간이 우주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추론하지도 않았다. 영하 45도는 뼛속을 파고드는 혹한이라 장갑, 귀마개, 따뜻한 모카신, 두꺼운 양말로 막아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에게 영하 45도는 정확히 영하 45도였다.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는 생각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 P243

나는 이 생각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몰라. 나보다 앞선 오랜 옛날의 생각이고, 그러니까 진실이야. 사람은 진실을 만들지 않아. 눈이 멀지 않았다면 진실을 보고 알아차릴 뿐이지. 내가 생각한 이 생각이 꿈일까? - P5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