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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선 - 뱃님 오시는 날
요시무라 아키라 지음, 송영경 옮김 / 북로드 / 2025년 1월
평점 :
다른 누군가의 배가 파선되어야만 살 수 있는 마을
얼핏 들으면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누군가의 불행이 모두의 불행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이 책 속에 나오는 마을의 상황이 그렇다.
불과 열일곱 가구가 모여사는 작은 어촌마을... 당연히 일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땅을 일궈서 먹을거리를 해결하기엔 너무나 척박한 곳이라 그저 바다에서 얻을 수 있는 게 고작이다.
그런 이유로 고향마을을 떠나 고용 하인을 살러 가는 사람도 부지기수
주인공 소년 이사쿠의 아버지도 가족을 먹여 살리고자 고작 열한살의 이사쿠에게 가장의 책임을 지우고 고용 하인을 살러 이웃 마을로 떠난 상태다.
해가 뜨면 바다에 나가 끊임없이 일을 하지만 겨우 굶주림만 면할 뿐이었다.
어린 이사쿠는 이런 배고픔을 단박에 해결하려면 배님이 오셔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 배님이 오기 위해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이 마을 사람들이 쉬쉬하며 은밀하게 마을의 비밀로 지켜오는 것은 배님이 오게 하기 위해선 제사를 지내고 기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비바람이 부는 날 소금을 구워 그 불을 보고 오는 배가 파선되도록 한다는 걸...
그 배에 싣고 있었던 화물을 빼앗고 훔친 화물로 이제까지 마을 사람들의 배고픔을 면하고 쓰러져가던 마을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진실을 눈으로 직접 목격한 날 어린 이사쿠는 비로소 한 사람의 몫을 하는 어른이 되었다.
기괴하고 잔인하기까지 한 악행이지만 마냥 마을 사람들을 욕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마을의 비밀이 드러나기 전까지 이 마을 사람들의 고되고 가난하기 그지없는 삶을 소설 전반에 그것도 가난을 가장 가까이에서 몸으로 느낀 어린 소년의 시선으로 서술해놨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가난하면 그런 식으로 배가 파선하도록 유인하기까지 했을까 하며 마을 사람들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게 되고 그들이 그런 악행을 은밀하게 풍습이 되어 내려오게 된 사연에 대해 약간의 공감을 하게 된다.
약탈하지 않으면 내가... 내 가족이 굶어 죽는다.
냉혹하게 이런 이분법으로 생각해 보면 그들의 행동이 정당하지는 않아도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굶주림 앞에는 선도 악도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도 처음부터 이런 식의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으리라.
우연히 난파되어 온 배가 싣고 있던 화물이 이 마을에 풍요를 주었고 굶주림을 면하게 해 준 기억이 어느새 적극적으로 배를 유인해 배에 실린 화물을 빼앗는 식으로 발전된 것이 아닐까
마을이 처한 상황을 어린 소년 이사쿠를 통해 그리고 있어서일까 감정의 기복이 적어 담담하기까지 했던 문장이 더욱 처절하면서도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소설은 특히 이사쿠가 느끼는 불안과 초조함... 어린 동생의 죽음 앞에서 무력하게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을 때 느끼던 좌절감 그리고 마침내 배님이 오셨을 때 한 사람의 몫을 해냄으로써 마을사람들로부터 당당히 한 사람으로 인정받으면서 느꼈던 자부심과 같은 감정의 변화를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소재도 독특하고 배고픔과 가난이 사람을 어디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지를 제대로 보여줘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