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궁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시공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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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비극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아비에 의해 뒤주에 갇혀 굶어죽은 사도세자가 아닐까 싶다.

다음 군주가 될 몸이었음에도 가장 비천한 사람의 죽음보다 못한 죽음을 맞아서일까

그를 주인공으로 하거나 그와 아비와의 대립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 많은 이유다.

이번 작품 붉은 궁 역시 그런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설명을 들은 직후부터 이미 작품 속에 어느 정도 불행과 슬픔을 예고하고 있었지만 작가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도세자의 비극성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살인사건을 통해 그와 왕인 영조와의 대립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불행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제까지는 사도세자의 불운한 환경과 비극적인 죽음에 더 많은 관심이 가다 보니 그가 행했던 수많은 악행과 살인은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그와 아비인 영조와의 첨예한 정치적 대립이나 이를 둘러싼 파벌 간의 정쟁에 더 관심을 둬서 그를 희생양으로 취급한 작품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사도세자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면 즉 폭력성과 잔혹성에 대해서 더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어느 날 이제 의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현은 생각지도 못한 부름을 받고 세자의 처소로 갔다 불식간에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그날 밤 그곳에 세자는 없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세자빈과 의원은 마치 그곳에 세자가 있는 것처럼 진맥을 하고 밤새 곁을 지키는 이상한 일을 보게 되지만 이 모든 일의 연유가 밝혀진 건 다음날이었다.

혜민서에서 누군가가 잔인하게 혜민서의 의녀 셋과 궁녀 한 사람을 칼로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고 범인을 세자라고 고발하는 벽보가 붙으면서 이를 막으려는 자와 밝히려는 자의 치열한 싸움으로 궁궐 안에는 피바람을 예고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더 이상 커지기를 원하지 않는 누군가에 의해 하필 그 시간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로 현의 스승인 의녀 정수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게 된다.

자신의 스승인 정수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시작하는 현

그리고 그녀와 같은 목적은 가진 종사관 어진과 손을 잡고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날 밤 자신의 처소는 물론이고 궁에 없었던 사도세자는 강력한 용의자이지만 피해자가 입은 자상이나 그녀들의 모습을 통해 이는 누군가가 사도세자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함이 아닐까 의심스러워하는 현

게다가 자신이 봤던 세자의 모습은 불쌍한 강아지조차 함부로 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세자의 행동은 너무나 폭력적이고 광포하기까지 하는 잔인함에 주변 나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라는 뜻밖의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두 가지 중 어떤 것이 진짜 세자의 모습인 걸까?

현은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만났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그리고 자신이 몰래 엿들었던 대화를 통해 이 나라의 왕인 아비와 다음 왕이 될 세자 사이가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나빠졌을 뿐 만 아니라 서로를 못 믿고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된다.

사건이 진실에 다가갈수록 목숨을 위협받는 현과 어진

눈을 감고 진실을 외면하고 싶은 순간에도 끝내 자신의 안위보다 서출이라는 비천한 출신의 자신을 거두어주고 꿈을 갖게 해준 스승을 위해 노력한다.

신분의 차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서 서출로 태어나 언제나 아비의 사랑과 눈길을 갈구했던 현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면서 조금씩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아 스스로 일어서는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여기에다 좀처럼 밝혀지지 않았던 살인범의 정체와 사건의 진상은 이야기를 더욱 흥미롭게 하는 요소였다.

잘 짜인 스토리와 의외의 반전까지 제대로 갖춘 미스터리 소설로서의 재미와 신분의 차를 넘는 남녀 간의 애틋한 로맨스까지... 오랜만에 아주 재밌게 본 한국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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