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타 이슬라
하비에르 마리아스 지음, 남진희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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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에 유명한 스파이 영화가 있고 그 영화 속 캐릭터의 활약이 눈부시게 멋져 많은 사람들에게 스파이라는 단어는 어딘지 모르게 세련됨과 쿨함 그리고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받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간첩은 비슷한 일을 하지만 어딘지 불온한 냄새와 함께 부정적인 인식이 대부분인 것에 비하면 스파이는 어쩌면 언어유희나 마케팅의 덕분에 부정적인 인식보다 상당히 긍정적인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그려지는 스파이의 면면은 우리가 막연히 영화나 드라마 혹은 기존의 스파이 소설에서의 역할보다 상당히 부정적에 가깝다.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그게 더 사실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국과 스페인 반반의 피가 섞인 자유로운 영혼 토마스는 어린 나이에 베르타와 한눈에 운명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서로 함께 하게 될 것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으며 성장했던 둘은 학업 때문에 토마스가 옥스퍼드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그의 모든 인생이 순식간에 뒤바뀌는 사건을 겪는다.

원치 않았지만 언어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토마스는 비밀 정보부의 일을 하게 되면서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변하게 되고 그런 토마스를 곁에서 지켜본 베르타의 시선으로 이야기는 전개되고 있다.

가슴에 커다란 비밀을 품은 사람은 얼마나 고독해지고 황폐해질 수 있는가는 토마스의 변모를 보면서 여실히 드러난다.

영혼의 짝인 토마스가 언젠가부터 비밀스럽고 은밀해졌으며 말없이 사람들 곁을 떠도는 유령처럼 변해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베르타에게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원치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택했던 일이 알고 보니 그를 원했던 측에서 꾸민 함정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땐 이미 수많은 세월이 흘렀을 뿐만 아니라 살기 위해 죽은 사람으로 위장한 채 가족과의 연을 끊은 뒤였다는 내용이 밝혀지는 부분에서 그가 느꼈을 엄청난 배신감과 허탈함이 와닿았다.

어느 날부터 변해버린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 베르타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도 어쩌면 좀 더 차분하게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토마스가 유린되는 과정을 객관성을 유지하며 지켜보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타지에서 대의를 내세워 위험한 일에 직면해있는 동안 베르타 역시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지쳐 조금씩 전통적인 아내로서의 삶이 아닌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게 된 건 삶의 아이러니한 부분이었다.

어쩌면 그런 변화가 남편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변화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그의 모든 걸을 알 수 있다 생각했던 게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그러고 보면 그를 바라보면서 독백처럼 처리된 대사가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그가 어떤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지도 알 수 없었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우리는 각자 만의 내밀한 슬픔을 안고 있다`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에서 국가에 의해 도구처럼 쓰이고 버려진 비운의 남자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가장 가깝다고 느낄 수 있는 부부라 할지라도 상대의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진리를 일깨워주는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야기 초반의 진입장벽이 존재했지만 토마스가 위기 상황에 빠지면서부터는 속도가 붙어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젊어서 찬란하게 빛났던 두 사람의 삶이 국가에 의해 비틀어지고 변해가는 과정을 보면서 안타까움과 연민을 불러일으킨 이 작품은 왜 그토록 많은 찬사를 받았는지를 알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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