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어둠
렌조 미키히코 저자, 양윤옥 역자 / 모모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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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재출간된 백광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렌조 미키히코

이번엔 소설집 열린 어둠으로 나에게 색다른 재미를 안겨줬다.

직설적이거나 사건의 묘사에 치우치기보다 전체적으로 마치 아름다운 풍경화 속의 이질적인 한 부분을 강조함으로써 전체적인 느낌을 비틀어버리는 데 탁월함을 보여주는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도 그런 특징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도대체가 사건사고가 있을 것 같지 않은 풍경 속에 살짝 보이는 틈 속에서 비치는 어둠은 전체가 어두운 것보다 밝음 속에 가려져 그 어둠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아홉 편의 단편 중 첫 번째인 두 개의 얼굴은 처음부터 헷갈리게 했다.

화가인 남편에게 걸려온 전화는 낯선 호텔에서 아내가 살해되었다는 비극적인 소식이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상처 입은 피해자가 자신의 아내임을 인정했지만 사실은 그녀가 자신의 아내일 수 없다는 걸 가장 잘 알고 있는 것 역시 남편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내는 자신이 이미 집에서 살해한 후 마당에 묻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내와 똑닮은 호텔방의 시신은 누구란 말인가?

목이 졸린 채 발견된 반신불수의 소녀의 슬픈 이야기를 담은 화석의 열쇠는 소녀가 발견된 곳이 밀실이라는 점도 그렇고 그 열쇠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되었다는 점에서 누가 범인인 지 금방 알 수 있을 듯하지만 작가는 의외의 허를 찌르고 들어온다.

아홉 편 중 가장 독특했던 건 밤이여, 쥐들을 위해였다.

어린 시절 아무와도 말하지 않았던 소년이 쥐에게만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사랑하는 아내에게 자신의 유일한 벗이었던 쥐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도 그렇고...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자신의 아내를 위한 복수극이 기괴하지만 상당히 매력적으로 그려져있다. 거기에다 나름의 트릭을 준비한 것도 그렇고...

또 다른 복수극인 베이 시티에서 죽다는 자신을 배신한 여자와 부하를 찾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이야기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가 상당히 쓸쓸함을 느끼게 했다.

피의 복수라고 하면 연상되는 후련함이나 속 시원함 따윈 없고 그저 인생의 막다른 곳에 몰려 그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린 여자의 모습에서 짙은 허무감이 느껴졌다.

평생을 자신이 만든 캐릭터의 모습으로 산다고 생각했던 배우의 이야기를 다룬 대역에서 밝혀진 진실은 그로 하여금 이제까지의 자신의 삶에서 어떤 부분이 진짜고 어떤 부분이 만들어졌는지 헷갈리게 한다.

이야기 전체에서 대체로 이런 느낌이 강하다.

살인을 함에도 강렬한 원망이나 복수심 혹은 분노가 느껴지기보다 뭔가 한쪽 귀퉁이가 허물어진 느낌이랄지... 그래서 반전이 나오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보다 왠지 모를 허무함이 느껴진다.

엄청난 트릭이 있거나 사건 자체를 기괴하게 비틀어 놓지 않았음에도 반전은 생각지 못한 부분을 찌르고 들어온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어있는 인간의 욕망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고 있는 작가의 필력은 미스터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처럼 보인다.

잘 짜인 스토리, 복선마다 방점을 찍어놓은 친절함... 그리고 마지막 한 줄에서 전제의 이야기를 뒤틀어놓을 수 있는 능력

역시 렌조 미치히코 다운 작품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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