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사랑에 빠진 연인의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로맨스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아무래도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난 데서 오는 자유로움과 해방감이 사람의 마음을 넉넉하게 하고 말랑말랑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해서 평소보다 더 감수성이 폭발하는 것도 낯선 여행지에서 쉽게 사랑에 빠지는 요인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그 여행지가 여자들이 로망으로 간직하는 파리라면...?
제인 오스틴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는 여행 가이드 해나는 현재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하고 별다른 불만이 없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자신을 버려둔 채 마음대로 살던 엄마 말라와는 늘 티격태격하는 사이
그런 엄마가 긴급하게 연락을 취해오고 해나는 불길한 예감을 하게 되지만 자신의 인생이 뒤바뀌는 사건이 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할머니가 엄마와 자신에게 남긴 집을 정리하던 중 있는지도 몰랐던 증조할머니의 파리 아파트 문서를 발견했으며 그 아파트가 이제 두 사람의 소유라는 말라의 말을 듣고 믿을 수 없어 하는 해나
매사 충동적이며 자유분방하고 감정에 솔직한 엄마 말라는 당장같이 파리의 그 아파트로 가보자고 하지만 언제나 신중하고 계획적인 해나는 선뜻 찬성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파리 아파트의 상속세를 걱정하며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 해나를 끌고 파리로 가게 된 건 순전히 말라의 추진력 때문
하지만 오랫동안 묻혀 있었던 증조할머니의 아파트의 문을 연 순간 그 집과 사랑에 빠져버리게 된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그 집안에서 발견된 증조할머니 아이비의 다이어리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증조할머니의 연애사를 보게 되었다는 것...
늘 할머니로만 기억했던 증조할머니의 젊은 시절 뜨겁고 아름다웠던 사랑 이야기를 읽으면서 해나는 점점 더 그 집에도 할머니의 사연에도 매료되고 결국 또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로맨스 소설의 요소는 어찌 보면 단순하다.
어떤 계기로 남자와 여자가 만나 서로에게 끌리고 그런 끌림이 만남으로 이어지면서 사랑에 빠지게 되는... 그리고 평탄하던 연애는 라이벌의 등장 혹은 어떤 갈등 요인이 등장하면서 위기를 맞게 되고 서로의 사랑을 의심하면서 괴로워하다 극적인 화해와 더불어 해피엔딩~
이렇게 보면 너무나 단순한 플루트일 수 있지만 그걸 어떻게 풀어놨느냐에 따라 누군가의 메마른 가슴에 설렘을 안겨주기도 하고 주인공들의 해피엔딩을 간절히 바라게 되기도 하는 데 이 작가는 과하지 않은 감정의 표현과 담백한 문체로 시대를 넘어선 두 여자의 로맨스를 그리고 있다.
더군다나 두 사람에게는 수십 년의 세월 차가 있음에도 연애를 하는 데 있어서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하는지를 몰라서 애태우고 고민하는 모습은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걸 보여준다.
이런 달콤한 로맨스에다 극 중에서 너무나 다른 성격 때문에 늘 갈등을 빚는 해나와 말라 모녀의 심리 역시 제대로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서로 화해하는 과정까지 큰 무리 없이 이끌고 있다.
로맨스나 모녀 사이의 갈등을 제외하고서도 내용 중에 파리가 가장 찬란하게 빛나던 시기인 1930년대를 아이비의 다이어리를 통해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 데 그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당대의 가장 빛나던 예술가들...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비롯해 피츠제럴드 등등의 인물을 입체적으로 표현한 걸 보면 당시의 자료나 인물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한 듯 보이는 데 작품과 잘 어우러졌을 뿐 아니라 작품을 돋보이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예술이 찬란하게 꽃 피던 시기에 급작스럽게 맞은 전쟁 중에 예술가들과 당대의 지성인들은 어떤 고민을 하는지...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과 연애관은 지금과 어떤 차이를 보이는 지도 흥미롭게 비교해 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