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여자의 딸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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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묻는 장례식을 치르면서 시작하는 스페인 여자의 딸은 우리에게는 뉴스로만 들었던 베네수엘라의 참담한 상황이 아주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물가는 어제의 가격과 오늘의 가격이 다를 뿐 아니라 생필품을 사기 위해 암거래 시장을 찾아야 하고 은행마저도 믿을 수 없다.

그마저도 쉽지 않아 생리대 1통을 사기 위해 아델라이다가 접선하듯 돈을 치르면서 이제 피를 흘리는데도 돈이 든다는 냉소적인 독백은 얼마나 그곳 베네수엘라의 경제 상황이 안 좋은지 쉽게 설명이 된다.

정권이 교체되면서 여유로웠던 경제의 붕괴는 수많은 사람을 거리로 내몰았고 그 이후에 덮친 살인적인 물가는 평범한 생활을 하기 힘들게 했는데 그런 비교는 아델라이다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를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조국이 참담하게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지켜보며 그 혼란 속에서 오로지 엄마와 단둘이서 생활하며 지냈던 아델라이다의 마음속에서 진짜 조국을 버리게 된 시발점은 엄마의 죽음이었다.

온갖 약탈과 폭력으로 밖으로 나가기조차 힘들었지만 병원에 누워 계실지언정 엄마가 살아있을 때만 해도 조국에 대한 혐오와 거부감은 적었고 오로지 현재를 살아갈 뿐이었는데 엄마가 죽고 혼자 남은 순간 이후부터 그녀의 내면도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그녀는 비록 부유하진 않았지만 교사인 엄마와 둘이 생활하면서 늘 책을 가까이하고 직업 역시 출판사에서 일을 하는 인텔리였지만 혁명으로 바뀐 조국은 더 이상 지적인 대화나 문제 제기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로지 필요한 건 체제를 찬성하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람들 즉 자기편만 필요할 뿐 반대하는 사람에게 돌아가는 건 폭력과 죽음뿐인 세상

그들은 어디서든 어떤 식으로든 편을 갈라 서로 반목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눈앞에서 억울한 폭행을 당하거나 그보다 더 심한 일을 당해도 끼어들 수 없고 모른 척 외면해야만 한다. 인간성이 말살되는 현장이다.

하지만 외면만이 이 혼란과 혼돈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럼에도 아델라이다가 조국을 버릴 결심을 한 건 아니었다.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집마저 혁명군과 그를 추종하고 따르는 사람들로 인해 강탈당하면서 더 이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순간 이웃집의 여자가 죽어있는 걸 발견하면서부터 그녀의 내면이 변화했다.

조국을 버리자...

스페인 여자의 딸로 불리던 여자가 집에서 죽어 있었고 그녀에게 발행된 스페인 여권을 보는 순간 그녀가 되기로 결심한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오로지 이 지독한 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되기로 한 아델라이다 역시 쉽게 결정한 건 아니었고 자신이 살기 위해 그녀를 버리면서 죄책감을 가진 아델라이다는 끊임없이 자기혐오와 자기변명을 하며 자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다. 오로지 살아야 하고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는 명목적인 믿음을 붙잡고...

조용하고 아름다웠던 조국이 약탈과 폭행으로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가는 모습을 보는 아델라이다는 정치적 신념이나 이념이 투철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우리와 같이 평범한 일상을 누리고 살며 그런 삶에 만족할 줄 알던 평범한 사람이기에 더욱 그녀가 겪는 폭력과 부당함이 현실적으로 와닿았다.

멀쩡하게 눈을 뜨고서 자신의 집을 빼앗기고 저항하는 그녀에게 폭행을 가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 세상

그런 세상은 누구도 살아갈 수 없기에 그녀의 선택은 올바르지 않지만 누구도 욕할 수 없다.

스릴러 소설이 아님에도 아델라이다가 처한 상황의 긴박감 넘치는 묘사로 끝까지 긴장감이 넘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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